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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Dec 15. 2020

꿈의 요람 1

1화

이른 아침이었다. 톱날처럼 깎인 비탈. 철퇴 같은 바윗돌. 고성의 설계도를 닮은 난해함. 이 산에 걸음을 딛는 이들을 찌르는 절망의 이름이었다. 오랜 세월 침략을 허용치 않은 천혜의 요새. 또 한 번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지금. 싱싱한 새벽 향기는 피바람 사이에도 스며드는 것일까.
 
거대한 활을 겨눈 여인들. 일차적 방어를 담당하는 죽음의 현(絃)악단은 화살을 메긴다. 가로 뉘인 활에 다섯 개 이상의 화살을 메긴 지휘관 프랄린. 적들은 가파른 비탈을 오르고, 떨리는 창에 기대어 걸음을 옮기는 노력의 대가는 미간에 박히는 독화살 촉이었다. 경련하는 시체는 검붉은 공포가 되어 산 자들의 발목을 붙잡는다.
 
화살이 쏟아 진 후, 계곡 양 쪽으로 도사린 거부(巨斧)병들의 하얀 이빨이 번뜩인다. 그들이 발을 올려놓은 지랫대 끝에서 흔들거리는 바윗덩어리. 산의 어금니는 비탈을 구르고, 갑옷 안에 든 적들의 몸이 짓이겨지는 순간을 맞추듯 야만족 전사들은 도끼를 꺼낸다. 선두를 나선 노장 블루벤이 양손에 든 두개의 도끼가 하얗게 미소 지었다. 거대한 무기는 살인. 전사는 전투. 모두 임무에 충실할 뿐.
 
적진의 혼란이 무르익었다. 판단과 함께 내달리는 날렵한 용사. 지체 없이 적진의 가운데에 떨어져 사슬로 연결된 미늘창을 휘두른다. 은빛 눈부심은 거대한 피의 경계선을 그리고, 자루 끝에 달린 단도는 근거리에 있는 적들의 목 위로 균열을 새긴다. 휘하 정예병들이 돌진하기 전 승기를 확신하는 그 힘은 대륙에 이름 높은 쉬카. 오직 그의 것.
 
요새에서 지키는 이들에게 기울은 군신의 깃대. 격전의 한복판을 자유로이 누비는 붉은 잔영은 그 깃발이었을까. 가느다란 창을 허리에 걸친 채 방해되는 이는 베고. 신속히 전황을 파악하는 동작 어느 곳에도 인위적인 모습이 없다. 본진과 전장을 유연히 오고가는 로제는 그 별명대로 검에 피어난 장미와도 같았다.
 
적장은 자신들의 침공이 실패했음을 알았다. 부관에게 철수를 지시한 후 전투에 앞서 손수 날을 벼린 검을 꺼냈다. 검은 지휘자의 무기. 전사의 용맹과 지위. 이름을 건 분신이었다. 적장은 그가 손에 쥔 훌륭한 검에 부끄럽지 않은 위대한 역전의 전사였다.
 
‘과연. 그 자가 내 싸움의 인생을 매듭지어줄 것인가.’어리석도록 순수한 열망에 이끌려 홀로 달려나갔다.
 
이 산악국가 프티 불을 지키는 자주 방위 군단, 훼라 크렘의 수장. 6살 때부터 전장에 있었던 키하다는 적장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이제 산 높이 해가 떠올랐다. 두 자루 검이 새로운 태양의 시선을 반사한다. 은빛 검광이 교차한 자리 불꽃이 튀어 오르고, 대지에 새겨진 그림자는 근원의 움직임을 재현하기에 힘이 부친 듯 했다. 그것을 달래려는 것일까. 움직임이 멎고 잔혹한 고요가 찰나를 적신다.
 
‘이토록. 이토록 강한 자였던가. 과연 군신이란 이름에 부족함이 없다..키하다...!’
 
적장은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진정 강한 전사에게 죽을 수 있다는 희열이 강한 발돋움이 되어 거친 돌밭 사이로 내리 꽂힌다. 검에 묶인 두 생명이 사신의 실에 끌려 한순간 같은 길을 걷는다. 두 사람이 맞부딪힌 건 찰나였지만 그 사이 검이 흘린 눈물은 셀 수 없었다.
 
무릎과 팔꿈치. 명치에서 목까지 가로지른 붉은 실선. 그것은 신에게만 허락된 검술. 곧 상처는 균열이 되었고 적장은 온 몸에서 피를 뿜으며 눈을 감았다. 그는 알지 못했다. 키하다의 검이 그의 몸을 베는 순간, 적장의 마지막 일격은 키하다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정말로. 정말로 미비하기 그지없었다. 그 알량한 상처가 이 순간을 키하다의 마지막 전투로 만들었다는 것을 적장이 알았더라면. 그가 죽기 전 보인 것은 미소가 아닌 눈물이었을 것이었다.
 
“왼쪽 눈동자 정 중앙을 긋고 지나갔습니다. 치료는 불가능합니다.”
 
의원은 담담하게 말했다. 누구도 운명의 지시를 거스를 수 없다는 듯. 의원은 금박 상자에서 투명한 렌즈를 꺼내 실명한 키하다의 눈꺼풀에 끼워 넣었다. 키하다는 눈을 몇 번 깜빡인 후, 의원이 들고 선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유심히 비춰보았다. 탁한 빛으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던 눈동자가 파란빛 도는 렌즈에 비치자 마주 볼만 했다. 키하다는 살짝 고개를 들어 의원에게 말을 걸었다.
 
“13살 때인가..맹인 행새를 하고 성에 잠입한 적이 있지. 그땐 죽은 물고기 비늘을 아무렇게나 눈에 집어넣었었는데. 지금 하고 있는 건 그때 훔쳐낸 보석보다도 더 색이 곱군.”
 
“아주 얇은 것이니 곧 익숙해지실 겁니다. 빼실 필요도 없지요.”
 
의원은 조금도 웃지 않은 얼굴로 대꾸하곤 짐을 챙겼다. 줄곧 문 옆에 서 있던 로제는 사례금을 건낸다. 의원은 대륙에 이름 높은 명의였고 키하다에게 준 비늘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더 귀한 보물이었다. 의원은 로제를 흘끗 쳐다보곤 툭 내뱉었다.
 
“상처엔 손도 못 댄 의원이 사례를 받을 것 같은가?”
 
“와주신 것에 대한 성의입니다. 받아주십시오.”
 
공손한 태도에서 느껴지는 품격. 모든 이를 수긍케 하는 그 매력을 뿌리치듯 의원은 단호히 고개를 돌리고 문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한참을 걸어가던 중. 우뚝 멈춰 서서 인사를 했는데 그 목소리는 눈물로 젖어있었다.
 
“불러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 우매한 자를 용서해주시고..부디 옥체를 보존하십시오...키하다님.”
 
키하다가 뭐라 답하기도 전 의원은 사라져버렸다. 로제는 시종들에게 의원의 귀향길을 각별히 신경 쓰라 지시했다. 이후 30분 간. 키하다와 로제는 침묵으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오른쪽으로 치우쳐진 시선처럼 이내 렌즈가 익숙해진 듯. 내일 은퇴식을 치루겠다는 키하다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방을 나온 로제는 별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군의 간부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초조하게 방안을 서성이던 쉬카는 벌컥 언성을 높인다.
 
“아무 치료도 하지 못했단 말야? 대륙 최고의 신의라는 자가?”
 
일그러지는 잿빛 눈동자. 주먹을 움켜쥔 쉬카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은 분노를 뿜어낸다.
 
“귀한 렌즈를 주고 갔단 말 못 들었어? 그 이상 뭔가를 바랬다는 말 같은 건 하지 마.”
 
테이블에 앉아 화초를 매만지던 프랄린은 자신의 싸늘한 인상을 닮은, 짧은 독설을 쉬카의 면전에 꽂았다. 쉬카는 덤벼들듯 한걸음 내딛고,“유치한 녀석.”싸늘한 경멸과 함께 프랄린은 아예 고개를 돌렸다. 긴장된 공기 사이로 블루벤의 깊은 한숨이 황망한 감정을 드러낼 뿐. 노인은 주름진 얼굴을 양 손으로 훑으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신체를 훼손한 이상 훼라 크렘의 수장일 수 없다. 쉬카. 이제 군단장은 네가 맡게 될 거다. 준비를 하도록.”
 
“바보 같은 소리를....! 키하다 님이 건재하신 데 어떻게 내가..!”
 
“로제만 바쁘겠군. 이제부터 어린애 뒤치다꺼리를 하려면.”
 
“그쯤해둬라. 프랄린.”블루벤은 엄하게 프랄린을 꾸짖었다.“자네도 마찬가지야. 앞으로 책임이 늘어날 테니까. 경거망동을 자제하도록 해.”
 
프랄린은 한 손에 턱을 올려놓은 채. 화초잎을 다듬듯 긴 손가락을 놀릴 뿐이었다. 가느다란 연초록 잎이 세상의 전부라도 되는 듯. 꿈 안에 머무는 것처럼 몽롱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도 군을 떠나겠어. 키하다님이 혼자 생활하실 순 없을 테니까.”
 
블루벤이 가로막기 전에 쉬카는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쉬카는 양 손에 테이블을 콱 붙잡고 화초 너머로 프랄린을 노려보았다. 오직 자신만의 생각에 골몰해있는 프랄린을 향해. 짓씹듯 내뱉는다.
 
“지금..뭐라고 한거야..?”
 
“키하다님은 아직 미혼이시지. 물론 나 역시...내가 스물 다섯이니까..나보다 두 살 연상...나쁘지 않아.. 내 가문이라면 흉이 되지도 않겠지..”
 
솟구쳐 오른 테이블이 천장의 벽지를 찢어놓았다. 깨져나간 꽃병에서 물이 세어 나오고. 파편에 찢긴 화초는 바닥에 나뒹군다. 쉬카는 프랄린의 멱살을 잡아. 그녀를 완전히 들어올렸다.
 
“이 도둑고양이 같은 년! 키하다님의 상처에 피가 가시기도 전에..그따위 망발을! 너와 나, 키하다님은 9년 전 함께 훼라 크렘에 입단한 동기가 아닌가! 지금까지 넌 그런 음란한 생각이나 하고 있던 거냐! 난 그래도...전우로서는 널 믿고 있었는데! 이제보니 겉이나 속이나 시커먼 계집이었군!”
 
쉬카의 분노는 별실 전체를 손아귀에 잡고 흔들고 있었다. 그 목소리와 멱살을 억죄는 손아귀의 힘도 프랄린에겐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한다. 환상을 보는 듯 했던 프랄린의 얼굴은 동전의 양면이 바뀌듯 일순간 두 눈 가득 독기가 서렸다.
 
“그러면, 안되나?”
 
차가운 안광이 타고 있었다. 쉬카가 멈칫 했을 때. 프랄린은 팔을 휘둘러 그를 뿌리쳤다.
 
“네가 내 기분을 알아? 걸어다닐 때부터 늙은 아버지에게 무술을 배웠던 내 기분을? 초경도 시작하기 전에 군에 입대해야 했던 내 심정을? 난 그 때까지 친구도 뭣도 없었어! 그런 내가 키하다님을 사랑한 게 죄인가?”
 
프랄린의 짙은 피부가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아무렇게나 박은 다섯 개의 비녀 아래로 출렁대는 머리카락. 그녀의 몸에 흐르는 홍인종의 피가 그 악마적인 잔혹함을 내비친다.
 
“너야 편했겠지! 서열 2위에 남자인 네 녀석은 떠들고 싶을 때 실컷 지껄이고! 난 뭐야? 난 9년 동안 사랑했는데 왜 제대로 말도 못 붙여야 해! 대화? 하다못해, 이 더러운 전투복이 아니라 제대로 된 옷 입은 모습 한번 못 보여드리는 거야!”
 
“네가..그렇게까지..? 아, 아무리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는 경우가 아니잖아!”
 
“둘 다 입 닥쳐라!”
 
바람이 분 게 아니었다. 블루벤이 날린 일갈은 대치하고 있던 쉬카와 프랄린을 뚝 멈춰서게 할 정도였다. 깊은 한숨을 쉬며, 블루벤은 쓰러진 의자를 일으켜 오랜 싸움을 거친 거구를 의탁한다. 기합만으로 두 전사를 제압한 모습이 무색하게 흐느끼듯 얼굴을 가리는 늙은 군인.
 
“너희들은..단 한번만이라도. 진심으로 키하다를 위해줄 수 없는 거냐..?”
 
최고고문이 보인 나약한 모습에 두 후임군인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부서진 채 기울어진 테이블의 을씨년스러움. 모든 것을 침묵으로 주시하는 로제.
 
“은퇴식은 명일 19시 피로연과 함께 치루어질 것입니다. 훼라 크렘은 최소 근무자를 제외하고 전부 참석합니다. 부군단장님. 최고고문님. 강궁지휘관님. 세 분 역시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강궁지휘관님의 제대 건은 차후 상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적인 설명을 마친 후 로제는 별실을 나섰다. 오후 내 은퇴식을 준비하고 홀로 잠자리에 누웠을 때. 로제는 19살 소년의 붉은 뺨을 눈물로 적셨다. 외로움으로 가득 했던 로제를 한명의 전사로 이끌어주었던. 로제에게 있어 산만큼이나 커보이던 남자. 그 키하다가 전사로서의 생을 종결지어야 한다니. 힘이 절정에 이른 27세의 젊은 나이에. 훼라 크렘의 서기장을 겸한 일류 전사로서 한결 같았던 침착함을 벗어둔 채. 로제는 밤새 눈물을 흘렸다.
 
 
은퇴식의 피로연은 소박했다. 10명씩 모여 앉은 테이블을 기준으로 맑은 증류주가 3잔 정도 돌아가고. 얇게 썬 과일. 바삭한 과자와 간단히 향을 쳐 훈제한 사슴고기가 요리의 전부였다. 지금은 흑색과 청색. 적색이 조화를 이룬 제복을 입고 있지만 실내 회관을 메운 900여명의 인원은 그 시간에 차이가 있을 뿐. 항시 최전선에 나가있는 군인이었다. 평소 딱딱한 과자와 쓰디 쓴 약주. 말린 고기가 몸에 밴 그들에겐 이런 행사자체가 큰 호사였던 것이다.
 
키하다는 왕족이나 최고귀족들의 행사에만 사용되는 이 회관이 훼라 크렘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기뻤다. 늘 거친 생활을 하는 전우들이 이 자리를 마음껏 즐겼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안타까움이 가득한 그들의 표정은 적장의 도전을 받아들였던 -전사로서 당연한-자신의 결정이 어리석은 일이었나. 부질없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과 함께 상석에 자리한 간부들을 죽 둘러본 후. 키하다는 싱긋 웃었다. 스스로 자신의 잔을 채우더니 좌중을 향해 유쾌하게 말을 꺼낸다.
 
“여기 계신 분들은 누군가에게 술시중을 부탁하지 않는 분들이지요. 굳건한 자신의 팔을 두고 자기가 마실 술을 남이 따르게 하다니. 혈기 넘치던 시절이면 모를까. 훼라 크렘의 명부에 이름을 올린 이상 그런 분은 계시지 않지요.”
 
키하다는 사뿐히 상석에서 내려와 가까운 테이블로 다가갔다. 뚜껑도 열지 않은 술병을 열어 침울한 분위기 사이로 그윽한 향기를 날려 보낸다.
 
“이 술은 국왕 캬라마리제 폐하께서 허락하신 미주입니다. 저는 그분의 신하로서 여기 계신 전우님들께 잔을 비우게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마지막 명령입니다! 제가 따르는 술을 받아 드십시오.”
  
마음 착한 청년의 수더분한 태도. 군을 통솔해온 수장의 위엄.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키하다는 예의바르게 전우들의 잔을 채워주었다. 흘러내리는 과실주가 계곡 같은 석제 술잔을 채우는 형상이 파란 빛 렌즈에 비추고. 그 횟수가 거듭될수록 장병들의 눈동자에 떨림이 인다.
 
“자진해서 편안함과 따뜻함에 작별을 고한 그 용기에 전사로서 경의를. 젊은이로서 위로를 표합니다. 무기에 생명을 의탁한 자의 앞날은 군신 훼루난의 깃발에 결정되는 것이니.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이 술로 하여금 전장의 피로가 조금이나마 걷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입단 한지 1년이 안되거나 갓 넘은 신병들은 눈앞에서 상냥히 웃고 있는 이 청년이 역대 최연소. 최다 전투를 치러낸 군단장이 맞는가 생각하면서도 혹여 따라주는 술을 놓칠 세라 두 손으로 잔을 감싸 쥐었다.
 
“부족한 내 지시에 따르느라 그간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숲 안에서는 자신이 어디 있는 가를 알 수 없다지만 숲 밖에서는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 지 알 수 없는 법. 일선에 나가 싸우는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임무가 무엇인지 몸으로 알고 계시지요. 각자 알고 계신 것이 훼라 크렘의 모든 것입니다. 그 공적을 이 미주의 향으로 치하하고자 합니다.”
 
지난 4년간 키하다의 지시에 따라 싸워온 중견급 전사들은 짧게 한숨을 쉬거나 젖은 눈자위 아래로 수은 같은 눈물을 떨구었다. 적에게도 존경받는 젊은 군단장 휘하에서 조국을 지키는 길은 행복했다. 이 은퇴식이 끝나도 언제나와 같은 임무가 계속되고. 군이 유지되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들은 세상 마지막 날에서나 느낄 슬픔에 짓눌리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야..."키하다는 10년 이상 종사한 자신의 동기. 혹은 선임 전사들에게 짓궂은 눈길을 보낸다.”내가 뭐라고 하던 간 다들 자기 고집을 돌덩이처럼 가슴에 쌓아두고 무기의 날을 가는 사람들이니 사족은 붙이지 않겠습니다. 그저 같이 지낸 정을 봐서 따라주는 술 곱게 마셔라. 이 말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아. 기왕 덧붙이자면 저기. 그리고 저어기. 동기님들. 장가 안 가십니까?“
 
잘생긴 키하다 나으리. 나으리나 총각딱지 때십쇼. 이게 네가 주는 술이냐. 왕이 하사한 술을 어쩌란 말야. 저건 자기 아버지뻘 되는 사람한텐 막 말한다니까..지금까지 한만큼만 더 하고 제대하지 뭐가 그리 급했냐. 키하다가 지나갈 때마다 친근히 말을 거는 그들. 미련도 후회도 추억이란 긴 막대에 묶어, 갑갑한 현실에서조차 즐거움을 낚아 올린다.
 
“쉬카. 훼라 크렘을 부탁한다. 자네야말로 군단장 적임자야. 프랄린. 우리 군의 붉은 진주. 그동안 고마웠어. 블루벤..나의 대부여. 늘 건강하시지만. 더 건강하십시오. 너는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린다. 로제.”
 
키하다는 마지막으로 간부들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쉬카는 키하다님. 키하다님. 하면서 눈물을 뚝뚝 떨구며 잔뜩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프랄린은 고개를 숙여 경련하는 미소를 감춘다. 블루벤은 자신의 양자인 키하다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가. 곧 거두었다. 로제는 우느라고 부은 얼굴에 애써 미소를 짓는다. 모든 간부들의 잔을 가득 채워준 후 키하다는 전우들을 향해 술잔을 내밀었다. 미련과 막연함을 떨치듯. 젊음에 찬 태도로 모두를 향해 말한다.
 
“전란이 끊이지 않는 이 대륙에서 숱하게 생산되는 소년병 중 하나였던 제가. 모든 전사들의 염원인 자주국방의 군대. 훼라 크렘의 수장 자리에 올랐었습니다. 싸움을 위한 짐승처럼 팔려 다니던 제가 조국을 지키게 되었을 때. 여러분도 알고 계실 겁니다. 그 기쁨. 그 긍지를! 저는 전사로써 싸웠고. 실력이 부족하여 신체를 훼손했습니다. 이 시간부로 저는 검을 반납하고 이 나라. 왕국 프티 불의 국민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 것입니다. 저의 은퇴가 여러분의 검을 더욱 담금질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지금껏 함께 해온 전우로써 함께 잔을 비워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모든 사람들이 키하다와 동시에 술잔에 입을 맞춘다.“이봐. 울려면 곱게 울어. 키하다님이 주신 술을 떨어뜨릴 셈이야?”“누..누가 운다는 거야..!”감정이 복받힌 몇 명을 제외하고. 평소 음주를 금하는 이들도 이번만큼은 한번에 잔을 비웠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피로연을 시작하려던 그 순간. 닫혀있던 입구 너머로 세 번. 종을 울리는 듯 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여섯 명의 단장한 소년소녀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 나라의 국왕. 캬라마리제가 의젓한 걸음으로 들어선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들 계신가?”
 
조금 상기된 목소리로 8세의 어린 왕이 물었다. 키하다는 빠른 걸음으로 주군에게 다가갔다. 캬라마리제는 양 손을 내저어 무릎을 꿇으려는 키하다를 말렸다. 아이의 작은 팔이 움직일 때마다 길게 늘어진 소매에 수놓은 열두 별자리가 화려한 잔영을 남긴다.
 
“인사를 받으러 온 게 아닐세. 일부러 가마도 없이 평상복으로 온 의미가 없지 않은 가.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 뿐이네.”
 
주군의 배려에 키하다는 거듭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맞잡아 명치 부근에 대었다. 어린 왕은 자신의 대관식을 비할 데 없는 무술로 장식해준 전사가 표시하는 절대 복종에 흥분 한 듯. 붉은 뺨에 미소가 걸려있었다.
 
“폐하. 곧 침소에 드실 시간입니다. 서두르셔야...”
 
섭정을 맡고 있는 이탈렌 경이 왕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32세의 훤칠한 청년 이탈렌은 줄곧 왕의 뒤에 서 있었기 때문에 얼핏 보면 키하다가 이탈렌에게 복종의 뜻을 바치는 것처럼 보였다. 훼라 크렘 전원은 고개 숙여 예를 표하고 있었는데. 몇몇 성질이 거친 자들은 섭정이 들어왔을 때부터 깨물린 입술과 일그러진 미간을 숨기기 위해 더 깊이 머리를 움츠리고 있었다.
 
“알았어.”왕은 웃음을 거두고. 나름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프티 불의 국왕. 나 캬라마리제는 본 국가의 자주방위군단 훼라 크렘의 57대 군단장 키하다의 은퇴를 진심으로 애석히 여기고. 그 노고를 치하하는 바이다. 나의 충직한 신하. 키하다여. 짐은 앞으로도 그대가 나라를 위해 종사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 쓸 것을 약속한다.”
 
“폐하의 종 키하다. 주군의 은혜를 바라볼 눈이 하나인 것이 한입니다. 이 몸 기거할 유일한 집은 왕국 프티 불 뿐이니. 어느 자리를 허락하시든 아버지 바다와 같이 영원한 주군의 은혜 골수 깊이 새기겠습니다.”
 
항시 듣는 미사여구도 상대에 따라 느낌은 전혀 달랐다. 캬라마리제는 자신이 상상하는 군신 훼루난 그 자체인 이 전사의 능란한 답변에 가슴이 뛸 정도였다. 할 수 있는 한 목에 힘을 잔뜩 주고. 몇 번이고 외웠던. 이 나라의 모든 은퇴귀족들이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내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그 명령을 내렸다.
 
“키하다. 모든 처녀들이 눈길을 주었지만 아무도 소유할 수 없었던 그 순결함에 덮인 외로움의 배일을 벗겨내려 하니. 짐이 주선한 인연을 반려자로 맞이할 것을 명한다. 왕실의 오랜 친구인 리버레인 가문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세상의 좁은 식견에 오해받는 일 없이 꽃 같은 청초함을 지키고 있다하니. 전사로서 검의 절개를 지켜온 그대와 천생연분이 아닌가? 부디 후에 짐을 알현할 때 그대는 긴 목걸이를 목에 겹쳐 걸고. 하나의 비녀를 머리에 꽂은 아내의 손을 잡고 있도록 하라.”
 
키하다는 복종의 표시를 유지했다. 왕은 몇마디 덕담을 더 하고서야 섭정의 재촉에 못이겨 자리를 떠났다. 회관은 조용했다. 아직 키하다가 준 잔을 비우지 않은 자들이 분을 삭히듯 목구멍에 술을 털어 넣는 모습. 여군들은 입술을 짓씹어 턱 밑으로 눈물 같은 피를 흘리고, 분노가 지나쳐 자신의 팔을 할퀴는 야만족 전사들. 노병들은 백발 아래 선연한 핏줄을 가라앉힌다. 선 채로 기절한 프랄린을 부축하는 로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쉬카의 눈은 숫돌에서 빼낸 듯 날이 서고. 그의 어깨를 꽉 붙잡은 블루벤은 목젖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가운데. 키하다는 몸가짐을 바로하고 자신이 서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평안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전우들의 분개한 마음을 한층 더 무너뜨리는 것이었지만 다른 선택은 없었기 때문에. 키하다는 애꾸가 된 얼굴에 애써 웃음을 지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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