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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Jul 29. 2020

웹소설 피투성이 소나타

마지막

"이제 괜찮습니다."

붕어빵 아주머니가 시현에게 그 말을 하기까지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재벌집 사모님이 된 아주머니와 명문대에 입학하고 미래를 약속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던 딸.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은 행복이었다. 시현에겐 즉흥적인 기분으로 약간의 재정적 도움을 준 정도였고 사실 별 부담도 없는 일. 그대로 아주머니를 회사 사장으로 있게 할 계획이었찌만 예고없이 찾아온 교통사고는 모든 것을 백지화 시켰다. 한쪽 다리를 잃은 딸은 고민 끝에 약혼자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엄마와 함께 먼 곳으로 떠나겠다 말했다.

"그 동안 해주신 대로만 해주시면 계속 회사를 맡길 수 있습니다."

시현은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아주머니는 갑작스레 회사 사장 자리를 맡은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업무 능력을 보여주었으니까. 시현의 제의를 거절하는 아주머니의 태도는 조용했지만 그만큼 확고했다.

"딸아이에게도 선생님이 해 주신 것에 대해 모두 이야기했어요. 더 이상 신세를 질 순 없습니다. 제게 달라진 거라곤 아무 것도 없는 걸요. 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사라지는 게 정말 그를 위하는 일일까요?"

시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지극히 공손한 태도만을 보이던 아주머니의 입술 끝이 가느다랗게 떨린다. 침묵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대답할 때, 시현을 바라보는 눈에는 물기가 고여 있었다.

"제 딸아이가 선택한 길입니다. 일찍 남편을 떠나 보낸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일 수도 있어요. 정말 사랑하기에 이별을 선택한다는 그 마음을 존중하고 싶어요. 몇번이나 말씀드리지만, 저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 후로 시현은 붕어빵 아주머니도, 그 딸도 만날 수 없었다. 스스로 나서서 조직을 와해시킨 것은 그로부터 한 달 후의 일이었다. 스무 살이 된 날. 시현을 기다리고 있는 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찾아온 조직원들이었다. 무술에 있어서 시현은 하나의 '완성품'. 아무도 시현에게 손가락만한 공포심도 주지 못했다. 죽였는지 살렸는지 신경쓰지 않고 다만 눈 앞에 보이는 습격자들을 처리했을 뿐.

중간 보스였던 예성은 시현을 제거하고자 하는 다른 중간 보스들에게 반기를 들었고, 시현의 몸종이었던 은아는 시현 부모님의 명령으로 먼 곳으로 떠나 버렸다. 예성이 타 조직의 수장 두명을 꺾어버리자 불필요한 소란을 걱정한 대 보스가 시현에 대한 모든 적대 세력에게 중지를 명했다. 은퇴한 입장이었던 시현의 부모님은 도시를 떠나 은거하듯 사라졌고, 시현은 평범한 20세 청년이 되어 군에 입대했다. 2년 후 세상에 나오니 어둠의 세계에 대한 모든 연결점은 끊어진지 오래였다. 거느렸던 몇 개의 기업 중 제과제빵이 생각나 빵공장에 입사함으로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두 번째 인생이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시현은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차갑게 내린 아메리카노를 한모금 머금었다. 앞으로 추워지겠구나. 비가 와도 매출에 별로 마이너스가 없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지만 시현에겐 별 감흥이 없어 보인다. 빵장사는 할 만한 직업이었다. 늘 변함없이 성실하고 완벽한 시현에겐 생활에 대한 걱정이 거의 없었다. 다만 주위 사람들과 살아가는 나날에 약간의 심적 피로감을 느꼈을 뿐.

'그러고 보니 올해 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유난히 관심을 많이 가졌네.'

몇달 전 놓았던 간이 테이블 의자에 앉아 빗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시현에게 비가 떨어져 내리는 마찰음은 씁쓸한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어머니가 동생을 유산했던 날은 정말 비가 많이 내렸다. 아직 당주가 되기 전, 무술 수련과 공부에 여념이 없던 여덟 살 때 시절. 아버지의 명령으로 하루 일과를 모두 소화한 후 어머니를 찾았을 때였다. 피투성이 아기의 주검과 세상 전부를 잃어버린 것 같은 어머니의 얼굴. 그 전에도 어머니는 시현에게 차가웠지만 유산한 다음부터 인간적인 감정을 모두 잃어버리신 것만 같았다. 어머니의 손가락만한 애정이라도 찾고 싶었던 시현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에 최선을 다했다. 당주가 된 날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되뇌었던 마지막 모습을 제외하고, 시현의 기억에는 어머니의 웃음도 슬픔도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스스로의 감정 하나 추스르지 못하고 모든 걸 버린 채 도망가버린 나인데, 주변 사람들의 인생에 관심을 가지고 간섭까지 하다니. 올해 들어 자신이 관여했던 여러 일들을 떠올리는 건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눈물과 웃음. 단 한마디의 단어들에 실로 수많은 감정이 실려 있다는 걸 실감했다. 빗줄기 사이로 우산을 든 은아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을 때, 시현은 자리에 앉은 그대로 담담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은아는 정말 아름다웠다. 서른 여덟의 나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시현의 몸종이었던 시절 주인의 그림자조차 밟지 않았던 은아였다. 그런 은아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재회한 이후 몇번 가졌던 일방적인 스킨쉽이 있을 때마다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시현은 눈 앞에 서 있는 은아를 올려다 보며 빗소리에 묻히지 않을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름다워."

은아의 손에 들려있던 우산이 땅에 떨어지며 빗줄기 사이로 굴러 갔다. 은아는 테이블 위에 쳐져 있는 파라솔 바깥 쪽에 서 있어 비를 온몸으로 맞는 모습이었다. 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떨어뜨린 우산을 들어 비를 막아 주었다. 손을 뻗어 시현의 가슴에 대며 몸을 기대는 은아. 어미의 품에 안기는 어린 짐승처럼 무조건적인 애정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잠시 생각하는 듯했던 시현은 천천히 손을 들어 은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손끝이 닿는 순간 은아는 미세한 떨림을 일으켰다. 시현은 말없이 비에 젖은 은아를 안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지금껏 많은 일을 겪어왔고, 앞으로도 겪어야 했다.

시현과 은아의 포옹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나누었던 감정의 해후는 길게 이어졌던 인연을 증명하듯, 무척이나 넓고 복잡한 무늬로 펼쳐진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도 시현에겐 많은 사람이 스쳐갔다. 항상 즐거울 순 없었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었고 고단함이 이어질 지언정 일상의 평온함 역시 항상 찾아왔다.

시장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빛나는 나무'. 시현의 삶에 터전인 그곳에는 오늘도 여러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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