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하인간 Jan 23. 2022

위협으로 인한 죽음과의 직면은 삶에의 의지를 선물할까

삶에의 의지의 실질적인 괴리에 관하여, <쏘우> 시리즈를 예로 들어서

※필독※

이 글은 영화 <쏘우> 시리즈에 관한

평론을 목적으로 쓰여졌다.

하지만 그 중심 주제가

죽음과의 직면과 삶에의 의지라는

보편적이고도 중대한 것이기 때문에

작품을 감상하지 않은 이들도 읽을 수 있도록

스포일러와 서사에 관한 이야기는

글의 뒤쪽으로 빼고,

앞쪽에는 철학적 분석을 위치시켰다.

스포일러가 언급되는 부분에는

미리 경고를 표시해 놓았기 때문에,

작품을 감상하지 않은 이들도

걱정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쏘우> 시리즈로 시작된 글이지만

오히려 그보다 넓고 깊은 글이 되었다.




깨어나 보니 낯선 공간이다. 몸에는   없는 장치가 부착되어 있고, 근처에는 낡은 TV 하나 보인다. 잠시 ,  TV 전원이 들어오더니 기괴하게 생긴 인형이 말을 건넨다. 감사함 없이 삶을 낭비했다면서 그동안 저질러 왔던 잘못을 읊기 시작한다. 그렇게 게임이 시작된다. 목숨을  게임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규칙에 따라 육체적인 고통까지 이겨내야 한다. 이것이 <쏘우> 시리즈를 이끄는 중심 서사다.

     이러한 게임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보다 넓은 관점에서 아홉 편의 '쏘우 시리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존 크레이머라는 인물에 관해 탐구해 보아야만 한다. 그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게임과 장치를 직접 설계한 건축가이자 공학자다.

     그의 과거는 불운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마약 중독자 치료 시설에서 근무하는 아내가 있었지만, 사고를 당해 아이를 유산하게 되면서 사이가 멀어져 이혼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병원에서는 뇌종양 진단을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다. 이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삶의 의욕을 잃은 그는 고의로 자동차 사고를 내면서 결국 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 그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을 통한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은 쉽게 죽을 수 없다는 철학이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는 다시 삶에의 의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뇌 속에는 여전히 종양이 자리하고 있어서, 죽음이 계속해서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이제서야 살고 싶다는 의욕이 생겼는데,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 것이다. 이를 계기로 자신이 삶에서 터득한 철학을 실천하고자, 그리고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자신과는 달리 삶의 가치를 잊고 감사함을 갖지 않는 오만에 빠진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선물하고자, 사람들을 납치해 목숨을 건 게임을 감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죽음을 직면하고 나서야 삶을 감사하게 여길 수 있었던 자신처럼, 그들에게도 똑같이 죽음을 직면하게 만들고 삶에의 감사함을 일깨워 주기 위함이다. 따라서 그가 설계한 게임의 의도, 그리고 아홉 편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요 논지는 '삶에의 감사함'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는 존 크레이머 본인의 입으로도 빈번히 언급되는 주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고민해 보아야 할 부분은 두 가지로 나뉜다. 바로 존 크레이머의 의도처럼 목숨에 위협을 가하는 방식으로 타인에게 삶에의 감사함을 심어 주는 것이 가능한지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존 크레이머의 게임은 그 의도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먼저 전자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하나의 전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앞서 언급한 가능성의 규명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죽음과의 직면이 삶에의 의지를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는 점이다. 흔히 암에 걸린 사람이 이전까지는 잊고 지냈던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던가, 혹은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수준의 사건을 겪은 이가 살아 있음에 새삼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는 일리가 있어 보인다. 이와 유사하게, 하이데거의 철학을 살펴보면 죽음의 필연성을 깨닫는 일은 인간에게 불안을 일으키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로 인해 인간은 존재의 감사함을 영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찬국 교수는 이를 "죽음은 나의 존재와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앗아가는 재앙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를 환히 드러내 주면서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일깨워주는 역할(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21세기 북스, 137쪽)"이라 풀어서 설명했다. 즉, 죽음을 마주하는 일은 일상을 뒤덮고 있었던 허상을 걷어 내고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에 감사함을 갖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 크레이머의 게임이 이러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피해자들에게 삶에의 의지를 일깨워 주었다고 단언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것은 서로 다른 단 하나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죽음과의 직면에 타인에 의해 고의적으로 주어진 것인지, 혹은 우연에 의해 스스로 마주하게 된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이를 따져 보기에 앞서, 토마스 네이글의 철학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삶이 대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와 그 욕구를 철저히 외면하는 침묵 사이의 부조리로 가득하다고 본 카뮈와는 달리, 네이글은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일인칭적 관점과 삼인칭적 관점 사이의 충돌 또는 괴리에서 부조리가 피어난다고 말한다. 이 일인칭적 관점과 삼인칭적 관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관점이다. 누군가는 일인칭적 관점만 가지고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삼인칭적 관점만 가지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먼저, 일인칭적 관점은 주관적이고 행위자적인 관점이다. '나'는 친구를 만나면 즐겁다. '나'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다. 이것은 자명한 진리이며 반론의 여지조차 없다. 누군가가 '나'에게 왜 친구를 만나는지를 묻는다면 '나'는 그것이 '즐겁기 때문'이라 답하면 그만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왜 맛있는 음식을 먹는지를 묻는다면 '나'는 그것이 '기분이 좋기 때문'이라 답하면 그만이다. 이때의 '즐거움'과 '기분 좋음'은 그러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진리다.

     이와는 반대로 삼인칭적 관점은 객관적이고 관찰자적인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모든 것들이 자명하지 않으며 모호하고 근거가 없다. 누군가가 '나'에게 왜 친구를 만나는지를 묻는다면 일인칭적 관점에서의 '나'는 그것이 '즐겁기 때문'이라 답하겠지만, 삼인칭적 관점은 그곳에서 멈추지 않고, 그렇다면 '나'는 '왜 즐거워야만 하는가'를 묻는다. 누군가가 '나'에게 왜 맛있는 음식을 먹는지를 묻는다면 일인칭적 관점에서의 '나'는 그것이 '기분이 좋기 때문'이라 답하겠지만, 삼인칭적 관점은 그곳에서 멈추지 않고, 그렇다면 '나'는 '왜 기분이 좋아야만 하는가'를 묻는다. '왜'를 묻는 삼인칭적 질문은 그 끝을 모르고 계속해서 그 근거를 제시할 것을 요구한다. 삼인칭적 관점은 극단적으로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사유 방식이다.

     네이글은 인생의 부조리가 이러한 일인칭적 관점과 삼인칭적 관점의 충돌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일인칭적 관점은 '나'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욕구를 일으키지만, 삼인칭적 관점은 그러한 노력을 짓밟는다. 경희대학교 철학과 최성호 교수는 이러한 네이글의 철학을 설명하며 인간을 "인생의 목적에 대한 궁극적 정당화가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면서도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는 그런 존재(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필로소픽, 93쪽)"이라 규정한다.

     이를 앞서 언급했던 전제와 결합하면, 타인에 의해 고의적으로 주어진 죽음과의 직면은 인간에게 삶에의 의지를 일깨울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삼인칭적 관점의 존재 때문이다.

     존 크레이머의 생각처럼 삶에 감사함을 갖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 원인은 네이글이 말하는 일인칭적 관점의 부재일 공산이 크다. 즉, 친구를 만나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며,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들은 죽음을 직면함으로써 살아 있음에 다시 감사함을 갖게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이데거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는 삼인칭적 관점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은 오류다. 죽음과 마주하게 만듦으로써 일인칭적 관점의 부제를 해결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삼인칭적 관점의 회의주의가 존재한다. 목숨을 건 게임을 통한 일상으로의 회귀를 이행한 후에, 친구를 만나 즐거움을 느끼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 좋은 기분을 경험한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자신에게 '왜 즐거워야만 하는가', 그리고 '왜 기분이 좋아야만 하는가'를 물으며 그 의지를 다시 망쳐 버리는 존재가 남아 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관점이 사라지지 않고서 단지 일상의 만족만을 얻었다는 이유만으로 삶이 다시 감사하게 느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 크레이머의 게임은 삼인칭적 관점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점에서, 삶에의 감사함을 선물하는 것에는 전혀 효과가 없다.

     심지어는 타인에 의해 고의적으로 주어진 죽음과의 직면은 그것에서 살아남았다고 해도 그를 자살로 이끌 수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자살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두었으며, '자살학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자살 분야를 깊이 연구하고 일반 대중에게도 그 지식을 공유했던, 심리학 교수이자 임상 심리학 박사 토머스 조이너는 그의 저서를 통해 인간을 자살로 이끌 위험이 있는 세 가지의 경우를 규정했다. 고통과 상처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어 그러한 것들에 무감각해지고 폭력성에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는 심리 상태도 그중 하나다.

     자살자들 중에는 자해 상처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다. 그것은 자살할 만큼의 정신적 고통을 주변인에게 표하기 위한 시도가 효과를 거두지 못해 자살로 이어지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반복적인 자해로 신체 훼손에 대한 거부 반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물건으로 손목을 긋는 행위는 처음에는 주저하게 될지 모르지만, 한 번 해낸 사람은 두 번째부터는 어렵지 않다. 한 번 자해한 사람은 그 다음에도 시도할 확률이 크다. 그리고 두 번 자해한 사람은 그 다음에도 시도할 확률이 더욱 커진다. 그렇게 자해 경험이 쌓이게 되면,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는 일에 거리낌이 사라지게 된다. 결국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거나, 줄에 목을 매달거나, 총으로 머리를 쏴 버리는 등의 행위를 실행에 옮기게 될 확률이 다른 이들에 비해 높아지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불행을 경험하지만 그들이 전부 자살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불행의 크기와 고통에 대한 무감각의 정도에 차이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스스로를 생존하게 만들려는 동물적인 방어 심리가 있다. 아무리 인생이 불행으로 가득하더라도, 아무리 자살을 이행하고 싶더라도, 그 동물적인 방어 심리는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 자살을 막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칼과 같은 흉기로 자살한 이들의 시체에서는 주저흔이 발견된다. 이 '주저흔'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주저한 흔적'이라는 뜻이다. 칼로 심장을 찔러 자살한 이에게는 칼에 찔린 흔적이 두 개 이상이 발견될 때가 있는데, 사망에 이르게 한 결정적인 상처 이전의 것, 그 깊이가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못할 정도로 얕은 것을 주저흔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주저흔의 존재는 '주저함'을 이겨냈다는 의미이고, 자살 실패 이후 곧바로 다시 자살을 시도했다는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고 나서, 아직 죽지 않았다면 곧바로 그보다 더 깊게 다시 찌를 수 있어야 할 정도로 자살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쩌면 모순적이게도 자살할 때는 인생을 살아갈 때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기도 하다. 그런데 그러한 용기를 줄여 주는 것, 크지 않은 용기로도 자살로 이끌어 주는 것이 바로 고통과 상처에 대한 무감각이다. 타인에 의해 고의적으로 주어진 죽음과의 직면은 이러한 고통과 상처에 대한 무감각을 효율적으로 학습시킨다. 그러니 그것은 삶에의 감사함을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살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타인에 의해 고의적으로 주어진 죽음과의 직면은 말이 포장되었을 뿐이지 사실 살해 위협이나 다름없다. 그러한 경험은 그 피해자에게 정신적 충격을 주기에 치명적이다. 그 상황에서 살아남았다고 해도, 그 사건을 계기로 트라우마에 시달리거나 심각한 경우에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약물과 치료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그 정신적 피해는 절대 보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진다. 지나친 연쇄 논법이라 반론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정신적 피해는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타인에 의해 고의적으로 주어진 죽음과의 직면은 고통과 상처에 무감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리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일으키며 정신적 피해를 입힌다는 점에서, 총 두 가지의 방법을 동시에 사용하여 자살을 유도하게 되는 것이다.

     삶에의 감사함을 선물하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자살 위험에 빠트린다는 결론으로 앞서 제시했던 두 가지의 논점 중 하나가 잘못된 것임을 규명했다. 첫 번째의 논제가 거짓임을 밝혔으니, 그것을 전제로 하는 두 번째의 논제는 탐구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두 번째의 논제에 관해서조차 존 크레이머의 게임이 갖는 모순과 자가당착은 노골적인 수준이라서 오히려 강력하게 꼬집는 편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 두 번째 논제, 존 크레이머의 게임이 그의 의도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관해 탐구해 볼 차례다.

     이 다음으로는 다수의 스포일러가 언급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의 게임은 그가 의도한 것과는 모순된다. 그의 게임을 조금만 분석해 보아도 그가 이야기한 것과 실질적인 진행 사이에는 괴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피해자들에 관해 살펴보는 것으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의 게임에 참가한 피해자들 중에는, 그가 이야기한 것과는 다르게 삶에의 감사함을 잊었다고 단언할 수 없거나 심지어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이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2편에서 등장하는 게임의 참가자들은 모두 형사의 증거 조작으로 인해 억울하게 실형을 선고 받은 이들이다. 그들은 오히려 보상을 받아야 마땅한 인물임에도, 존 크레이머는 형사를 시험하겠다는 명분으로 그의 피해자들을 게임에 참가시켰다. 가해자를 벌하기 위해 그가 생산한 피해자를 죽이겠다는 것이다. 이는 윤리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거짓 증거 때문에 형을 살았는데, 이제는 목숨까지 걸고 게임을 하라는 것과 다름없으니 말이다.

     3편에서 등장하는 남성도 마찬가지다. 그는 교통 사고로 아이를 잃었다. 그런데 존 크레이머는 오히려 그를 시험에 들게 한다. 게다가 그 시험은 아이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이들을 살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된 것이다. 아이를 죽인 가해자, 그 아이를 죽인 사람에게 충분한 처벌을 내리지 않은 판사, 아이의 사고를 보고도 돕지 않은 목격자를 살리기 위해 그 죽은 아이의 부모가 힘써야 하는 상황은 공감을 일으킬 수 없다.

     4편도 마찬가지다. 4편에서는 경찰의 게임이 중심적으로 진행된다. 그 경찰은 모두를 살리고자 하는 헌신 때문에 강제로 게임을 진행하게 되었다. 최대한 많은 이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헌신은 경찰로서 칭찬 받아야 마땅한 일이지만, 존 크레이머는 그에게 벌을 준 것이다. 물론 4편은 게임을 진행하면서 그 시험에 들게 된 이들이 모두 범죄자라는 점에서 3편보다는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지만, 마지막에는 그 경찰 또한 죽게 될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는 점에서 본질은 서로 다르지 않다.

     또한 가정폭력을 저지른 남성과 그의 아내의 경우도 설득력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그들은 등을 맞댄 채로 쇠 막대기에 찔려 있었는데, 그 막대기는 남편의 주요 혈관을 관통하고 있던 터라 아내가 그것을 뽑으면 그는 결국 줄게 될 처지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남편이 아니라 아내에게 있다. 가정폭력을 당한 피해자에게 도대체 어떤 잘못이 있어서 그의 게임에 참여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보호 받아야 할 대상을 결박하고 쇠 막대기를 찔러 몸을 관통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란 말이다.

     심지어 6편에서는 보험사 사장을 시험하기 위해 여러 피해자들이 동원되는데, 그중에서는 흡연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몸통이 으스러져 죽은 사람도 있고, 단지 나이 들고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납치되어 목에 쇠줄이 감긴 사람도 있다.

     존 크레이머의 게임은 대부분 죄인을 벌하기 위해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삶에의 감사함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러한 철학적인 논점과 그것을 의도한 데로 구현했는지에 관한 실질적인 탐색을 제외하더라도, 이야기 자체에 개연성이 없고 설득력이 부족한 허점이 많다. 우선, 1편에서 자신의 발을 자른 의사에 관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옷을 찢어 종아리 부근을 묶은 뒤, 족쇄의 위쪽으로 자신의 발을 자른다. 급박한 상황이었던 탓에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졌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가 의사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는 납득이 되지 않는 선택이다. 발에서 족쇄를 빼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족쇄의 아래쪽 발목을 자르는 것이 신체 절단을 최소화하는 방법인데, 의사는 굳이 더 많은 신체를 절단했다.

     2편에서는 목 뒤에 금고의 비밀번호가 적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남자는 그 사실을 설명하기만 한다면 아무도 해치지 않고 수월하게 해독제를 얻을 수 있었음에도, 굳이 설명 없이 폭력적으로 행동하며 살인까지 저질렀다. 결국 여자와 형사의 아들이 그에게서 도망치면서 시간을 끌게 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더불어 도망친 그 여자의 행동도 상황에 맞지 않는다. 그는 남자에게 자신이 그의 번호를 알려 주지 않는다면 그 또한 금고를 열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남자는 자신의 피부를 도려내 번호를 직접 보게 된다. 이때, 금고에 해독제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게임을 시작하며 알게 되었음에도 금고를 여는 일을 돕지 않겠다는 여자의 태도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어 보인다.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함께 살 수 있는 상황을 거부하는 것인지 관객은 이해하기 어렵다.

     5편의 마지막 관문인 손을 잘라 일정한 량의 피를 흘려야 하는 게임에 관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최후까지 생존한 두 사람은 마지막 방에서 문이 닫히기 전에 해당 게임이 손을 잘라 피를 뽑아야 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생각 없이 문을 닫아 버린다. 직전에 전기에 감전되어 죽은 사람의 시체를 가지고 와서 그의 신체를 절단했다면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음에도, 그 시체를 사용하지 않고 버린 것이다.

     6편에서는 보험사 직원이 자신의 목을 겨냥하고 있는 장치를 풀겠다며 전기톱을 들고 사장을 죽이려 한다. 그의 배 속에 장치를 풀 열쇠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몸에 장착되어 있는 장치의 어깨 부근이 가죽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 버린다. 톱으로 사장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죽을 자르기만 했어도 두 사람 모두 생존할 수 있었을 테지만, 직원은 이성을 잃고 사장을 위협하면서 시간을 끌어 죽음을 자처한다.

     물론 이러한 행동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 급박하고 이성적 판단의 여유를 주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모든 작품에서 동일하게 흐름을 방해할 정도로 개연성이 부족한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엄연한 단점이 될 수 있다. 더구나 개연성을 망치는 것은 등장 인물의 행동뿐만이 아니다.

     1편부터 9편까지 존 크레이머의 조수로 일하며 그의 계획을 도왔다는 인물이 총 4명이나 등장한다. 이러한 설정은 한 번 뿐이라면 인상적인 반전이 될 수도 있었을 테지만, 동일한 구조를 지나치게 반복하면서 사용한 탓에 오히려 진부하고 지겨운 것이 되었다. 그리고 6편에서 등장하는 보험사 사장의 여동생은 게임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전무함에도 납치되어 그 존재 이유에 의문을 자아내며, 7편에서 천장에 매달린 남성이 가슴 근육이 찢어지면서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은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는 천장에 연결되어 있는 전기 플러그를 쥐고 그곳에 의지에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따라서 그의 가슴에 작용하고 있는 힘은 전혀 없었음에도 그의 가슴 근육이 갑자기 찢어져 버린다. 또, 만에 하나 그의 가슴 근육이 어떠한 이유에서 찢어졌다고 해도, 그는 손에 전기 플러그를 쥐고 그것에 의지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은 그가 손을 고의로 풀었기 때문이라는 의미가 된다.




많은 이들이 <쏘우> 시리즈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존 크레이머의 게임에는 철학이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죽음에 관해 깊이 있게 사유하며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설명했던 것과 같이, 그가 이야기한 것들은 모두 모순이며 자가당착에 빠져 있고, 간단한 논리로도 쉽게 무너지며, 그의 계획 또한 그가 의도한 것과는 반대로 진행된다. 철학은 이런 것들을 두고 논해지는 것이 아니다. <쏘우> 시리즈에는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늙은 범죄자의 망상만 가득할 뿐이다.

     게다가 영화 자체로 놓고 보아도 허점으로 범벅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 <쏘우> 시리즈다. 개연성을 무시하고 집중을 깨트리는 불협화음의 연속으로 완성되어 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제임스 완 감독이 연출한 1편은 그나마 준수한 수준이다. 1편은 독창적인 소재와 그것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작가주의적 색채, 그리고 이러한 결합을 끝까지 밀고 나아갈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적은 예산으로도 대중들에게 호평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제작된 8편의 작품은 이러한 호평의 이유를 오해했다. 1편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단지 '독창적인 소재' 하나로만 여기고 있다. 그 탓에 '독창적인 소재만 있다면 영화를 저예산으로 대충 만들어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식으로 제임스 완 감독의 작품 세계를 왜곡했다.

     심지어 마지막 9편에서는 주인공의 입에서 "직쏘는 경찰을 노리지 않았다"는 식의 이야기가 발화된다. 이전까지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이야기가 경찰과 형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음에도 말이다. 세계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 시리즈에는 작품을 잘 만들어 보아야겠다는 의지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제임스 완 감독이 창조한 독창적인 설정조차 그것만을 변화 없이 그대로 따라 하는 것에만 급급해 오히려 독창성을 완전히 말살시켜 버렸고, 여러 개의 짧은 쇼트가 짧은 시간 안에 교차되는 방식도 지나치게 반복하며 마치 그것 말고는 쇼트를 전환할 방법을 모른 것이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게 만들 정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