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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Jul 24. 2020

웹소설 피투성이 소나타

20화

이번 주 일요일 제빵 교실 메뉴는 포카치아 샌드위치였다. 동그랗게 구워낸 포카치아 빵을 갈라 그 안에 짭쪼롬한 올리브 무침을 넣자 십대 학생들 입맛에 맞는 포켓 샌드위치가 되었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메뉴는 아니었지만 브로콜리와 크랜 베리, 듬뿍 넣은 치즈가 미각돌기를 자극시키는지 학생들 모두 맛있게 먹는 모습. 시현은 뿌듯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수업을 기획한 복지사 선생님도 만족스런 눈치였다. 시식이 끝나고 뒷정리 후 학생들이 모두 떠나자 시현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을 대하는 일은 경중을 떠나 심적 피곤함을 누적시키는 작업. 시현은 잠깐 의자에 앉아 쉰 후, 복지사 선생님의 허락을 구하고 단과자빵 한 배합을 쳤다. 직접 가져온 재료였는데 무염버터에 유기농 밀가루, 유기농 메이플 시럽. 가게에서 쓰는 발효종 등 나무랄 데 없는 구성이었다.

일본식 빵인 단과자빵 반죽으로 익히 만든 바 있는 크림빵과 소보로. 단팥빵을 성형했다. 학생들의 서툰 모습을 지도하다가 마음껏 빵을 만들어서인지 손놀림이 유난히 빠르고 경쾌하다. 발효 시간을 제외하면 순식간에 작업을 끝낸 시현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빵을 종이 봉투에 나누어 담았다. 시현이 시장에 도착해서야 빵을 만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시장 한 구석에 있는 시계방. 묵묵하게 정교한 부품과 씨름하고 있는 성장 할아버지는 시현을 알아보자 반가이 맞이했다.

"어서와. 시현 씨. 오늘도 봉사활동 하고 오는 길인가?"

"그렇습니다."

시현은 성장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둥그런 단팥 빵을 하나 건네었다. 오는 길에 산 두유도 잊지 않았고, 있다가 드시기 위해 빵 한 봉투를 탁자에 올려 놓았다. 고소함과 달콤함으로 한 숨 돌린 성장 할아버지는 시계 고치는 작업을 계속하며 시현과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서로 활동반경이 작은 직장에 있어 할 말이 별로 없을 것 같았지만 의외로 심오한 대화가 오간다. 한 가지 분야에서 결실을 거둔 달인들이어선지 생각에 통하는 것이 있는 듯 싶다. 시현은 나이 든 스님의 선문답이 연상되는 지혜롭고 소탈한 이야기를 주로 했고 성장 아저씨의 답변은 대학 박사를 연상시키는 정확함과 명쾌함으로 이어졌다. 어느 정도 대화의 즐거움을 누린 시현은 일상에 대한 것으로 화제를 돌렸다. 

"경인 씨가 시계 고치는 데에 재능이 있는 것 같나요?"

미혼모 경인이 기술을 배우도록 시현은 시장의 여러 기술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웃들은 기꺼이 기술을 가르쳐 줄 것을 약속했고, 신중하게 생각을 거듭하던 경인은 시계 수리공이 하고 싶다고 말했다. 여성이 드문 분야이지만 섬세하고 정확한 작업, 끈기에는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작은 톱니 바퀴를 새로 만들던 성장 할아버지는 확대경을 조절하며 시현의 질문에 답했다.

"하나를 가르치면 하나를 알지만. 한번 배운 건 잊지 않더군. 좋은 수리공이 될 수 있을 거야."

"평일에만 일하게 한 건 이해해 주십시오. 아직 젊은 사람이고 애 엄마이기도 하니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다음 달 부터 우리 집에서 먹고 자게 할 참이야. 안 사람하고 이야기도 해 놨어."

"잘 됐군요."

성장 할아버지가 조건없이 사람을 돕는 건 시장에선 유명한 이야기였다. 오갈 데 없는 십대 소년을 거두어 먹이고 입히면서 시계 수리 기술을 가르친 이야기는 시현도 들은 바 있었다. 본인이 변변한 스승없이 고생하면서 기술을 습득했기 때문인지 자신의 기술을 공유하는데도 적극적이었다. 아무 가족도 없이 복지관에서 생활하는 경인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리라. 한참 씨름하던 부분이 해결되자 성장 할아버지는 가벼이 기지개를 켜며 시현의 눈치를 살폈다.

"나 밥먹어야 하는데, 시현 씨도 짜장면 한 그릇 시켜줄까?"

"괜찮습니다. 그만 가봐야 할 때도 되었고요."

"사람이 먹는 재미라도 있어야지. 시현 씨는 참 독해."

"칭찬으로 듣지요. 감사합니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시계방을 나온 시현은 정육점으로 향했다. 닭가슴살을 주로 먹는 시현이 아주 가끔 사치를 부릴 때 먹는 음식인 쇠고기. 이곳 정육점 고기는 저렴하고 최상품만을 취급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사장님과 세명이나 되는 직원이 열심히 고기를 썰고 있었다. 식사 시간이지만 교대로 한술 두술 뜨면서 바쁜 업무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어, 시현 사장님!"

삼겹살을 자르고 있던 베테랑 기술자. 26살 연열이 시현을 알아보자 큰 소리로 인사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열여덟 살 때부터 정육점에서 일해온 청년으로 눈이 가느다란 인상이었다. 싸움질을 좋아하는데다 난폭한 편이라 악동으로 유명했는데, 몇년 전 예성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반 죽음이 된 후부터 시현에게까지 저자세를 보이는 것이었다. 시현은 가벼이 손을 흔들어 보인 후 빵 봉투를 사장에게 건넸다.

"지난 번에 구해 주신 한우 차돌박이 아주 맛있었습니다. 빵 좀 드시면서 하세요."

"아유 고마워. 연열아. 가서 흰 우유 좀 사와라. 빵에는 흰 우유지."

"옛! 알겠습니다!"

이등병이 연상되는 동작으로 재빨리 앞치마를 벗고 튀어나가는 연열이었다. 잠시 일손이 멈춘 사이 한 직원은 바쁜 와중 눈치껏 한 젓가락씩 먹던 짜장면을 단숨에 해치워 버렸다. 사장인 아연 아저씨는 이젠 손의 연장처럼 느껴지는 예리한 단도를 내려놓고 이마의 땀을 닦는다. 키가 크고 마른 편이었는데 시장에서 손꼽을 만큼 힘이 셌다. 무거운 고기를 척척 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새김질하는 손이 빠른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전 시비를 걸어온 깡패들과 다툼이 있었는데, 혼자서 다섯 명을 때려 눕힌 이야기는 유명했다.

"무술 수련 동호회엔 저녁반에 가실 모양인가 봐요."

"응. 오늘 일이 좀 많아서..예성 씨가 일요일은 하루 종일 수련 도우미를 봐줘서 정말 고맙다니까.."

"배우는 쪽이 열심인 것만큼 즐거운 가르침도 없죠."

"시현 씨도 봉사활동 끝나면 같이 나오는 게 어때?"

"가끔 함께 움직이는 것도 즐겁지만 수련은 되도록 혼자서 하고 싶어서요."

아연 아저씨가 시현에게 제안한 것은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시현은 예성의 특별한 부탁으로 하루 주말 무술 수련 동호회를 대신 봐 준적이 있었다. 시현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진 않았지만 무술을 할 때만큼은 가식이나 위선을 완전히 배제했다. 회원들이 보는 앞에서 중국 무술의 기본 공격법을 몇가지 시연했는데 칼로 깎아 완성한 듯한 정확한 자세와 풍압이 일어나는 힘은 지금까지도 회원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었다.

"우유 사 왔습니다!"

어지간히도 서둘러 달려온 연열은 숨을 몰아쉬며 환하게 웃었다. 다들 우유 한잔씩을 들고 온기가 남은 달콤한 빵을 베어 문다. 부드럽고 쫄깃한 감촉 사이 피어나는 고급스런 풍미는 사치스러운 느낌마저 들 정도. 다들 양 볼이 불룩 튀어나오고 눈은 크게 떠지는 모습이 꽤나 볼만 했다.

"빵 진짜 맛있어요!"

"어떻게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는 거야?"

"사장님 좀 가게 키우셔서 이런 빵도 파세요. 대박날텐데."

시현은 조용히 웃어 보였다. 혼자서 일하는 입장에선 현재의 가게 운영이 이상적이란 말은 굳이 하지 않는다. 고기를 써는 예리한 칼들을 바라보며 옛날 무기술을 익히던 시절을 생각해 볼 뿐.

아름드리 꽃집을 찾아갔을 때 사장인 지선 할아버지가 건강한 모습으로 꽃을 포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딸 연희와 사위가 지극정성으로 병간호를 한 덕에 병원에서 말했던 사고 후유증은 씻어낸 듯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오늘따라 장미와 안개 꽃을 찾는 손님이 많아 잇달아 꽃을 포장하는 손길은 분주하면서도 섬세하다. 딸 내외는 근처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고, 아직은 기력이 있으니 혼자 생활하고 계시다고 들은 바 있었다. 시현은 달달한 캔 커피 하나와 버터크림 빵을 들어보이며 말을 걸었다.

"빵 좀 드시고 하세요."

"시현 씨. 반가워. 내가 먼저 인사하러 갔었어야 했는데.."

지선 할아버지는 급히 문가로 나와 시현의 손을 잡았다. 본인이 사고로 누워있을 때 쌀과 물을 놓고 가고, 연희의 결혼식 땐 멋진 웨딩 케이크를 만들어 준 일. 모두가 가슴이 아릴 만큼의 배려였다. 시현은 가게를 둘러 보았다. 원래 잘 관리되던 가게였지만 노인 혼자서 하기엔 조금 버겁지 않을까 싶다. 이제 지선 할아버지의 건강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웅변하듯, 깔끔하게 정리된 꽃과 포장 도구들을 보자 시현의 자잘한 걱정이 서서히 밀려나는 것이 느껴진다. 

"우리 연희. 벌써 아기를 가졌어."

"축하드립니다."

지선 할아버지의 환한 얼굴에 시현의 기분까지 좋아진다. 회사원으로 성실히 일하는 사위 유호는 연희에 대한 염려를 씻어내 주었고, 연희가 임신 사실을 알려주었을 때 지선 할아버지는 하늘에 떠오르는 듯한 기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시현이 잠깐 있는 사이 손님이 두명이나 들어올 만큼 장사도 잘 되는 모양. 안심한 시현은 빵을 놓고 가려던 참이었는데, 지선 할아버지가 손목을 잡아 끌더니 화분과 꽃다발을 집어주는 것이었다.

"내가 줄 거라곤 꽃밖에 없어서..이 화분 두 개 가져가. 방집 야외 테라스에 놓으면 볼 만 할거야. 그리고..이거, 선물용으로 줄게."

"알겠습니다. 감사히 받죠.."

시현의 인사 끄트머리가 미세하게 흐트러진다. 선물로 받은 꽃은 갖가지 색으로 피어난 장미 다발이었다. 비싸 보이는 건 둘째치고 연인에게나 주어야 할 듯한 분위기로 화사하게 빛나는 모습. 꽃다발을 받아든 시현의 얼굴에서 부담감을 읽을 수 있었지만 지선 할아버지는 왠지 엄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건 현재야.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만큼 축복받은 일은 없다는 걸 잊어선 안 돼."

시현은 은아와 관련된 충고라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연희의 결혼식장에서 재회한 이후 몇 번의 짧은 접촉 뿐이었지만, 시장 사람들은 은아가 자기 얘기를 거의 하지 않는 시현의 지인이라는 것만으로도 관심을 보였다. 은아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 성격이었고, 시현과 어떤 사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을 했을 것이었다. 소년 소녀 시절, 부모 관계 이상으로 마음을 나눈 사이였다고. 

지선 할아버지는 그 이상으로 시현에게 강요하진 않았다. 시현은 목례로 인사하고 화분과 꽃다발을 들고 나섰다. 가는 길에 빵집에 들어 꽃들을 일단 넣어 둔 후 아직 남은 빵을 들고 마지막 들를 곳으로 향했다. 시장에서 약 5km 떨어진 청소년 대안 센터. 일요일 임에도 근무자들과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몇번 이 센터에 소속된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현의 일요 제빵 교실을 한 적도 있었다. 전화기를 받은 채 몇 개의 문서를 열성적으로 체크하고 있는 센터장 연수가 보인다. 이십오년 째 거리에 나온 아이들을 학교와 사회로 돌려보내는 일을 하고 있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시현은 복지관에서 만들어 사람들 나눠주고 남은 빵 전부를 연수에게 주었다.

"오늘도 바쁘시군요."

"아이들 일이라는 게 휴일이라고 비껴가지는 않는 법이니까."

별다른 인사가 없어도 두 사람은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연수는 지난 주에 학교로 돌려 보냈던 아이 열명 중 여섯 명이 달아나 심적으로 고민을 많이 한 모습. 시현은 경인이 견습 시계공으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사고를 치던 아이들 몇병이 제빵 교실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는 등 위로의 성격을 띈 말을 건넸다.

"시현 씨의 제빵 교실이 아이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아. 혹시 말 안 듣는 애들이 있어도 이해해 줘. 상처가 많은 아이들이어서 잘 보듬어 주어야 해. 복지관 선생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줘서 고마워. 쉽지 않을 일이었을 텐데..."

"빵을 보내는 활동은 계속해 왔으니까요. 약간 심적으로 피로하긴 해도 재미는 있습니다." 

"...지난 번에, 폭력조직에 휘말린 아이들에게 협박이 온 적이 있어. 우리 센터에서 겨우 막긴 했지만..앞으로가 걱정이야."

예성한테 이야기 해 둬야 겠군. 시현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센터를 빠져 나왔다. 지금쯤 공원에서 무술 동아리 오후 수업이 진행될 시간. 시현은 잠깐 생각하는가 싶더니 주저없이 예성이 주과하고 있는 무술 동아리를 찾아갔다. 공수도의 기본 동작을 연무해 보이던 예성은 시현을 보자 모든 수련을 중지 시켰다.

"지금부터 모범 대련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다들 확실히 봐 두세요."

거두절미하고 대련을 시작하려는 예성. 이번 부탁은 근방 조직 폭력배들에게서 아이들에게 상관하지 말라는 뜻을 전하는 걸로 하면 되겠군. 시현이 형의권의 자세를 취하자 동아리 회원들 사이로 경외심이 깃든 수군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예성이 과거 조직에 있었던 체계 안에서 쌓인 악명은 아직도 폭력조직 사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모처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시현과 대련하는 예성은 적을 상대하듯 거침없는 공격을 퍼부었다. 빠른 동작으로 회피를 이어가던 시현은 미세한 헛점를 노려 지르기 공격을 구사했다. 급소를 정확히 가격했음에도 예성은 잠깐 움찔했을 뿐 큰 충격은 없어 보였다. 몇 차례 공방을 주고 받은 후 시현과 예성은 서로에게 예를 표시했다.

동아리 회원들의 감탄을 등 뒤로 하고 시현은 가게로 돌아왔다. 은아에게 전해주라는 의미로 준 장미꽃 다발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시현은 장미꽃을 카운터 옆에 두었다. 그리고 방에 돌아가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흡사 용기있는 결단을 내지 못하고 도망치는 아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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