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리주의자다.
처음 ‘공리주의’라는 말을 배운 그 순간부터,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가능한 많은 만족과 행복이 주어지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공리주의의 이념이었다.
이 단순한 개념은 내가 법을 공부한 이후 달라졌다. 법은 한 사람의 ‘범죄자일지도 모르는 사람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대한 제도이다. 예를 들어, 이미 18명을 살해한 것으로 보이는 피의자라 하더라도, 체포로부터 48시간 이내에 피의자의 자백이나 범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지 못하면 그를 풀어주어야 한다. 아무리 그 피의자가 19번째 살인을 예정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제도는 옳은 것인가. 범죄자를, 두 눈 멀쩡히 뜨고도 풀어주어야 하는 이 제도는 너무나 불필요한 것 아닐까.
아주 단순한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미 18명이 그로 인해 목숨을 잃었고, 19명 째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다면, 수십, 수백명이 자신이 그 19번째가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벌벌 떨지 않도록 어찌보면 피의자 한 사람의 인권 정도는 48시간 뿐 아니라 480시간도 가둬두어도 되는 것 아닌가.
드라마 ‘마우스’는 연쇄살인마는 특유의 동일한 dna를 가지고 있다는 데서 시작한다.
첫 회에는 미리 태아의 dna를 확인해, 태어날 아이가 연쇄살인마가 될 우려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연쇄살인마 dna가 확인되면 낙태 또한 할 수 있도록 법안을 제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때 같은 위원회의 국회위원 넷은 사회악을 미리 방지할 수 있다면 당연히 dna 검사를 하고, 낙태도 해야 한다고 하지만, 다른 넷은 인권을 이유로 이를 반대한다. 연쇄살인마 dna를 감별하는 기술은 99% 까지의 정확도를 보이는데, 그 나머지 1%는 천재일 수도 있다고. 그렇다면 연쇄살인마인 줄 알고 아인슈타인을 태어나기도 전 낙태할 수도 있고, 모짜르트도 낙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드라마의 설정은 다소 과격하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법안을 실제로 상정한다고 한다면, 통과될 수 있을까. 아니, 이렇게 과격한 설정이 아니라 하더라도, 보다 많은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만 있다면, 한 사람의 인권은 조금 무시되어도 되는 것 아닌가. 실제로 우리는 이런 생각들을 참으로 쉽게 한다.
어찌 보면 형사소송법 상의 많은 절차들은 굉장히 불필요하고 번거로워보인다.
당장 눈 앞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면, 한 사람을 억지로 불러다가 조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법원의 영장의 필요하다. 실무적으로, 체포영장을 받는 것은 경찰이 사건을 검토해 서류를 작성하고, 검사가 이를 검토한 후 법원에서 영장을 발부하기 까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 또 이렇게 체포영장으로 체포했다 하더라도, 피의자를 구속하기 위해서는 추가로 조사를 해, 다시 검사를 거쳐, 법원에서 심지어는 실제 재판까지 받으며 결정된다. 잘못한 사람들, 나쁜놈들, 그냥 좀 무조건 잡아다 가두면 안되나. 서울역에서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때린 피의자인게 확실한데, 체포 절차가 조금 불법적이었던들 무슨 상관인가. 왜 영장이 기각되어야 하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윤성여씨는 사건이 발생한 지 32년 만에 재심을 통해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만약 그 당시 ‘연쇄살인범임이 너무나 분명하다’, ‘이 사람 말고는 다른 범인이 있을 수 없다’, ‘이런 사람과 같은 사회에 있다는 게 두려워서 살 수가 없다’는 이유로 잘못된 선택을 했다면 오늘날의 누명을 벗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이 복잡다단하고 번거롭고 귀찮고 심지어 99명의 진범을 눈 앞에서 놓칠지도 모르는 제도들은 한 명의 억울한 희생자를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이라는 것, 인권이라는 건 참으로 숫자로는 함부로 계산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