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서 일하지만 은행원은 아니에요.
최근 들어 내가 썼던 책을 다시 읽어 보게 되었다. 그리곤 생각했다.
'아, 이거 내 이야기지...!'
은행을 그만둔 지 4년째, 그간 나는 새로운 회사에 취직을 하였고, 두 번째 책을 출간하였으며 회사에서는 승진도 하며 별 탈 없이 무난히 잘 지내는 중이다. 이미 시간이 꽤 흘렀고 크진 않지만 다양한 변화들 속에 살아가다 보니 어느새 그때 그 시절 나를 조금씩 잊고 지냈던 것 같다. 역시 과거는 시간이 흐르면 퇴색되어 버린다더니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도 시간이 지나니 희미해지더라..
월 200만 원도 못 벌고 산다고 찡찡거리며 치킨 한 마리에도 벌벌 떨던 내가 이제는 2배가 넘는 월급에 친한 동생들 밥도 사줄 수 있게 됐고 부모님 용돈도 드릴 수 있는 단계까지 오고야 말았다. 이것을 성장이라 봐야 할까? 아니면 그냥 삶이 흘러가는 어떤 수순 같은 것으로 봐야 할까?
요즘은 잘 지낸다. 월급이 많이 오른 만큼 일도 많고 매일 야근을 밥 먹듯이 해도 난 좋다. 뭐, 맨날 좋은 건 아니지만...(이 글도 심지어 회사에서 야근하면서 쓰는 중... 지금 시간은 밤 8시 ㅎㅎ 퇴근은 언제할지 모른다ㅋㅋㅋ ㅠㅠ)
이렇게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아무래도 책을 써냈기 때문에 나에게 은행경비원이라는 직업과 그 시절의 이야기는 결코 떠날 수 없는 것 같다. 이래서 참, 기록이란 무섭고 그걸 책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 위험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마치 각인처럼 기억될 테니까 말이다.
책을 출간하고 가장 많이 하게 된 활동은 아무래도 북페어에 참가하는 일이다. 작가는 홀로 일하기 때문에 동료는 이런 행사 때나 만날 수 있다. 물론 엄청 친해지면 사적으로도 볼 수 있지만 말이다.
같은 일을 한다는 건 그만큼 가까워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일이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이라면 더욱더 끈끈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난 이런 북페어 행사를 나가길 즐겨했던 것 같다. 책을 판매하는 목적이 있지만 그보다는 다양한 작가님들과 함께 어울리며 그들을 알아가는 것에 큰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올해도 봄이 오고 여름이 오니 각종 행사들이 많이 열리게 되었다. 2021년부터 했던 리틀프레스페어에도 매년 참가하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참가 안내를 받고 이번엔 어떤 곳에서 하게 될지 궁금했는데 웬걸 성수동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핫플레이스에서 하다니... 이번엔 조금 많이 팔릴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조금 더 자세한 위치를 검색했는데 어.... 라?? 여기는 내가 일했던 은행이 바로 앞에 있는 공간이었다...!!
이 사실을 알고 뭔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쓴 책 속 장소에 다시 가게 될 거라곤 상상만 했지 진짜 실제로 가게 될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그것도 책을 팔러 말이다. 이건 어쩌면 마치 운명 같은 그런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서 난 행사날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행사날이 되었다.
행사는 5월 셋째주 금, 토, 일 이렇게 3일 진행되었다. 문이 열린 은행을 보기 위해선 금요일밖에 없었다. 그래서 과감히 연차까지 쓰고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은행까지 가는 길이 너무 신기해서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사실 성수동은 가끔 갔었다. 워낙 핫플레이스이다 보니 약속이 있으면 방문했었다. 그때마다 은행도 가보기도 했지만 매번 주말이라 문도 닫혀있었고 그곳 분위기도 평일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늘 아쉬웠다. 그런데 이번엔 평일 금요일이니 내가 일했던 그 풍경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행사장으로 향하던 금요일 오전, 이제는 그때 살던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출발하여 느낌은 달랐지만 성수역에 도착하여 은행으로 향하는 길은 여전히 익숙했다. 역에서 1키로나 떨어진 곳에 있다 보니 걷기만 15분이나 걸렸는데 생각보다 힘들었다. 이 거리를 2년 넘게 매일 걸어 다녔던 내가 참 대단스럽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리곤 누구도 모르는 나만이 아는 쪽 길로 들어가 은행 뒷문에 도달했다. 창문 틈으로 바라본 은행 내부에는 은행원들과 손님 몇몇이 있었다. 그 광경을 다시 보다니 소름이 돋았다.
행사장에 도착하여 세팅을 마치고 다른 작가님들과 담소를 나눈 후 내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은행이 아니었다. 바로 맞은편 편의점이었다. 이유는 편의점 사장님을 뵙기 위함이었다. 내 책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편의점 사장님은 나에게 친구 같은 존재였다. 가끔 아침을 거르고 출근하면 잠시 들러 핫도그나 핫바 같은 걸 먹으며 아침을 때웠다. 그때마다 커피 한잔을 내어주시며 담소를 나눴던 것이 생각난다.
하루는 편의점 사장님께서 말씀하셨다. 은행경비원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말이다. 아들이 그 일을 했으면 싶어 물었고 결국엔 하게 됐다. 그러한 이야기를 책에 썼기에 사장님을 다시 만난다면 책을 선물로 드리고 싶었다. 그렇게 찾아간 편의점은 상호가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 순간 그만 두신 건가?? 싶어 아쉬웠는데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고, 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사장님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갸우뚱하시며 나를 알아보시는 듯 못 알아보시는 듯했다. 안경을 벗고 인사를 드리니 그제야 나를 알아보시는 듯 말씀하셨다.
"은행 총각 맞지??"
어떻게 지냈냐며 얼굴이 좋아졌다며 그간 지내왔던 이야기들을 나눴다. 은행을 퇴사하기 전 사장님께는 따로 인사를 드렸고, 내가 억울하게 나가게 된 것에 아쉬워하셨다. 그랬는데 이렇게 책을 쓴 작가가 되었고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돌아오니 자랑스러워하시며 반겨주셨다.
사장님 아들은 아직 은행 경비원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카페에서 알바를 했는데 만약 은행으로 일자리를 옮기지 않았더라면 코로나로 인해 일 자리를 잃었을 거라고 말씀하시며 다행이었다고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낮에는 은행 경비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드럼 선생님을 한다며 열심히 잘 지낸다고 말씀하셔서 마음이 놓였다.
편의점을 나가기 전 책을 선물로 드렸고, 자신의 이야기가 책에 실렸다는 사실에 놀라워하시며 기뻐하셨다. 그 모습을 보니 뭔가 모를 마음속의 뭉클함과 뿌듯함 그리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어떤 느낌과 감정들이 피어올랐다.
책을 쓰고 참 잘했다고 느낀적이 많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지금까지 느낀 것과는 곁이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그리고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내가 직접 책을 선물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기에 또 다른 의미가 있었던 순간이다.
그 후 은행도 직접 방문해 보았다. 은행경비원분은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여성분이셨다. 은행원 중 그 당시 근무했던 직원은 현재 한 명도 있지 않았다. 4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니 당연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지점 내부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심지어 내방 중인 고객 중 몇몇은 낯이 익은 분들이었다. 그들은 몇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은행을 이용하고 계셨다. 그 모습들을 보니 옛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예전에는 다시 은행을 가게 되면 확 갑질을 해 버릴 거다!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이제 와서 그러는 건 조금 없어 보이고 이제 내 마음에 앙금은 사라졌기에 그러진 않았다. 오히려 가서 카드 만들어주고 적금 만들어 직원 실적만 올려줬다. 그러면서 은행을 쭉 둘러보았다. 내가 앉았던 자리, 함께 일했던 직원들 자리들 대부분이 다 그대로였지만 조금씩 달라진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그중에 가장 큰 점은 사람이 바뀌었다는 점이지만 말이다.
은행 업무가 거의 마무리될 때쯤 직원에게 말을 건넸다. 사실은 이 은행에서 근무를 했었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요즘도 동전을 많이 바꾸냐고 물으니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ATM기도 6대에서 4대로 줄어있었다. 그 이야기를 하자 은행원은 "6대나 있었어요??" 하며 놀라워했다. 보통 한 지점에 ATM기기는 많아야 4대 적으면 1~2대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가 일했던 지점은 현금인출기 이용객이 많았던 곳이었다.
은행 볼 일을 다 보고 나니 뭔가 시원섭섭했다. 그때 그 시절 함께 했던 분들을 다시 뵙지 못한 것도 조금 아쉬웠다. 사실 좋은 기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제 다시 만난다면 웃으며 인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행사를 진행하는 3일 동안 마음은 늘 들떠있었던 것 같다. 함께 행사를 치르는 작가님들과도 많은 교류를 하며 소중한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일했던 동네이기 때문에 맛집은 내가 꽉 잡고 있어서 매번 행사가 끝나고 나면 뒤풀이로 맛집을 데려갔다. 은행에서 일할 때 자주 갔던 식당에 가서 술과 음식을 마음껏 먹었다. 거나하게 취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이제는 그곳이 나에게 아픈고 힘든 기억으로 남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와 함께했던 작가님들 덕분에 웃음꽃이 피었고, 좋은 기억으로 덮이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감사한 일이었다.
누구나 살며 안 좋은 일을 겪게 되면 그 장소와 날씨 계절 따위의 것들로 기억에 자리 잡게 된다. 그래서 그와 비슷한 계절과 장소, 날씨가 겹치게 되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 싫어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나에겐 그러한 기억들이 새로운 순간들로 채워졌으므로 더 이상 힘들지도 아프지도 않게 되었다.
이제 '저는 은행경비원입니다' 속 '히읗'도 아프지도 힘들지도 않게 됐으니 보는 이들도 그렇게 알아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