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이해
불현듯 아주 갑자기 그녀의 인스타그램을 들어가 보게 되었다. 사실 헤어지고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게 원래 나였다. 설령 내가 차이는 한이 있더라도 아주 매정하게 뒤 돌아 서 버린다. 그리고 말끔히 잊기 위해 노력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헤어진 사람의 뒷모습을 지금까지 보지 않으려 했다. 그게 친구든 연인이든 누구든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생각이 나지 않던 그녀의 인스타 아이디가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가장 최근에 올라온 피드는 23년 2월이었다. 꽤 오래전이라 역시 sns를 잘 안 하는 사람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피드에 올라온 사진과 글을 읽는 순간 많은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지나간 것에 미련을 두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 글을 읽으면서는 미련보다는 아쉬움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항상 늘 그렇듯 잃어봐야 소중함을 알고 소를 잃고 나야 외양간을 고쳐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그렇게나 힘들었을까?
나라는 인간이 참 부족하고 못났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을 보면 솔직히 의아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 같은 놈을 왜...? 굳이...? 하지만 그들도 나라는 인간을 제대로 알고 나면 부리나케 도망가기 바빴다. 그래서 난 나라는 인간을 깊이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모자란 인간이라는 것을 들키는 게 그토록 부끄럽고 보잘것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심에 책을 쓰게 됐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책을 통해 나라는 인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를 알길 원한다. 그녀도 그랬을 것이다. 사실 그 책 속에 나는 굉장히 일부에 불과하다. 어쩌면 그 속에 있는 나는 완전히 다른 나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작년 이맘때 사랑의 이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드라마 배경이 은행이라는 점과 은행경비원이 주연이라는 점은 나로 하여금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보통 은행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은행경비원은 조연 중에서도 비중이 적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기선 아예 메인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지만 드라마 1화를 보고 5분 만에 멈췄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내용인데...? 마치 내 이야기 같았다. 내 책 속에 나와 있는 내용과 비슷해서 놀랐다. 은행에서 급이 정해져 있다는 이야기,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손님과 VIP실로 바로 향하는 손님의 차이 그리고 나이 든 할머니를 상대하는 모습까지 말이다. 그러고 보니 책을 냈을 당시 jtbc 기획팀에서 내 책을 사 갔던 게 기억났다.
사실 사랑의 이해는 이혁진 작가님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책도 궁금해 사서 읽어보았다. 그런데 드라마 상에서 나온 이야기와 책에 나온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특히 1화 초반 은행의 배경을 설명하는 장면이나 극 중 은행경비원인 종현의 독백 등은 아마도 내 책을 참고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원작 소설에선 그런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 책을 유심히 잘 읽어 본 사람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 또한 그 드라마를 봤을 때 내가 떠올랐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 때 나의 일상이었던, 차별이 난무했던, 불안과 공허가 뒤섞였던 그때를 말이다. 잘 지내냐는 물음에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젠 더 이상 안부를 주고받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참 어렵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기란 그리고 그 마음을 충족시켜줘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너무 과하면 부담스러워하고 너무 적으면 서운해하는 그 정도를 찾기가 참 어렵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고 누군가는 정답이 없음을 좋아하지만 난 이제 조금 지친다. 차라리 정답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게 더 편할 것 같다. 감정을 소모하는 것이 이제는 버겁다. 이래서야 뭐 사람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싶다.
사랑의 이해에서도 엇갈린 서로의 마음이 뒤엉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들이 연속으로 발생한다. 상수는 수영을 좋아하고 수영도 상수를 좋아하지만 상수는 미정을 만나고 수영은 종현을 만난다. 그 속에서는 서로의 차이가 존재한다. 은행원 중에서도 부잣집 딸인 미정은 정규직 은행원인 상수를 마음에 들어 했고, 강남에 살지만 재개발 지역에 살며 홀어머니 밑에서 힘들게 자란 상수는 수영이 끌린다.
은행원이지만 계약직 텔러이며 고졸인 수영은 상수가 끌지만 같은 계약직에 공무원 준비생인 종현과 만나게 된다. 계약직임에도 열심히 살아가는 수영을 종현은 멋있어하며 좋아하기에 이른다.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이해관계들 그리고 서로의 배경과 상황과 위치 따위들이 얽히고설켜있다. 이러한 환경과 상황에서 정말 사랑이라는 걸 할 수 있을까? 아니 사랑이라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
드라마를 보면 이런 장면들이 자주 나온다. 네 사람의 위치를 보여주는 장면들 말이다. 3화 중반에 종현과 수영은 바나나 우유를 마시며 야경을 본다. 종현이 말한다.
"저기서 야경을 보면 뭐가 다를까요? 꼭 언젠가는 저기서 야경을 보고 싶어요. 뭐가 다른지 확인해 보고 싶어요."
그 시각 미경과 상수는 종현과 수영이 바라보던 빌딩 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다. 종현과 수영이 그토록 원하던 빌딩 속 야경을 바라보며 말이다.
네 사람이 교차하며 서로의 위치를 보여주는 건 그들이 같은 곳에 소속되어 일하고 살지만 서로가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옥탑방에서 믹스 커피를 타 먹는 종현, 집에서 드립커피를 손수 내려 먹는 수영, 캡슐만 넣으면 자동으로 커피가 나오는 머신을 이용하는 상수, 미경은 가장 고급지고 큰 커피기계가 집에 있다. 그걸로 매일 커피를 마신다.
이렇듯 단지 커피 하나만으로도 서로의 차이를 보여주는 건 역시나 사랑에 있어서 이러한 차이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끔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사람에게도 급이 있다는 것과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는 것을 은행에서 일하며 나는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같은 은행원끼리도 서로 다 다른 입장이라는 것을 그리고 같은 곳에서 일하지만 월급날이 다르고 내는 밥 값의 금액이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부족함을 느끼기엔 너무 늦은 나이임에도 나는 그제야 세상에 대해 깨닫게 됐던 것 같다. 그런 나의 부족한 모습을 보고 좋아해 준 사람들에게 이제 더는 실망을 주기 싫다. 그래서 아예 내 책을 보여주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가엽은 나의 모습을 보고 선 듯 다가온 이가 정말 사랑을 가지고 다가온 것인지 아니면 그저 보듬어 주고 싶은 동정으로 다가오는지는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자기 자신도 모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할 때쯤이면 이만 생각을 거두고 싶어 진다.
사랑의 이해에서 이해라는 단어의 뜻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理解(이해) : 사리를 분별하고 해석함
利害(이해) : 이익과 손해를 아울러 이르는 말.
책 구절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연애란 순전히 길들이기의 문제, 누구를 만나든 결국에는 언제 어떻게 내어주고받을지 서로 약속하고 그것에 적응해 나가는, 험난하고 지루한 과정이었다."
주는 것이 있으면 꼭 받아야만 하고 받은 것이 있으면 꼭 줘야 하는 마치 계약관계 같은 것이 사랑일까? 배경과 그 사람이 가진 것과 그 사람의 위치와 능력 따위를 중요시 여기며 사람을 재단하고 판단해 버리는 것들 속에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어떻게 찾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어지럽다. 세상이 복잡하다 마음이 그냥 그렇다. 일도 많고 앞으로 더 많아지는데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하다.
사랑의 이해를 다시 보는 중이다.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그 시절 불안하고 힘들었던 때를 그리고 있다. 잊히지 않을 그때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