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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디 Oct 27. 2020

1984



문득 이중사고라는 신어가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미래와 소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일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미래가 현재와 비슷하다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다르다면 이 수난의 기록은 무의미한 것이 되리라. 


당에서는 오세아니아가 유라시아와 동맹을 맺은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윈스턴은 오세아니아가 사 년 전에 유라시아와 동맹을 맺었던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지식이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바로 그의 의식 속에, 여차하면 완전히 지워져 버릴 그의 의식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만일 사람들이 당의 거짓말을 믿는다면 - 그리고 모든 기록들이 그렇게 되어 있다면 - 그 거짓말은 역사가 되고 진실이 되는 것이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이것이 당의 슬로건이다. 그러나 과거는 본질적으로 변경될 수 있음에도 여태 그런 적이 없다. 지금 진실한 것은 영원히 진실하다. 필요한 것은 자신의 기억을 끊임없이 말살시키는 것뿐이다. 사람글은 이를 ‘현실제어’라고 칭했는데, 신어로는 ‘이중사고’라고 한다.


“낱말을 없애는 건 대단히 매력적인 일이지. 물론 쓸모없는 낱말은 동사와 형용사에 많지만, 없애야 할 명사도 수백 개나 있네. 도대체 한 낱말이 단순히 다른 낱말의 반대만을 뜻한다면 굳이 있어야 할 필요가 뭐 있겠나? 한 낱말에는 이미 그 자체에 반대로 말할 수 있는 요소가 포함돼 있네. 그래서 좋은 이라는 낱말을 예로 든다면 반대말은 안 좋은 이라고 하면 되지. 철자도 생판 다른 나쁜 이란 말이 뭣 때문에 따로 필요하갰나.”


“자네는 신어를 만든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는 데 있다는 걸 모르나? 결국 우리는 사상죄를 범하는 것도 철저히 불가능하게 만들 걸세. 그건 사상에 관련된 말 자체를 없애버리면 되니까 간단하네.”


“자유의 개념이 없어졌는데 ‘자유는 예속’이라는 슬로건이 어떻게 있을 수 있나? 모든 사상적 분위기도 달라질 것이네. 사실상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사상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걸세. 정통주의는 생각하지 않는 것, 생각할 필요도 없는 걸 뜻하네. 요컨데 정통주의란 무의식 그 자체일세.”


당이 행하는 무서운 짓은 물질적인 세계를 지배하는 인간의 힘을 모두 빼앗아 가는 한편, 단순한 충동이나 감정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억지로 인식시키는 것이다. 행동하는 것과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 그야말로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된다. 개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물론, 그 존재와 행적까지도 영원히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두 세대 전의 사람들은 역사를 바꾸려 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런 일은 그리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개인의 성실성으로 삶을 살았고,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인간관계 였으며, 죽어가는 사람을 포옹하고 눈물을 흘리고 한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등의 무력한 행위에서도 어떤 가치를 찾을 수 있었다. 문뜻 노동자들은 아직 이런 상황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윈스턴의 뇌리를 스쳤다. 그들은 당이나 국가나 이념 따위에 충성을 바치지 않고 그들 자신에게 충실했다. 그는 비로소 노동자들을 경멸하지 않게 되었다. 


현대 전쟁의 성격을 이해하려면 - 몇 년마다 한 차례씩 전쟁 상대국이 바뀌지만 전쟁을 늘 똑같은 양상을 띠기 때문에 - 우선 그것이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점부터 인정해야 한다. 싸워야 할 실질적인 명분이 없는 것도 현대 전쟁의 성격이랄 수 있다. 자립 경제 체제가 확립되면서 생산과 소비가 서로 조화를 이뤄 전시대에 전쟁의 주요 원인이었던 시장 확보를 뉘한 경쟁은 이제 끝난 상태이고, 원자재 획득을 위한 경쟁 역시 더 이상 생사를 건 문제가 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세 초국가들은 영토가 굉장히 넓어 자국의 영역 내에서 필요한 모든 물자를 얻을 수 있다. 따라 굳이 전쟁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전쟁이 경제적인 목적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노동력 확보다. … 현대 전쟁의 기본적인 목적은 (이중사고 원칙에 의해 내부당원의 지도급 수뇌들은 이를 인정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한다.) 국민의 전반적인 생활수준을 향상시키지 않으면서 공산품들을 완전히 소모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식의 일률적인 부의 증가는 계층적 사회의 파괴를 초래할 위험을 안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적게 일하고 배불리 먹으며 목욕탕과 냉장고가 있는 집에서 자동차와 비행기까지 소유하고 산다면, 사회의 핵심을 이루는 불평등의 구조는 틀림없이 붕괴되고 말 것이다. 만약 부가 일반적인 것이 되면 차별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시간적 여유와 함께 경제적 안정을 똑같이 누리게 되면 빈곤에 허덕인 나머지 사회에 무관심했던 대중이 마침내 눈을 뜨게 되고, 또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면서 결국은 소수의 특권층이 존재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깨닫게 됨으로써 그들을 몰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계층 사회의 장기적인 존속은 가난과 무지를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하다. 


전쟁 행위의 본질은 인간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노동력의 산물을 파괴하는 것이다. 대중을 지나칠 정도로 편안하게 하는 한편, 장기적으로 그들을 지혜롭게 하는 데 사용되는 물품들을 박살내거나 하늘로 날려버리거나 바다 속 깊이 빠뜨리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가 실제로 파괴되지 않는다고 해도 무기 공장은 소비 물자 생산에 사용될 노동력을 소모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과거의 어떤 정권이든 시민들을 끊임없이 감시할 힘이 없었다는 데 있다. 하지만 인쇄술의 발달로 보다 쉽게 여론을 조작할 수 있게 됐고, 이것은 영화와 라디오로 인해 한층 더 용이해졌다. 특히 텔레비전의 발명으로 동일한 기계가 동시에 송수신할 수 있는 기술적 진보가 이뤄짐으로써 사생활은 마침내 종말을 고했다. 모든 시민, 적어도 요주의 인물들은 하루 24시간 내내 경찰의 감시 아래 둘 수 있고, 다른 모든 통신망은 폐쇄시킨 채 정부 선전만 듣도록 할 수 있게 됐다. 


이중사고라는 낱말은 이 외에도 다른 여러 뜻을 내포하는데, 우선 이것은 한 사람이 두 가지 상반된 신념을 동시에 가지며, 그 두 가지 신념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당의 지식층은 자신들의 기억을 어떤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할지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현실을 농락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이중사고의 훈련에 의해 현실은 침해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만족해한다. 그런데 이 과정은 의식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확하게 수행될 수 없다. 그러데 또한 이런 과정은 무의식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날조를 한다는 느낌이 들게 되고, 그로 인해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 


다시 한 번 무력감이 윈스턴을 엄습했다. 그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이론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말장난일 뿐이었다.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논리적으로 맞기나 하는 것인가? 그는 오브라이언이 대답할 수도 없는 희한한 논리로 자신을 꼼짝 못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잔뜩 주눅이 들었다. 


증오심으로 불타는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단적인 사상은 영원히 그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어 벌을 받지도, 회개를 강요당하지도 않으리라. 결국 그들의 완벽성에 하나의 구멍이 뚫리는 셈인데, 마지막까지 그들을 증오하면서 죽는 것, 이것이 바로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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