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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Jul 28. 2020

웹소설 피투성이 소나타

22

스무 살을 한 달 앞둔 시점. 시현은 자신의 공식적인 직업 중 하나인 제과제빵 재료 업체를 둘러 보고 있었다. 비록 시현이 속해있는 조직은 범죄 집단이었지만 시현은 눈에 보이는 사업체 몇 개를 투명하게 운영하며 공적인 세계와의 유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시간은 아침 일곱시였다. 시현은 정장 차림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해 사무실로 향했다. 거리는 아직 한산했다. 정확한 십일자 걸음으로 걷는 시현. 회사 근방에 있어 익히 본 적이 있는 붕어빵 노점을 지날 때 습관처럼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시현에게 폭력 조직 보스란 인상은 존재치 않았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정중했으니까. 사람의 속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눈은 항시 날카로웠지만 남들이 보기엔 그저 순한 인상일 뿐이었다. 한기가 서린 겨울 일찍부터 장사를 시작한 아주머니는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순간 시현의 눈빛이 예민하게 빛난다. 피곤에 절어있을 지언정 늘 긍정적이었던 아주머니가 뭔가 큰 걱정을 하고 있음이 비치고 있었다.

"아주머니, 오늘은 어쩐 일이세요?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아주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얼굴이 굳는가 싶더니 이내 눈물 한방울이 예고없이 투욱 떨어져 내렸을 뿐. 시현에겐 상냥함이 배어 있었다. "아무래도 무슨 사연이 있으시군요. 날도 추운데 제 사무실로 가서 이야기를 들어 보지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기는 무리인 듯 싶었다. 시현은 노점 정리를 거들어 주었고, 거절조차 생각하지 못한 채 시현을 따라가는 아주머니였다.

"제겐 이제 성인이 되는 딸이 하나 있어요."

아주머니의 이야기는 기구했다. 일찍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되어 젖먹이 외동딸을 필사적으로 키운 세월이었다. 명문 기숙 학교에 딸을 입학시킨 후부터 관절 연골이 상하도록 일을 해 부잣집 아이들 못지 않게 키웠다는 말을 할 땐 시현의 시현의 가슴마저 먹먹해지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내가 노점상 품팔이꾼이라는 걸 몰라요. 재벌집 사모님 정도로 알고 있겠죠. 이제 졸업을 앞두고 있는데..학년 수석이 되어 장학금까지 받고 명문대 입학을 계획하고 있죠. 그런데 어미인 내가 이리 초라하다는 걸 알면..그 아이의 미래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면..그 애가 얼마나 실망할지...어떻게 하면 좋을지 엄두조차 나지 않네요..."

방울방울 눈물이 흘러 내린다. 말을 마친 아주머니는 소리내어 울지는 않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처절하고 외로워 보였다. 이야기를 듣기 시작할 때부터 생각에 잠겨 있던 시현은 전화를 들어 조직원들을 호출했다. 잠깐 사이의 침묵을 깨뜨리는 그 모습엔 강자 특유의 여유가 깃들어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지금부터 아주머니가 명문대생에게 어울리는 어머니가 되시면 될 일이니까요."

곧 시현의 조직원들이 열명이나 사무실에 들어와 상체를 숙여 인사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그들의 각진 움직임에 아주머니는 위축되는 눈치. 시현은 자상한 웃음으로 아주머니를 안심시킨 후, 조직원들에게 명령했다.

"지금부터 내가 지시하는 대로 행해라."

"예. 당주님!"

"전국 최고의 관절 병원을 수배해서 이 여사님의 불편한 점을 최대한 개선해라. 돈은 상관없이 최고의 양장사를 찾아 기품 있는 의복을 준비해 드리고. 이 재료상 주주로서 필요한 사항을 모두 알려 드릴 것. 명동 역 부근의 아파트 하나를 사서 최고의 상태로 집을 준비하도록. 시작해라!"

"알겠습니다!"

조직원들은 들어왔을 때처럼 거침없는 동작으로 시현의 명령을 시행하고자 움직였다. 두명의 조직원이 아주머니 앞에서 몸을 숙인 후 동행할 채비를 할 때, 시현은 두려움으로 몸을 떠는 아주머니를 거듭 안심시켜 주었다. 과연 중견 조직 보스 시현의 힘은 막강했다. 아주머니를 일주일 만에 사업체를 운영하는 부잣집 사모님으로 만들어 주었을 만큼. 시현은 아주머니의 딸이 명문고를 졸업하는 날 동석했다. 먼 친척이라고 소개하여 딸과 인사할 땐 유쾌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시현 씨?"

잠시 옛 생각에 잠겨 있던 시현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곧 의식을 찾았다. 운전수 광수 아저씨가 갓 구워진 바게트 빵과 두유를 하나 들고 계산을 기다리고 있다. 시현은 빠른 동작으로 종이 봉투를 펴 바로 들고 먹을 수 있도록 바게트 밑단을 싸매 주었다. 온기가 감도는 바게트를 한입 우적 깨무는 광수 아저씨. 벌써 아침이 쌀쌀하고 허기가 돌아선지 따뜻한 바게트는 비할 데 없는 맛이었다.

"시현 씨는 정말 빵을 잘 만들어. 시계공 성장 형님이랑 시현씨가 만든 과자빵을 먹었는데, 아주 맛있었어. 요즘 좀 비싼 메이커 빵집 많잖아? 내 입맛에 맞아서 곧잘 사먹는데 시현씨의 과자빵을 먹으니 수준 차이가 느껴지더라구."

"감사합니다."

"들은 바로는 큰 호텔이나 백화점에서 함께 일하자 하는 요청이 많다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지 않아?"

"지금 이 정도가 저에겐 딱 좋습니다."

"뭐..욕심이 과하면 몸이 상하는 법이지만..시현 씨는 젊잖아. 잘 생각해 봐."

광수 아저씨를 보낸 후 시현은 오후에 팔 빵 반죽을 계량했다. 놀라울 정도의 미각과 재료를 파악하는 감각은 몇 차례의 가벼운 시행착오를 거쳐 몇년 간 꾸준히 팔리는 빵의 레시피를 완성시켰다. 빵 공장에서의 몇 개월과 정모란 여사 밑에서 배운 것으로 자신만의 제빵 세계를 확립한 시현. 신이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만약 신이 인간을 만드는 존재라면, 시현은 시작부터 신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으리라는 것.

오늘은 토요일. 주문 받은 케이크가 두개 있어 빵 작업을 서둘러 끝내고 크림 주머니를 잡았다. 환갑 축하와 아이 백일용. 세월의 격차가 다르지만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임은 같았다. 두건을 이마에 묶고 부재료는 거의 없이 순수한 크림 장식으로 케이크를 꾸미는 모습엔 위엄까지 엿보였다. 환갑 케이크는 크림을 우아하고 둥글게 짜내어 커다란 연꽃을 연상시키는 디자인. 백일 케이크는 리본이 묶인 선물 상자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예약한 손님들이 케이크를 찾아간 후 잠깐 시간이 빈 시현. 내일은 제빵 교실을 쉰다고 연락 들은 바 있었다. '모처럼 조용한 주말을 맞겠네.'쉬는 일요일이니 미리 반죽을 칠 필요도 없고, 오후에 팔 빵들은 다 구워져 매대에 가득가득 담겨 있었다. 언제나처럼 꾸준히 들어와 빵을 사 가는 손님들. 간혹 서비스 커피를 내려주기도 하고 그냥 보내기도 하는 시현이었다. 손님이 끊길 때쯤 한 꼬마 손님이 찾아오자 느릿하게 흘러가던 여유가 흐릿하게 사라져 버렸다.

"안녕하세요. 빵 아저씨."

"어서 오렴."

시현은 초등학교 3학년 민서가 가게 문을 여는 순간 핫초코를 타기 시작했다. 시장에선 사방으로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면서 참견질 하기로 이름 높은 아이였다. 또랑또랑한 여자 아이였는데 오늘도 빵 색이 어쩌네, 냄새가 평소완 다르네. 앉을 자리는 왜 하나밖에 없냐느니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거의 오분을 일초도 안 쉬고 땍땍거리다가 시현이 초코 가루를 토핑한 핫초코를 건내고 나서야 가게는 평화를 되찾았다.

"아저씨가 만든 과자빵 먹고 싶어요. 해 줘요."

"빵은 만드는데 세시간이 걸린단다."

"하나만 만들면 되잖아요. 대충 밀가루 반죽해서 구우면 되는 거 아니예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시현은 작업실로 들어가 밀가루와 소금, 물을 부어 생지를 만들었다. 민서는 카운터에서 까치발을 들고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시현의 행동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저울 없이 눈대중으로 반죽을 떼어내 밀대로 둥글게 펴는 동작이 아주 유려하게 이어졌다. 널찍한 프라이팬을 가스 불에 올리고 기름기 없이 반죽을 굽는 사이 시현은 천원 짜리 몇 장을 꺼내었다.

"가까운 슈퍼 가서 삼분 카레 하나 사오렴. 혹시 싫어하니?"

"사주시는 거면 먹을 게요. 아저씨는 안 드세요?"

"난 안 먹어. 너 먹을 것만 사 와."

민서는 미지근해진 핫초코를 꿀꺽 마시고는 슈퍼를 향해 뛰어갔다. 간단히 구워낸 차파티는 모두 세 장이었다. 시현의 행동은 단순한 호의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민서였다. 얼굴만 보면 부딪히는 할머니와 있기 싫어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방과후 교실에 남아 숙제와 공부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시장을 맴돌면서 최대한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가는, 어른들도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살아가는 아이에게 베푼 친절이었을 뿐. 금방 민서가 사온 레토르트 카레를 데워 차파티와 함께 준비해주는 시현. 테라스에 앉은 민서는 갓 구운 차파티를 카레에 찍어 야무지게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맛있어요. 아저씨."

"천천히 먹으렴."

테라스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차파티를 즐기는 민서는 그 나이 때 여자아이 특유의 발랄함이 엿보였다. 크림 패턴을 연습하는 시현을 바라보다가 본인도 모르는 사이 한 마디를 뱉는다.

"아저씨가 우리 아빠 였음 좋겠다."

민서와 함께 살고 있는 친할머니는 친절한 성격이 아니었다. 아빠는 이혼하기가 무섭게 재혼을 했고 민서에게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아 가족의 사랑을 느낄 일이 거의 없었다. 어느 때보다도 부모의 사랑이 필요한 시기인데도. 시장의 어른들에게 버릇없어 보일 만큼 들러붙는 건 애정 결핍의 또다른 모습이었을까. 일견 무뚝뚝해 보이지만 타인에게 친절을 많이 배푸는 시현에게 속마음을 드러낸 민서였다. 시현은 모양깍지를 바꿔 크림을 짜며 대답했다.

"외할머니한테 전화는 자주 오니?"

"별로 안 와요. 아빠가 싫어하거든요. 그래도 방학이 되면 외가에 가기로 했으니 괜찮아요."

민서에게 외할머니는 거의 유일하게 정을 붙일 수 있는 가족이었다. 몇번 이곳까지 와서 옛 사돈에게 눈치를 받으면서까지 민서를 챙길만큼. 민서를 귀찮게 여기지 않고 잘 대해주는 시현에게 고개를 숙여 가면서 고마움을 표시한 적도 있었다.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는 시현에게 그런 모습은 가슴에 파문을 남기곤 했다.

시현이 민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 초등학교 교사 가희 아주머니 때문이었다. 마음 씀씀이가 넓은 가희 아주머니는 시장 곳곳을 돌며 민서를 너무 귀찮게 여기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모든 사람들이 아이를 이해하는 건 아니었다. 때때로 민서를 쫓아내거나 싫은 소리를 하는 모난 사람들을 어렵게 설득하는 모습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민서가 외할머니 냄새가 난다면서 저를 놓아주지 않고 운 적이 있어요.'

가희 아주머니는 시현에게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눈물을 보인 적이 있었다. 그 날 이후, 민서의 버릇없는 행동을 받아 주고 간식까지 손수 준비해 주는 시현. 어쩌면 아이답지 않게 자라난 자신을 위로하듯 친절을 베푼 것인지도 몰랐다.  

차파티와 카레를 싹 먹어 치운 민서는 바로 가게를 떠나지 않았다. 꼬깃꼬깃한 오천원 짜리 한장을 꺼내 옥수수 식빵을 하나 산다.

"여기 옥수수 식빵을 할머니가 잘 드세요. 이렇게 사가면 조금 화를 덜 내실 거예요."

"고마워. 너무 늦지 않게 집에 들어가렴."

"네. 카레랑 빵 잘 먹었어요."

옥수수 식빵을 든 민서는 집이 아닌 시장 안쪽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걸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 시현은 예성에게 전화를 걸어 허락을 구한 뒤 야채식빵과 밤식빵을 민서에게 주고 치과에 가라고 뀌띔해 주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예성과 간호사 언니들에게 응석이라도 부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 양 손으로 나눠들은 빵 세개가 무거워 보일 만큼 작디 작은 민서의 뒷모습. 시현은 다시금 크림을 짜는 연습을 시작했다. 타인에게 베푼 동정은 금방 잊어야 된다고 말하듯, 아주 진지한 눈빛으로 크림 무늬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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