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일기 육십 다섯 번째
지난 십이월 직접 키운 시금치를 뜯겠다는 야심 찬 계획으로 텃밭에 시금치를 심었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텃밭 가득 싹을 틔웠지만 결국 단 한 잎의 시금치도 맛보지 못했다.
아침이면 작은 텃밭에 뜯긴 잎새들이 쑥대밭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추운 날씨를 겨우 뚫고 올라온 새싹들은 채 자라기도 전에 흔적 없이 사라졌다.
대체 어떤 놈의 짓인지...
시골 살이 중 작은 설치류도 본 적 없었고 밤새 뜨락까지 고라니가 내려왔을 리도 만무해서
텃밭을 망가뜨린 범인은 한동안 오리무중이었다.
결국 텃밭을 가라 엎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서야 겨우 범인의 단서를 잡을 수 있었다.
그제 아침이었다.
집 앞 대숲에서 물까치 떼 수십 마리가 목책이며 지붕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범인은 바로 녀석들이었다.
수십 마리가 떼 지어 텃밭 만찬을 즐기고 잠시 쉬던 참에 그만 눈에 띄고만 것이다.
요놈들...
그날 아침 녀석들의 아침식사가 평소보다 늦지 않았다면
사라진 텃밭의 시금치는 영원한 미스터리가 되었을 것이다.
대숲을 쉼터 삼아 날아오던 물까치들이 범인인 걸 알고 나니 눈곱만큼의 아쉬움도 없다.
누구라도 청명한 하늘 가득 퍼지는 녀석들의 비췻빛 날개를 보았다면
저 이쁜 녀석들이 허기를 채웠으니 그만이다라는 마음이 절로 들 테니까.
시골 살이를 하면서 다 따지 않고 까치밥으로 남겨두는 열매 몇 개가
얼마나 소중한 아름다움인지 깨닫게 된다.
아무리 무정한 농부라도 홍시 몇 개는 반드시 남겨두는 것이 시골의 인지상정이다.
앙상한 가지만 성긴 겨울 언덕 위에 점점이 남겨진 붉은 열매의 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사람다운 멋짐이 거기 맺혀있는 듯하다.
우야튼 겨울은 사람에게나 동물에게나 혹독한 계절임에 틀림없다.
여름, 가을로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작은 텃밭 채소까지 새들이 노리는 걸 보니 그렇다.
내년의 겨울 텃밭이 벌써 고민이 된다.
그냥 비워 두자니 아쉽고, 부드러운 채소는 또다시 새들의 먹잇감이 되고 말 텐데...
아무리 그래도 조그마한 귀퉁이만이라도 허기진 새들을 위해 내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채소의 주인이 누가 되었든, 누가 먹든 말이다.
그런데 게걸스러운 녀석들 입에도 살아남은 채소들이 있다.
시금치 옆 씀바귀였던가?
쓴맛이 도는 채소들은 한입 뜯었다가 뱉어낸 흔적만이 역력하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쓴맛은 싫다 이거냐?
텃밭의 대부분은 밑동을 드러낸 채소들로 가득했지만 쓴맛 나는 채소는 그래도 먹을 만큼 남아있다.
녀석들도 나처럼 꽤나 애들 입맛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