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UJU Dec 24. 2019

언젠가 다가올 나의 보통 날.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두 뺨을 간질이고 간밤에 비가 내렸는지 젖은 풀 냄새가 코를 적신다. 넓은 창에 들어오는 햇볕에 눈을 살짝 찡그리며 몸을 일으킨다. 살짝 열린 문 넘어 갓 구운 빵 냄새가 풍기고 깔깔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 오늘은 마켓에 가볼까’ 생각하며 기지개를 켜고 슬리퍼를 구겨 신고 부엌으로 나간다. 날 보며 미소 짓는 그는 말없이 등을 돌려 나의 머그잔에 익숙하게 커피를 내린다. 


일주일에 한번 서는 마켓은 활기가 가득하다. 상추와 치커리 등 직접 재배한 채소를 파는 청년, 잼과 말린 과일을 들고나와 시식코너 앞을 서성이게 하는 옆집 아줌마, 새벽에 내린 비를 흠뻑 맞고 생생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식물들이 찬란하게 빛난다.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가게 앞으로 가 선다. 


익숙하게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안부를 건네는 아저씨, 제 눈앞에 아이스크림에 눈을 떼지 못한 채 흥분한 기색을 애써 감추려 앙 다물고 있는 조그마한 입. 휴지를 챙겨 아이의 목 주변에 감아놓는 남편을 보며 나는 입가에 떠오르는 웃음을 참으며 가만히 가슴에 찰랑이는 행복을 어루만진다. 여유로운 금요일 아침, 이 곳 뉴질랜드에서의 긴 해는 오늘도 우리를 온화하게 감싸며 종일 보호해 줄 것이다. 




이곳에 온 지도 어언 일 년, 우리 부부는 더 이상 각자의 할 일을 정해두고 역할을 분담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의 일이지만 너의 일이기도 하고, 내가 하지 않으면 네가 해야 하는, 다만 서로의 수고를 덜어내기 위한 선의의 표현일 뿐이다.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집안일을 책임지는 이분법적인 계산에서 벗어난 우리의 일상은 서로의 하루를 고민하고 함께 나누는 매일매일로 채워진다. 그날의 일과는 주로 날씨에 영향을 받으며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은 아이가 마음껏 뛰어 놀 장소를 고르는 것, 무엇을 먹을까, 어떤 음악을 들을까와 같은 오감체험 액티비티의 연속이다.


모든 미취학 아동은 안정된 환경에서 잘 짜인 커리큘럼의 무상교육을 받으며, 이 과정에서 아이는 부모의 일체의 의심과 불안을 떨쳐내고 하나의 개인으로 존중 받는다.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말은 또 다른 학대를 방관하는 통념으로 치부되며, 나의 아이가 소중한 만큼 다른 아이도 어여쁘고 귀중한 사회의 자원이고, 타인의 배려와 신뢰 속에 더 이상 낯선 사람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 이렇게 아이는 따스한 햇볕과 양질의 토양을 기반으로 단단히 뿌리내리고 가정과 사회의 관심 속에서 건강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라난다.


이 나라의 해변가에는 통나무로 지어진 화장실과 간이 탈의실이 있을 뿐이다. 작은 상업시설이라도 지어지려 하면 환경파괴를 걱정하는 온 주민이 나서서 시위를 하고, 자본세력과 정치가가 결탁하여 강행하기라도 하는 날엔 전국민 불매운동과 정치활동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는 반대시위를 무릅써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시내에서 차를 타고 20분을 나가면 온 우주가 쏟아지는 듯한 별을 마주할 수 있다. 그 무수한 별들 아래에서 인간은 아주 작은 먼지일 뿐이며 아무것도 아닌 나의 더 사소한 고민 따위는 이 만물 아래에 일말의 공간을 차치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오후에 쏟아진 소나기로 집에서 해물파전 만들어 먹기가 주 과제였던 저녁시간, 우리는 형형색색으로 물드는 저녁노을을 그냥 보내주기 아쉬워 밤 피크닉을 떠나기로 한다. 우리가 자주 가던 작은 동산에 돗자리를 깔고 담요를 무릎에 덮고 말간 코코아와 귤을 까먹으며 별을 기다리는 시간, 아이는 내게 묻는다. 

엄마 아빠가 어릴 때 나는 어디에 있었어?
우리는 모두 저 하늘에 별에 속해있다 때가 되면 이곳에 내려와 함께 지내고,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다시 저곳으로 돌아가는 거야. 우리 아가는 엄마와 아빠를 만나기 앞서 저 별들의 무리와 함께 세상 구경을 하다 엄마아빠의 곁으로 내려온 거지.


아이는 나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와, 그럼 우리는 나중에 저 하늘에서 또 만나겠네? 나는 그럼 저기 저 제일 빛나는 별 할래!


말간 얼굴로 웃음짓는 아이를 품에 꼬옥 안고 따스한 온기를 지닌 행복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두 눈을 감고 온몸으로 전율한다. 


이 평화가 모든 이들에게 깃들기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