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의 무거움과 경쾌함
벌써 밤이다. 아버지와의 하루는 금세 지나간다. 일과를 마무리하고 아버지랑 같이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리모컨을 조작할 줄 모르는 아버지에겐 채널 선택권이 없다. 내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나 아버지의 반응을 살펴 관심도가 높은 채널을 틀어놓곤 한다. 오늘 밤에는 ‘스우파 2’다.
난 춤에 ㅊ도 모르지만 에너지 넘치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는 게 즐겁다. 혼신을 다한 역동적인 춤사위. 서로에 대한 견제와 리스펙, 스토리까지 흥미진진하다. 남편과 같이 스우파를 볼 때면 난 모니카 선생님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댄스에 대해 최선을 다해 품평을 하고 호불호를 밝히며 쉴 새 없이 떠들어댄다. 스우파 1 시즌 기간 동안에 남편에게 새로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재잘린'. 우린 프로그램을 함께 시청하다가 가끔 되지도 않는 댄스 배틀을 벌이기도 하고,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태명을 이번 시즌에서 제일 멋진 녀성인 커스틴으로 짓자고 약속했다.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다. 아버지는 텔레비전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대부분 화면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화면에 귀여운 존재들이 자주 등장하는, 아이들이나 동물이 나오는 것들 콩순이 같은 만화 정도이다. 최근에는 내가 스우파 2와 최강야구를 틀어놓는데, 눈을 잡아 끄는 장면들이 많아서인지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집중도가 높은 편이다.
스우파에서 격렬한 댄스를 추고 있는 댄서들을 보는 아버지의 반응은 대체로 “저런!”이다.
멋진 무브들을 보며 저 깊은 곳에서 잠들어있던 댄스 본능이 꿈틀댄다. 내 사지도 저처럼 움직여보고픈 충동이 인다. 슬몃 의자에서 일어나 텔레비전 옆에 섰다. 춥춥. 되지도 않는 춤을 춰본다. “아빠, 나 좀 봐봐.” 머쓱하게 웃어가며. 그녀들처럼 멋지게 흔들고 싶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아버지에게라도 웃음을 주면 됐다 싶었는데, 아버지가 나를 보고 한마디 한다. “하지 마.”
치매로 말을 잃었던 아버지가, 내 춤을 보고 말을 되찾았다. 치매 말기, 현재 아버지의 단계에서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을 골라 반응을 하게 된 점이 기쁜 마음이 들면서도 어쩐지 씁쓸하다. 만회하기 위해 다른 무브들을 선보였지만, 하지 마 한마디 던진 후 아버지는 더는 내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9월부터 다시 동생과 내가 아버지를 돌보게 되면서 고무적인 건 아버지의 말수가 늘었다는 점이다.
지난 저녁 식사시간에는 오랜만에 아버지가 내게 칭찬을 하기도 했다. 애매하게 밥이 남아있었는데 새로 밥을 하기가 귀찮아서 있는 밥을 조금씩 나누었다. 내 밥을 다 먹고 아무래도 부족해서 아버지 밥그릇에서 한 숟가락을 슬쩍해서 내 밥그릇에 옮겼다. 아버지가 이를 빤히 쳐다본다. 기분이 상했으려나, 혹시 화를 내는 건 아닐까 하는 찰나 “잘했어.”라는 말이 들려온다. 잘했어라는 말을 아버지가 하는 것도, 아버지께 칭찬 듣는 일도 상당히 오랜만의 일이다. 그것도 아버지의 밥을 뺏어먹고 듣는 칭찬이라니. 예전부터 나에게 많이 좀 먹어라 잔소리하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울컥했다. 정말이지, 치매는 머릿속 기억은 지워냈어도 가슴에 새겨진 기억마저 지우진 못하는 것이다.
나보다 무거운 아버지를 일으키느라 쑤셔대는 어깨 통증도, 기저귀를 교체하느라 잠들 수 없는 밤의 고단함도. 웃음 짓게, 글썽이게 하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로 이겨낼 힘을 얻는다. 동생과 나는 간병 교대를 하면서 꼭 하루동안 아버지가 웃음 짓게 한 이야기들을, 소소하게 나아진 아버지의 모습을 공유하곤 한다.
간병의 무게 안에서도 우릴 가볍게 하는 순간들을 되새기며 휘청휘청 버텨낸다. 간병도, 인생도 본래 그런 거니깐. 본래 무거운 것이잖아. 낑낑대는 그 무거움 속에 다행히도. 우연인지 필연인지 경쾌한 순간들이 존재하고, 이를 발견하고 서로 이야기하며 삶을 이어갈 힘을 내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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