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의미가 더욱 부풀어오르는 언어의 온도
온도 하나 잘못 맞추면 오븐 위 마카롱이 타고, 냉장고 속 김치가 쉰다. 뜨거움과 차가움의 정도가 물리적으로 표시되는 온도를 화학적이고 감정적인 요소에 부여하면 의미가 더욱 커진다. 표현의 정도, 언어의 온도가 바로 그런 것이다.
작년 연말회고를 하면서 2023년 가장 감사한 일로써 “시의 매력을 알게 된 일, 활자와 더욱 친해진 일”을 꼽은 기억이 있다. 언어의 테두리 안에서, 예쁘게 표현하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 생김과 동시에 2024년에는 나도 더욱 예쁘게 표현하는 사람이 되리라는 다짐도 덧붙였다. 내 언어의 온도를 더욱 데워보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표현은 아낄수록 좋아.”, “경상도 남자는 무뚝뚝해서 표현을 잘 못해.”, “사랑의 언어를 많이 뱉을수록 때가 묻고 그 무게는 가벼워져.” 따위의 냉각장치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일부러 언어의 온도를 낮추는 일 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물체에 열을 가하면 부피가 팽창하는 것처럼, 언어의 온도를 높이면 우리의 감정과 친밀도가 팽창한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사실 온도를 맞추는 일은 쉽지 않다. 나의 열을 나눠줘서라도 너의 언어를 끓이려 했지만 끝내 둘 다 식어버리고, 냉각수가 순간의 감정에 들이부어져 나의 언어마저 딱딱하게 얼어붙기도 했다. 무엇보다 언어의 기본설정 온도가 비슷한 사람을 만나기가 너무 어려웠는데, 그나마 같은 온도 속에 있는 사람들을 만난 일이라 하면 내가 거쳐 간 글쓰기 모임들이 떠오른다. 글쓰기를 취미로 삼고 있고, 언어로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내가 말하는 언어의 온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된다. 온도를 골똘히 맞출 일 없이, 잔잔한 공기와 훈훈한 온도 속에서 오순도순 서로의 글을 나누는 시간들이 나에게는 큰 안정감을 주었다. 나는 언어의 온도가 비슷한 사람들과의 꾸준한 만남을 통해 그 온도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고, 앞으로도 열심히 온도를 맞추기 위한 열과 정을 얻게 되었다. 이 순간마저, 내 글의 온도에 함께 녹아들 친절한 얼굴들이 따스히 떠오른다. 과거 언어의 온도를 맞추는 과정에서 통증을 느끼고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비슷한 온도를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현재 큰 감사를 느낀다.
온도를 잘 맞추면 우리의 감정이 달달하게 부풀어 오르고, 관계가 싱싱해진다. 뜨거움과 차가움의 정도가 물리적으로 표시되는 온도를 화학적이고 감정적인 요소에 부여하여 ‘우리’가 더욱 커졌다. 비로소 내가 말하는 표현의 정도, 언어의 온도가 바로,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