나에게도 같은 일이 생겼다. 한 사람에게 어떤 운동 하나가 삶의 중심 어딘가에 들어온다는 것은 생각보다 커다란 일이었다. 일상의 시간표가 달라졌고 사는 옷과 신발이 달라졌고 몸의 자세가 달라졌고 마음의 자세가 달라졌고 몸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가 달라졌다. 축구의 경험이 쌓이는 만큼 내 몸과 마음의 어떤 감각들이 깨어나는 걸 느끼면서, 축구가 너무 재미있어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을 느끼면서, 선수들과 이런 말을 주고받곤 했다. “왜 진작 축구를 하지 않았을까?” 사실 이 질문을 좀 더 엄밀하게 고치면 이렇다. “어렸을 때 우리는 왜 축구할 기회가 없었을까” “우리는 정말 운동을 싫어했을까?”
아웃사이드 드리블은 발 바깥쪽을 이용해 새끼발까락이 공 밑 부분에 살짝 들어가듯 차, 공을 밀어내며 전진하는 것을 말한다. 이 드리블 최고의 장점은 수비수를 속일 때 아주 유용하다는 점이다. 이쪽으로 갈 것처럼 몸을 기울여 상대 선수가 덩달아 그쪽으로 몸이 기운 틈을 타 반대쪽으로 휙 빠져나가기 좋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오해 유발’이야말로 아웃사이드 드리블의 사명인 것이다. 물론 나의 아웃사이드 드리블은 그 사명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엉뚱한 사람을 오해하게 만들어 버렸지만, 그 오해 덕에 절대 안 될 것 같던 고비를 넘겼다. 피치 위에서도 피치 밖의 세상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오해를 만들고 오해를 하고 오해를 받고 오해로 억울해하고 힘들어하지만, 그래도 어떤 오해는 나를 한 발 나아가게 한다.
온더볼이 공을 가지고 있을 때의 움직임을 말한다면, 오프더볼은 공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의 움직임을 말한다. 오프더볼은 꽤 넓은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지만, 내 생각에 오프더볼의 가장 결정적인 역할은 ‘공간’을 만드는 데 있다. 축구에서의 공간은 대개 ‘선수와 선수 사이의 공간’이기 때문에, 모든 선수들이 끊임없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현대 축구에서는 소수점의 초단위로 생겨났다가 없어지는 ‘찰나의 틈새’다. 시간 중에서도 매우 짧은 시간을 말하는 ‘찰나’와 공간 중에서도 매우 작은 공간을 말하는 ‘틈새’가 이중으로 겹쳐져, 거의 시공을 초월하기 직전의 미션처럼 보이는 ‘찰나의 틈새’를 만들어내는 것이 오프더볼의 묘미인 것이다. 상대편 수비에 생긴 찰나의 틈새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관중과 수비수들이 어? 저 선수 언제 저기 가 있었지? 싶은 곳에 기가 막히게 나타나 동료가 패스해 준 공을 골대로 바로 꽂아 넣는 골 센스, 미드필더들이 공을 돌리고 있을 때 번개 같이 상대 팀의 측면 틈새를 파고드는 우리 팀 측면 수비의 움직임, 짝궁 미드필더가 공격에 가담하면 한 발 뒤에 자리 잡아 상대의 역습을 대비하는 미드필더의 영리한 자리 지키기, 뭔가 굉장한 것을 할 것처럼 행동하며 수비수들을 자기 쪽으로 꼬드겨 끌고 와서 공을 가진 동료 앞의 공간을 한 틈이라도 넓혀 주는 ‘어그로 끌기’, 이 모든 게 다 오프더볼이다.
농구뿐만 아니라 축구에도 리바운드가 있다. 누군가 슈팅을 했지만 골키퍼의 선방이나 골대에 막혀 다시 흘러나온 공을 차지하는 것. 농구처럼 자주 벌어지는 상황은 아니지만, 아니기에 더욱 놓칠 수 없다. 골대 앞에서 바로 일어나는 일인 만큼 모두에게 일촉즉발의 순간이다. 이 공을 수비수가 차지한다면? 한시라도 빨리, 가능한 멀리 걷어 내려 할 것이다. 공격수라면? 골대 안으로 득달같이 다시 차 넣으려 할 것이다. 후자처럼 세컨볼을 재차 슈팅으로 연결해 성공한 골을 리바운드 골이라고 하는데, 이런 상황을 두고 더 흔히 쓰는 말은 ‘주워먹기’다.
축구뿐 아니라 유니폼 입고 하는 모든 팀 스포츠들이 그렇겠지만, 때로 유니폼의 커다란 가시성은 그 안의 개인을 지나치게 비가시화한다. 한 사람의 고유한 개성이나 인격이 유니폼에 박한 번호 뒤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사진들 속에서 번호와 얼굴을 함께 볼 수 없는 것처럼. 뒷모습은 앞모습이 아니니까. 아마 어떤 팀들에게는 우리 팀도 그럴 것이다. 그나저나 할아버지들, 이렇게 다 다르게 생겼는데 그동안 왜 비슷비슷하게 보였던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누군가 떠나가도, 그 여파로 잠시 주춤해도, 양발을 여기 딱 붙이고 공을 던지면 멈췄던 축구는 그렇게 계속된다. 번호 뒤에 제각기 다른 얼굴을 갖고 있는, 등 번호의 뒷모습이 앞모습이고 앞모습의 뒷모습이 등 번호인 사람들의 축구. 그동안 그들은 나에게 그냥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서 축구가 끝나면, 식사가 끝나면 어디론가 사라지는 사람들이었다. 이제는 아니다. 나타났다 사라지는 시간의 앞과 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아마추어 팀들, 선출이거나 몇몇 특출난 선수들을 빼면 모두가 드리블, 패스, 트래핑 같은 기본 기술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실수할 가능성이 다분한 팀들은 ‘뻥 축구’가 됐든 ‘똥볼 축구’기 됐든 시도해 볼 만한 전술이기도 하다. 축구에서 승패의 관건은 전방에 있는 공격수의 발까지 공이 얼마나 잘 배달되느냐에 있다. 프로 아닌 일반 선수들의 개인 능력치를 고려했을 때 그들이 얼마나 압박에서 벗어나서 돌파하고, 동료에게 패스를 정확히 찔러 주고, 드리블로 착착착 공을 몰고 가서 전방 공격수의 발까지 무사히 공을 전달하는 것이 과연 쉬울까? 그러느니 차라리 잔디 위에서 산 넘어 산 처럼 펼쳐지는 모든 과정을 뛰어넘을 수 있는 ‘뻥 볼’을 멀리 차 놓고 그 뒤처리를 프로 출신 선수들에게 맡기는 게 더 효율적일 수 있다. 어차피 축구는 확률 싸움이니까.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 팀의 ‘작전’인 것이다.
낯선 곳으로 향하는 밀폐된 차 안은 묘한 공간이다. 짧은 여행이 일상에 만들어 낸 작은 틈으로 불어든, 적당히 설레고 어딘가 낯선 바람이 가득 차 있는 공간. 설레고 낯선 바람에 취해서 평소였으면 하지 않았을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어 도로 위에 무료할 것처럼 길게 펼쳐진 시간의 틈을 함께 메우는 공간.
신체 조건상 남자 축구에 비해 힘과 속도가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여자 축구만의 독특한 색깔이 나온다. 남자 축구는 뭔가 휙휙 재빠르게 지나가 버리는 느낌이라면, 여자 축구는 상대적으로 느리고 정적인 몸동작과 전개가 선수들과 공이 만들어 내는 축구의 전체적인 그림을 좀 더 명확하게 보여 준다. 패스 워크라든지, 오프더볼 상황에서의 움직임이라든지, 역습 때의 호흡 같은 것들을 그때그때 섬세하게 읽어 내는 재미가 있다. 툭툭 주고 받는 짧은 패스들이 중간에 끊기는 일 없이 호쾌한 슈팅까지 어이지는 과정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한 장 한 장 엇갈리게 섞인 트럼프 카드가 둥그렇게 만든 손 모양을 따라 폭포처럼 아래로 좌르륵 떨어지며 반듯하게 정리되는 것을 볼 때처럼 살짝 황홀하고 근사한 기분이 된다.
정말 그랬다. 감독님 말이 맞았다. 좀 전에 나는 똑똑히 봤던 것이다. 내 발끝에서 튀어 오른 공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갈 때 내리쬐는 햇빛을 받아 순간적으로 하얗게 빛나던 것을. 그것은 정말 하얀 달 같았다. 허공에서 공이 달이었던 그 짧은 순간, 그 달을 보면서 우리 팀 모두가 제발, 제발, 한 골만 들어가 달라고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루어졌다. 달빛처럼 은은하지만 환하게 빛나는 1대0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