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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Jul 27. 2020

웹소설. 피투성이 소나타

21

 시현은 테라스 테이블 옆에 꽃집에서 받은 꽃 화분을 놓았다. 푸른 하늘에 가슴까지 물들어 버릴 것만 같은 완연한 가을. 빵을 굽고 캐셔를 보는 일상에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지만, 은아에게 줄 꽃을 생각하면 시현의 얼굴에 얼핏 그림자가 드리워지곤 했다. 치과 사람들이 점심 시간에 찾아 왔을 때 예성은 대번에 시현에게 고민이 있다는걸 알아 보았다. 간호사들이 테이블에서 커피와 빵을 즐기는 사이 예성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 시현에게 말을 붙였다.

"무슨 일이야?"


"개인적인 일."


"본가에서 연락이라도 온 겁니까?"


존댓말이었지만 사람을 밀어 붙이는 태도였다. 시현은 고개를 내저으며 어제 받아온 장미 꽃다발을 보여 주었다.


"아름드리 꽃집에서 받아온 거야. 은아한테 주라고 돌려 말씀하시더군."


예성은 뭐야, 그게? 하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와중 눈빛에 얼핏 그리움이 비추었다.


"생각해 보면, 은아 님은 늘 너와 함께 였지. 친부모 관계 이상의 사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 조직원들이 모르는 네 모습을 알고 있다고 얘기하곤 했는데. 이렇게 다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리라곤 상상도 못했어."


"내가 조직을 해체시킬 때, 나는 부모님을 포함해 모든 조직원과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 너와 친구로 지낸다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고."


"이 몸께서 조금 끈질기긴 하지. 뭐..나야 지금도 조폭들 사이에선 악명이 높으니까. 너에게 귀찮은 일이 안 생기고 폭력적 트러블을 해결할 수 있는게 나쁘진 않잖아? 지난 번에 어린애들 문제도 내가 말끔히 처리했다고. 또 그런 일 있으면 평생 빨대로 밥을 빨아 먹게 해주겠다고 했더니 꼬리를 말더구만."


"거짓말을 했군."


"어떤 거짓말?"


"네가 네 뜻에 거스르는 자를 턱을 부수는 걸로 끝낼리가 없으니까. 최소 팔다리를 불구로 만드는 걸로 시작할 거면서."


"들켰군."


예성은 큭큭 웃더니 "이제 그만 가 봐야 겠네."몸을 돌렸다. 문을 나서기 전, 등을 보인 그대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은아 님과 네 관계는 두 사람의 문제야. 남들이 뭐라 하든 신경쓸 거 없어.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해."


치과 식구들이 모두 떠난 후, 시현은 일을 하는 와중에도 생각을 계속했다. 과거 시현은 자신이 당주로 있는 조직을 스스로 해체시켰다. 모든 조직원들이 암흑 세계를 떠나도 살 수 있도록 충분한 자금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조직원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암흑 세계에 머물기를 원했고, 조직의 영광을 백지화시킨 시현에게 원망과 증오를 품게 되었다. 그후 시현은 무신이란 별명을 증명하듯 수 많은 싸움을 치루어야 했다. 반감을 품은 조직원들과 타 조직에서의 습격. 그 누구도 시현에게 생채기 하나 만들 수 없었다. 힘조절을 하지 않고 철저히 습격자들을 박살냈으니까. 사태를 관망하던 조직 연합의 대 보스가 직접 나서서 시현의 조직을 정리하고 탈퇴를 인정하고 나서야 시현의 위기는 일단락 지어졌다. 이전에 생각한, 시현을 증오하는 여자가 많다는 것은 시현의 조직에 여성 조직원의 비율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시현은 은아도 그들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러길 바랬다라고 하는 게 맞는 말이지만.


그날 장사를 마친 시현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은아의 학원 '꽃밭'을 찾아 갔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하루 종일 돌본다는 건 어마어마한 에너지 소모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은아는 상당한 수완가로, 많은 담당 선생님의 시간과 급여를 적절히 조절하여 일요일 오전까지 원생들을 받아 주었다. 아직 문을 연지 얼마 안 되었지만 소속된 교사들과 원생들의 만족도는 상당했다.


가게에서 조금 늦게 나섰고 조금 주저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걸었기에 시현이 '꽃밭'에 도착한 때는 대부분의 원생들이 귀가하는 참이었다. 학부모들이 와서 아이들을 데려가고 셔틀 버스가 출발하는 모습이 보인다. 서류 작업을 하던 은아는 시현의 인기척에 잠깐 시선을 두었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시현에게 다가간다. 그 순간 시현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보자 멈칫, 움직임이 그쳤다. 시현은 조심스레 꽃다발을 내밀며 소심하게 말했다.


"선물이야, 그냥 꽃.." 


"시현 씨."


꽃다발을 받아드는 은아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이전의 은밀한 신체적 접촉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알싸한 향기가 새어 나오는 장미 꽃다발을 가슴에 안은 채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동양적 매력의 극을 보여주는 듯한 얼굴에 슬픈 감동이 맴돌고, 어느 새 상처에서 피가 흐르듯 눈물이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기뻐요."


"미안해."


"예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죠. 시현 씨에게 이런 선물을 받는 건.."


"그땐 미안했어. 핑계가 될진 모르겠지만 내가 너무 어렸으니까."


"제가 할 말이예요. 제 입장만 생각하느라 시현 씨가 정말로 뭘 원하는지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걸요."


"..나중에 이야기하자."


시현은 은아의 인사도 듣지 않은 채 자리를 피했다. 가게로 돌아오는 와중 후회와 자괴감으로 마음이 괴로웠지만 꽃을 버리지 않고 선물한 건 잘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꽃다발과 더불어 지혜로운 말을 해준 지선 할아버지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드는 걸 느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강도 높은 유연운동으로 마음을 정리하는 시현이었다.


파지를 수거해가는 할머니 중 한 분인 선복 할머니와 대면한 건 다음 날 오전이었다. '빛나는 나무'엔 파지가 별로 안나오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없지는 않았다. 이전 고등학생들 방학 할 때는 종종 손자와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부끄러워할 만도 했지만 손자는 할머니의 리어카를 밀며 밝은 얼굴을 짓곤 했다. 야채식빵과 밤식빵을 몇번 팔았고, 서비스 커피를 내려준 적도 있었다. 선복 할머니는 오늘따라 시현을 빤히 바라 보았다. 얼굴이 아닌 발끝을. 


"그 신발 얼마나 해?"


시현이 신고 있는 건 유명 메이커의 운동화였다. 검소한 성품이지만 의복과 신발 종류는  제값을 주고 좋은 것을 구입하는 시현. 지금 선복 할머니가 가리키는 건 십대 학생들도 많이 신는 것이었다.


"십오만원 쯤 들었습니다."


"그래..그렇구만."


"손자 사주시게요?"


"맞어. 자식들이 준 용돈 안 쓰고 모았어. 지난 번에 손자랑 같이 파지 줍는데...손자가 친구를 보고 인사하더라구. 그 친구가 반질반질 윤나는 운동화를 신고 있는 거야. 그 다음부터 학생들 볼 때마다 신발로 눈이 가대. 다 좋은 신발 신는데 우리 손자만 못 신으면 안 되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새끼..지금 모은 돈이면 한 켤레 사줄 수 있겠어. 고마워, 사장님."


시현은 얼른 가게에 들어가 연한 아메리카노를 미지근하게 내려 길을 나서는 선복 할머니에게 쥐여 주었다. 옥수수 식빵을 유난히 좋아하시는 걸 알고 있었는데, 몇달 동안 잘 안 사드시는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된 것. 궁핍한 상황은 아니시지만 노인 용돈으로 십오만원은 적지 않은 액수였다. 할인을 자주 하는 근방 마트에 대해 알려주는 시현의 태도는 담담했지만 세세한 설명이 무척 친절한 모습이었다. 선복 할머니가 손자를 위해 새 신발을 산 날. 생각보다 이만원이나 싸게 샀다면서 옥수수 식빵과 야채 식빵을 하나씩 사 갔다.


"우리 손주가 야채 식빵을 아주 좋아해."


"맛있게 드세요."


소녀처럼 기뻐하며 큼직한 빵봉투를 흔드는 모습에 시현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항상 오후 시간에 와서 밤식빵을 주로 사가는 가족 손님이 며칠 보이지 않아 신경이 쓰였지만 옅은 걱정은 곧 사라졌다. 가족 손님의 막내, 초등학교 2학년 형설이가 혼자 '빛나는 나무'로 왔으니까.


"밤 식빵 하나만 주세요."


시현은 능숙하게 밤 식빵을 포장했다. 형설이 내민 건 몇번이나 접혀 있는 천원 짜리 다섯 장. '빛나는 나무'의 식빵은 대형 사이즈라 딱 적절한 가격이었지만 초등학교 2학년에게 오천원은 작은 돈이 아니었다. 조금 긴장한 얼굴이지만 돈이 아까운 것 같진 않다. 뭔가 평상시와는 다른 느낌에 시현은 핫초코를 하나 타주며 기억을 더듬어 말을 걸었다.


"받아쓰기 시험은 잘 되니?"


이전 형설이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형설이가 받아쓰기에서 백점을 맞은 다음부터 일주일에 천원씩 용돈을 주고 있다고. 시현의 질문에 형설은 수줍게 고개만 끄덕였다. 한글을 늦게 깨쳐 받아쓰기를 어려워 했는데, 한달 동안 연습 공책 값이 걱정될 만큼 열심히 연습했다고 자랑하던 형설이 어머니 모습이 생각났다. 형설은 소심한 편이지만 거리감이 적은 아이였다. 시현이 궁금해하는 점을 머뭇머뭇 이야기했다.


"엄마가 독감에 걸려서 누워 계세요. 빛나는 나무 야채 식빵을 아주 좋아하시거든요. 제 용돈으로 사 드리는 거예요."


"한달이 넘게 모은 용돈인데 아깝지 않아?"


"괜찮아요. 사랑하는 가족이잖아요."


소곤거리는 듯 조용한 설현의 말에 시현은 감정이 흔들림을 느꼈다.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하고 떠나가는 설현을 바라보는 사이 잔잔한 의식 사이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시현에게 아버지는 공적을 세우는 만큼 가깝게 대해 주셨고 어머니는 늘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은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지만 무척 짧은 편이었고. 가족들을 소중하게 생각했지만 직접적으로 사랑으로 표현하는 것을 자제해 왔던 시현, 초등학교 2학년 아이가 보여준 가족에 대한 사랑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시현의 부모님은 시현이 조직을 해체시킨 이후 지방으로 내려가 조용히 삶을 살고 있었다. 이틀에 한번 부모님에게 전화하는 시현은 손님들이 몰려들기 전 스마트폰을 꺼냈다. 단조로운 기계음이 몇번 울리다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버릇처럼 오고가는 일상적인 인사. 시현은 내심 용기를 내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어머니 좀 바꿔 주세요."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린다. 수화기 너머에서도 느껴지는 주저하는 분위기. "알았다." 전화를 건네받는 소리는 났지만 여보세요, 하는 인사는 들려오지 않았다. 시현은 손끝이 뻣뻣해지는 걸 느끼며 힘겹게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지내셨어요, 어머니."


"그래."


감정이 느껴지지 않지만 익숙한 목소리였다. 늘 아버지와 인사만 하고 전화를 끝낸 터라 이렇게 어머니와 통화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시현은 부모님과 거리를 좁히려는 어린 아이처럼 평소 일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니, 하려던 참이었다. 건조하게 이어지는 어머니의 질문이 말 문을 막기 전에는.


"빵집은 잘 되고 있니."


"예. 제가 생활할 만큼은 벌고 있습니다. 저금해 놓은 돈도 있고요."


"건강은 어떻니."


"늘 좋습니다. 수련은 하루 한 시간 정도 하고 있어요."


"주위 사람들은."


"다 잘해 주십니다. 한달 전부터 주말마다 제빵 교실을.."


시현은 유아식 받아먹는 아기처럼 어머니의 짤막한 질문에 최대한 자세히 대꾸하고 있었다. 제빵 교실에 대해 더 길게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지금까지 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새어 나왔다.


"은아가 네 곁에 있다고 알고 있다."


"예. 그렇습니다."


"나와 아버지의 눈치를 볼 필요 없다. 너도 한참 나이의 어른이고,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해라. 그만 끊으마."


"어,어머니. 잠시만.."


딸칵. 전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시현은 스마트폰을 움켜 쥔 채 상처받은 마음에서 비롯된 한숨을 내쉬었다. 은아는 신분이 가로막고 있는 심리적 거리와 다섯 살의 나이 차에도 아랑 곳없이 시현을 사랑해왔다. 시현은 열 여덟살 때 그 사실을 확실히 알았고, 평소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으로 은아의 연심을 흘려 넘길 뿐이었다. 조직을 해체시킬 때 헤어져 십년 넘는 시간을 넘어 다시 만난 남녀. 이제 시현은 성숙한 어른이었다. 은아는 삼십대 후반 나이가 무색하게 아름다웠고 사회적 명성과 재산까지 가지고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아무 문제가 없는 사이였지만 시현은 은아와의 접촉을 두려워함을 숨기지 못했다.


용기로 시작해 막막함으로 마무리된 부모님과의 전화. 시현은 집중할 수 있는 눈 앞의 일이 있다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며 저녁 업무를 시작했다. 그래도 어머니와 대화를 했다는 당장의 사실만으로 만족감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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