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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시언니 Nov 30. 2019

공포의 시간이 끝났다고 생각했어

네 잘못 아니야. 그 누구도 너를 만질 자격은 없어(1)





12시가 조금 넘은 캄캄한 밤이었어요. 공원 옆으로 난 2차선 도로는 늘 다니던 길인 대도 더 어둡게 느껴졌어요. 그 어둠이 오싹해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걸음을 서둘렀어요.








그 날은 오랜만에 팀원들과 맛있는 식사를 한 날이었어요. 늦은 시간까지 일 하느라 지쳤던 우리는,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인 곱창을 배부르게 먹었어요. 그리고는 막차 시간을 넘기지 않게 일어나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어요. 나는 소화나 시킬 겸 지하철 한 정거장 전에서 내려 집까지 걷기로 했어요. 아직 불빛이 남아있는 상가를 지나 이제 저 언덕 위의 막다른 담을 두고 코너를 돌면 공원 옆으로 난 내리막길로 접어들어요. 왼쪽으로는 불 꺼진 건물, 오른쪽으로는 공원이라 더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어요. 내가 그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갈 때였어요.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들렸어요.


 다다다 다다다닥.  


다급한 발걸음 소리.







<범인>



나는 지금도 그 날, 당신의 발걸음 소리를 잊지 못해.

타 다다다 다다다닥.

너무 빨라 놀랄 새도 없었어.

당신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뛰어 와 내 등 뒤에 붙었고

오른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지.

그리고 남은 왼 손으로 내 다리 사이를 만졌어.

짧은 순간, 그런 생각을 했었어.

나. 는. 지. 금. 죽. 고. 있. 다.

성급한 왼손 탓이었을까. 당신의 오른손은 내 입을 완전히 틀어막지 못했고

입이 살짝 벌어진 틈을 타 나는 있는 힘껏 소리쳤어. 온 힘을 다했어.  

그때였어. 다른 발걸음 소리가 들렸어.

역시 다급하고 빨랐지만 그건 위협의 소리가 아니었어.

내리막길의 끝에서 나를 향해 뛰어오는 두 남자와 한 여자.

당신은 언덕 위를 향해 도망쳤어.

나를 향해 돌진할 때만큼 빠른 걸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공포의 시간이 끝났다고 생각했어.









<나를 향해 뛰어   남자와  여자>




고맙습니다.


그 날 이후로 다시 본 적도 없고 다시 봐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아니었다면 저는 정말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공원을 산책하고 나오시던 길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시간에 거기 있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여자 혼자도 남자 혼자도 아닌 세분이 함께 계셔서 고맙습니다.

제 비명에 지나치지 않고 달려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범인을 잡으려고 뛰어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대신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갑은 있냐고 흉기는 없었냐고 다치진 않았냐고 물어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람,  사람이 나를...”

다음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지갑도 잘 있고 흉기도 들고 있지 않았고 몸이 다치지도 않았으니

내가 겪은 일이 별일 아닌 건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입니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저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범인을 따라간 남편 걱정에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든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살아있어 저도 살아있습니다.


제게 가까이 다가와 저를 위로하신 분은 따로 있었습니다.

저 언덕 위에서 이 번잡한 상황을 바라보며 리어카를 끌고 오는 할아버지요.










<종이 줍는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정신을 놓고 있는 나를 다짜고짜 안으셨죠.

그래요, 분명 위로의 몸짓이었겠지요.

하지만 저는 몸을 피하며 나를 끌어안는 당신을 밀어냈어요.

그 순간은 어떤 남자도 안전하지 않게 느껴졌거든요.

그리고 평소에도 생판 처음 보는 낯선 어른과 포옹하지는 않으니까요.

내가 당신을 밀어냈을 때, 그때 멈춰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당신은 울지 말라며 다시 한번 나를 더 꽉 끌어안았어요.

나는 울고 있지도 않았고, 당신 팔에서는 완력이 느껴졌고 불쾌했습니다.

억지로 나를 안으려 드는 당신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건 경찰이 도착했을 때였어요.

당신은 그들에게 말했죠.

“웬 남자가 아가씨를 따라 가는데 느낌이 영 이상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뒤따라 와 본거야. “

이렇게 따라와 주시고 살펴주시니 정말로 고맙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어디서부터 보고 계셨어요?

이 긴 거리에서.








<경찰>




 냄새가 나던가요? 아닌가요?

음주 여부에 따라 도망칠  행동반경 범위가 달라지거든요.”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도 술을 마신  같아요.


인상착의는요? 머리가 짧았나요? 체격은요? 키는요?”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도 어두운  티에 청바지, 짧은 머리, 보통 체격, 175-6cm쯤이요.


찾아보실 건가요? 아니면 귀가하시겠어요?”


찾아야죠. 잡아야죠. 당연히.


아저씨.

누가 달려와 뒤에서 입을 틀어막고 몸을 만지면요.

술 냄새도 인상착의도 아무것도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아요.

내가 어리석고 경황이 없어 기억을 못 하는 게 아니 구요,

나한테는 죽어가는 시간이 었다고요.

찾아볼 거냐 구요? 당연하죠.

도대체 왜 이 일이 아무 일도 아닌 거죠?

그래도 다행히 이예요.

왜 이 시간에 여기 있냐고, 왜 이런 옷을 입었느냐고,

설마 술도 안 마신 남자가 여자를 뒤따라와 만지고 달아나겠냐고 하지 않아 주어서.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사건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나보다

더 바보 같지만.

그리고 물론 그런 질문은 곧 다른 사람이 해주었지요.

범인을 찾겠다는 내 고집을 못 이겨 억지로 경찰차를 같이 타 준 내 동생.










<동생>




내 전화받고 많이 놀랐지?

걸어도 십 분인 거리를 택시 타고 달려오는 너를 보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어.

너는 놀란 것 같았고, 화도 난 것 같았고, 나를 보고는 안심한 것 같기도 했어.

길에 떨어져 있는 가방을 집어 들고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나를 보고 말했지.


   시간에 여기에 있어?  이런 옷을 입고 있어? 도대체 ?”

화났다면 미안해. 나는 그냥...

배가 너무 불렀어. 소화시킬 겸 좀 걷고 싶었어. 그러니까 그냥 산책 같은 거였어.

그걸 지금 하고 싶었고 이 거리를 택했어. 나 원피스 좋아해서 원래 자주 입잖아.

또 무얼 더 말해야 하나.

보다시피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라고?

초가을 밤도 나한테는 한기가 있어 카디건도 걸쳤다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밤길을 걷진 않았다고?

나는 보통 일이 열 시 넘어 끝나니까 막차 타고 오는 게 흔한 일이라고?

또 무얼 더 말해야 하나.

아랫도리를 만지긴 했지만 옷 위로 더듬었을 뿐이라고?

3초 정도밖에 안 되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고?

그래도. 성폭행은 아니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범인을 찾겠다고 경찰차를 탈 때 마지막 한마디를 했지.


어디 가서 얘기하지 . 창피한 일이니까.”











<평범한 남자>






경찰차를 타고 공원 근처 골목길을 구석구석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 당신을 본 겁니다.

당신은 어느 집 앞 계단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거칠게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경찰차가 당신 앞에 섰습니다.

창문을 내렸습니다.

당신은 고개를 들었습니다.

짧은 머리, 보통 체격, 어두운 색 반팔 티.

너무 흔한 인상착의.

그때 깨달았습니다.

절대로 범인을 잡을 수 없다는 걸.

범인의 인상착의는 평범했고, 나는 범인의 얼굴을 정확히 보지 못했고,

범인은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았고,


나는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글/그림 : 두시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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