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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하남 Dec 05. 2022

특별기여자,  난민 수용의 그늘과 딜레마

아프간 '특별기여자'들의 정착 과정에서 드러난 한국 사회의 민낯

작년 8월,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재점령했고, 미군은 소득 없이 막대한 손실만 안고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정부에서 파견했던 인원들 역시 귀국하게 되었고, 한미동맹을 고려할 때 신변이 위험할 것으로 여겨지는 현지 사람들 391명이 한국 정부의 보호 속에 한국으로 입국했다.


이슬람인 척 하는 테러 단체들이 활개를 치고, 이슬람교를 믿고 있는 부족과 국가 상당수가 여성 차별적 관습을 극복하지 못한 모습이 익숙한 한국인들에게 사실 이러한 뉴스는 먹잇감이 되기 쉬운 소재이다. 하지만 의외로 전반적인 여론은 호의적이거나, 최소한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이는 당시 정부에서 매우 고심 끝에 설정한 '특별기여자'라는 용어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아직 난민을 수용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지 않고, 이는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 인들에 대한 반응에서 제대로 확인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협조했던 사람들을 매몰차게 버렸다는 국제적 비난을 감수할 수도 없고, 난민을 수용한다는 명시적 언급을 통해 지지율 하락 및 기타 역풍을 맞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감수하는 것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난민이 아닌 것처럼 인식시키기 위해 특별기여자라고 지칭했다.


다행히 여론은 꽤 괜찮았고 한국 입국 자체는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제법 먹고 사는 나라 중 난민에게 가장 폐쇄적인 국가이지만, 그런 이야기는 쏙 들어가고 한국은 역시 선진국이라며 자화자찬하는 분위기마저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포장해도 이들은 난민이고, 한국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은, 울산 정착 과정에서 아프간 어린이들이 마주한 입학에 대한 험악한 반대 상황으로 다시 확인되었다. 다른 지역으로 갔어도 상황이 달랐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이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로 오리라곤 생각하지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다.


무지를 걷어내며 찾는 공감에 대한 희망

하지만 이는 한국인들이 특별히 공감 능력이 부족한 채로 태어나기 때문은 아니다. 혐오를 조장하는 기반은 편견과 무지이다. 테러 단체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평범하게 일상을 영위하는 현지 이슬람 교도 시민들이지만, 미디어는 이를 비추기 보다는 근본주의 단체의 만행과 자극적인 성폭력 뉴스로만 이슬람 세계를 소개하기 때문에, 그에 맞춰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정형을 만들어 이해할 수밖에 없다.


비상대책위원회까지 만들어 아프간 어린이들의 입학을 반대했던 학부모들도, 끊임없는 대화와 접촉, 그리고 함께 하는 과정에서 이들도 그저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지역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을 수용했다. 이들은 한국생활 2년차에 어느 정도 기반을 마련했으며 어린이들도 한국인 아이들과 잘 어울려 지낸다고 했다. 정착 과정에서는 지역 사회 한국인들의 수많은 도움이 있었다고 한다. 무지를 걷어내면 혐오와 공포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차근차근 증명해 나가고 있음을 믿는다.


사실, 난민도 능력이 되니까 오는 겁니다

사실 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제대로 교육 받기는 커녕 밥 한끼 먹기도 힘든 삶을 살아왔던, 그저 안타깝기만 한 삶을 살아왔던 사람들은 아니다. 외국 정부 기관과 연결되어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현지에서 어느정도 사회경제적 기반이 있는 계층 출신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기여자 중 한명인 사답씨는 산부인과 의사 출신이며, 다른 사람들도 어느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밑바닥 생활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데려와도 그런대로 '쓸모'가 있는 사람들이란 얘기다.


사실 다른 난민들도 대체로 다르지 않다. 난민이 자국을 탈출하려면 주선하는 브로커를 통해 이동 수단과 목적지를 마련해야 한다. 브로커에게는 현지의 일반적인 경제력으로는 도저히 마련할 수 없는 목돈을 지급해야 한다. 정말 밑바닥에 있고 아무 것도 없고 당장 내일도 살아 있는 것이 목표인 사람들은 난민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난민은 최소한의 경제력이 있고 나름의 노동력이나 전문성이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난민의 이러한 특징은, 난민 수용을 찬성하는 입장과 반대하는 입장 모두의 근거가 된다. 데려오면 꽤 자기몫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 노동력 부족과 저출산 고령화 현상 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있고, 저 사람들 옷도 멀쩡하게 입었고 스마트폰도 들고 있는데 뭐가 어렵다는거냐 그냥 더 잘사는 나라에 숟가락 얹고 싶어서 오는 거 아니냐 받아주기 싫다는 주장도 있다.


우크라이나 난민과 시리아 난민

나도 직접 알고 지내는 난민이 없고, 말은 포용적인 척 하지만 정작 난민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을 때 마주할 수 있는 경제적 부담과 문화 충돌 문제를 걱정한다. 하지만 난민들의 모국 현지 일상을 잘 모르면서 그들의 처지를 함부로 속단하는 것은 매우 실례라고 생각한다.


다만, 난민들이 쓸모가 있다는 이유로 수용되는 것 또한 한계가 명확하기에 주의해야 한다. 이는 반대로 이야기하면 쓸모가 없는 사람들은 수용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고, 이는 상당 부분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난민들은 주변국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유럽인이자 백인으로서 현대식 교육을 받았고 문화 충돌 우려도 없으니, 데리고 있어도 그런대로 제몫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도주의적 관점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런 기준이었다면 기존에 발생했던 수천만 명의 난민들 모두 편안하게 보금자리를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창 시리아 난민들이 쏟아져 나올 당시 강대국들은 서로 수용 쿼터를줄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우크라이나의 생존도 그 자체가 세계 경제와 국제 질서에 매우 중요하고 '쓸모'가 있기에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역시 전쟁의 여파로 물가가 가파르게 뛰고 러시아와의 관계 설정에서도 매우 어려움을 겪는 현실적 문제가 작용하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시리아를 비롯해, 전쟁과 독재로 나라가 아작이 나더라도 그 여파가 강대국들에게 크게 미치지 않는 나라에는 비슷한 수준의 지원과 관심이 주어지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에 쏟아지는 지원과 강대국들의 압력이 非유럽 내전 지역에 제공되었다면 현실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한 군인 출신 유튜버는 우크라이나의 자유를 위해 참전하는 용기를 발휘했지만 그에게 시리아와 예멘 등지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의 시선과 사고방식 역시 다르지 않다. 이런 사고방식이, 언젠가 더욱 악화된 양극화 사회 내부에서 촉발된다면 같은 사회구성원들끼리 서로 배제하고 사회적 약자들은 이름만 행정구역인 게토에 갇히게 될지도 모른다.


난민 수용은 최종 해결책이 아니다

그럼 강대국 정부와 시민들이 마음을 고쳐 먹고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 좋은 걸까. 그렇지도 않다. 앞서 언급했듯이 난민들은 모국에서 사회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사회를 이끌어갈 사람들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들이 자꾸 빠져나가고 힘 없는 사람들만 남으면 해당 국가의 상황이 나아질 가능성은 더욱 낮아진다. 독재정권에 저항할 시민의식이 발휘될 수 없고 내전이 끝나도 사회체제와 산업을 다시 일으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희망이 없으니 더욱 더 외국으로 나가고 싶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결국 대안은 난민 배출국에서 난민이 더이상 발생하지 않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뿐이다. 현지의 독재정권을 방치하며 광산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을 억압하지 않도록 압박하고 권력을 내놓게 해야 한다. 내전을 일으키는 세력들을 적극적으로 중재하고 합리적인 법과 원칙, 비폭력으로 운영되는 사회체제를 갖출 수 있도록 감독하고 지원해야 한다. 학교를 세우고, 현지의 기업이 일어설 수 있게 하고, 의료와 보건 등 인프라를 갖출 수 있게 지원하면서 굳이 나라를 떠나지 않아도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선진국 각국의 경제적 부담이 단기적으로 커질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난민 배출국이 제대로된 경제 주체가 되고 제대로 시장이 열리고, 분쟁 감소에 따른 교역 활성화 및 불확실성 제거 등의 장점으로 인한 경제적 이득이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변화의 책무는 세계를 이끌어가는 강대국들에게 있으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유리한 자리에서만 강대국 대접을 바라고, 책임지는 자리에서는 쏙 빠져서 약한 척 하는 뷔페식 선진국 놀이는 이제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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