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첫딸을 얻은 아버지는.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길 간절히 소망했으나 아내는 집을 나가고 돈 없는 홀아비로 세 딸과 살게 되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우리 집 가정 파탄의 중요 원인 중 하나는 맺고 끊음을 잘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아버지의 성향과, 대체로 이것과 하나의 세트처럼 움직이는 경제적인 무능함에 있었다.
파산신청을 하기 위해 아버지와 나는 동네 지하철 출구 앞에 있는 작은 법무사무소를 찾아갔다. 네모진 금테 안경을 콧잔등에 걸친 법무사 아저씨가 우릴 맞이했다. 우리는 사무실 안 작은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60대에 진입한, 아마 치매가 시작되고 있던 아버지는 낯선 일을 혼자 처리하는 걸 불안해했다. 대학교 강의실 맨 앞자리를 선호하던 나는 강의 시간처럼 법무사 아저씨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받아 적으며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파산신청을 혼자 처리할 수 없게 된 아버지의 모습은, 그가 더는 빚더미를 이고 설 힘이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빚을 갚을 수 있는 어떠한 희망적인 방법 따윈 없었다. 아니, 유일한 방법 하나가 남아있었다. 로또당첨. 몇 년이라도 젊었을 때는 빚을 돌려 막기라도 했겠지만 더 이상 손 벌릴 곳이 없었다. 그동안 은행, 일하던 직장, 형제, 친구, 동네 세탁소 아줌마 등등 돈을 빌릴 수 있는 최대한 모든 곳에서 실로 다채롭게 돈을 빌렸다. 문제는 어느 시점을 넘어서면서부터 본인이 얼마를 빌렸고 얼마를 갚았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점차 빚을 갚아야 하는 곳이 분화되고 복잡해지며 수첩에 정리 가능한 범위를 넘어섰을게다. 아버지는 징그러운 빚 독촉에 못 이겼을 때 주먹구구 식으로 소량의 돈을 갚아나갈 뿐이었다.
아버지에게도 수금을 약속한 사람들은 있었다.
집 전화기로 텔레뱅킹을 연결해 돈이 들어왔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했지만, 욕설을 내뱉으며 전화기를 쾅 내려놓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누군가에게는 빚 독촉을 하고, 또 그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빚 독촉을 받는 아버지. 스피커 폰으로 들려오는 기대를 매번 저버리는 텔레뱅킹의 따박따박 냉정한 그 음성은, 어린 딸들의 귀에도 쟁쟁대며 달라붙었다.
어린 시절 내가 자기 전에 꼭 했던 기도는 빚 없이 적은 돈이라도 적금을 꼬박꼬박 부으며 살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왜 그랬는지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는 하지 못했다. 꽤 오랜 시간 해왔던 이 기도의 일부는 내가 직장에 들어가면서 이루어졌다. 내 명의로 된 적금 통장을 갖게 된 것이다.
동생과 내가 돈을 벌면서 형편은 좀 나아지는 듯했다. 월급으로 필요한 것들도 사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항정살도 깔끔한 셔츠도 사드렸다. 허름한 작은 다세대 주택은 겨울철이 되면 세탁기 배수관이 다 얼어붙어 불편하긴 했어도 그럭저럭 살만했다. 가난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가끔 가난을 잊는다. 그리고 깜박했던 가난은, 네가 날 잊고 살 수 있을 것 같냐고 외치는 복수심 충천한 전 애인처럼 등장한다.
꼬박꼬박 부은 적금을 아버지의 빚을 갚는데 써야 하는 상황이 닥쳐왔다. 파산신청이 허락되어 7천만 원 정도의 빚을 탕감받았는데, 그만큼의 빚이 또 남아있었다. 마음 약한 아버지가 파산신청을 올리지 못한 빚이 고스란히 자식들 몫이 되었다. 직장에서 아등바등 버텨내며 2-3년간 모은 2천만 원이 한순간 가볍게 이체되었다. 야근을 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며 나와 비슷한 또래의 동료들이 가진 명품 가방이 떠올랐다. 백화점 매대에서 산 오만 원짜리 내 가방도 꽤 쓸만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날 밤은 유독 그녀들과 가방이 짝을 지어 순차적으로 머릿속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출근하는 동료들에게 인사를 나눌 때도, 웃으며 같이 차를 마실 때도 내 가난은 숨죽인 채 주변을 살피고 있었기에 그녀들의 가방은 내게 생생했다.
억울한 마음이 증폭되며 나의 뇌는 친한 동료 선생님 차를 얻어 탔던 일도 기어코 소환해 냈다. 내가 차문을 벌컥 여는 바람에 앞 차문이 어딘가 찍혔나 보다. 승용차를 많이 타보지 않았던 나는 차가 그렇게 약한 줄 몰랐다. 문을 열 때 그만큼의 충격에도 차에 흠집이 나거나 찍힐 수 있다는 걸. 나중에 그 선생님이 농담 삼아 이 일을 거론했을 때야 깨달았다.
내가 고3 때, 우리 집에도 차가 있었던 적이 잠시 있었다.
아버지가 아는 분에게 구식 회색 소나타를 받아왔다. 그 차는 소독차처럼 흰 연기를 몹시 내뿜는 차였는데, 어찌나 연기가 심한지 주변 운전자들이 차에 불이 붙었나 걱정스레 우리 차를 살피곤 했다. 차를 몰고 도로로 나가면 다 우릴 쳐다봤다. 평생 차를 소유해 본 적이 없어 운전에 미숙한 아버지는, 그럼에도 거리가 먼 딸네의 고등학교까지 서툰 운전을 해서 날 데려다주곤 했다. 그리고 다음 해 차는 폐차되었다.
아버지의 차는 이것보단 덜했지만..
아버지는 딸들이 필요로 하는 건 어떻게든 마련해주려고 했다.
고3 때 내 성적으로는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후 아버지에게 수학 과외를 시켜달라고 했다. 반지하 우리 집에 서울대 과외선생님이 찾아왔다. 수업을 하던 과외 선생님과 우리 집을 들락거리던 쥐의 눈이 마주친 날엔 내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행히 1년간 과외를 받으며 내 성적이 많이 올랐고, 아버지 덕에 난 대학에 갈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 백수가 되어 2년간 임용고사에 매달렸을 때도 아버지는 창문이 있어서 다른 방보다 몇 만 원 비싼 고시원 방을 얻어주었다.
동생이 치매로 혼자 외출이 힘들어진 아버지를 동창회에 모시고 갔다. 동생을 빤히 쳐다보던 한 아주머니가 명함을 한 장 달라고 요청했다. 그 다음날 동생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아버지가 예전에 나한테 천만 원을 빌렸어. 그리고 몇 번 송금을 하더니 안 하더라고. 이후에 아버지가 치매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찌해야 하나 했어. 미안하지만 그 빚을 아무래도 딸들이 좀 갚아주면 좋겠어. 딸들이 돈을 벌잖아. 나도 상황이 힘들어서 말이야.”
아주머니는 아버지가 나를 공부시킨다며 돈을 빌렸다고 했다. 동생은 그 아주머니와 합의한 금액의 돈을 갚고 나서야 나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남긴 빚을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화가 치밀고 가난한 우리 집이 원망스러웠다. 빚에 매이게 된 내 처지가 서글펐다. 지금까지도 무능한 아버지가 답답하고 밉다. 하지만 아버지가 내게 남긴 기억들은 날 사랑했다는 걸, 딸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가 실패했을 뿐이란 걸 헤아리게 했다. 아버지라는 역할을 감당하고자 전전긍긍했던 초라한 사내. 그는 27년 동안 날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켰다. 날 사랑해서였다. 아버지가 태워준 소독차의 기억이, 과외의 추억이, 백수가 되어 언제 붙을지 모르는 시험에 매달리는 내게 포기하고 취업하라고 재촉하지 않고 날 믿어주었던 마음이 그 증거이다. 아버지도 분명 잘하고 싶었을 거다. 좋은 아빠, 능력 있는 아빠가 되고 싶어 노력했지만 미치지 못했다. 나도 내 인생에서 그러하듯이.
아버지는 빌려서라도 우릴 키웠다. 날 키우며 들어간 돈을, 내가 갚는 것뿐이라 생각을 하니 견딜 수 있었다. 그래서 나와 동생은 몇 년간 아버지의 빚을 갚을 때,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할 수 있었다.
*출처
대문사진
지갑사진 : 핀터레스트
소독차 사진
* 동생이 운영하는 유튜브 "아빠와 나" 구독과 좋아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