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우리가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애쓰셨던 위인들을 만나기 위해 일본의 최남단 규슈에서 혼슈로 향했다. 억압에 숨을 쉬지 못했던 조국을 안타까워하던 윤동주 시인과 온몸을 던져 독립운동을 했던 안중근의사가 바로 혼슈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가장 먼저 찾아갔던 곳은 교토에 위치한 윤동주시인의 모교 도시샤대학이었다.
노을이 질 무렵에 도착한 도시샤대학에서 시비를 찾는 길을 헤매다가 지나가는 여학생에게 길을 물었다.
“혹시, 윤동주시비로 어떻게 찾아갈 수 있죠?”
해맑은 미소와 어설픈 영어로 친절하게 길을 설명해주던 그녀는 아마도 ‘윤동주’라는 이름만 듣고 낯선 이방인의 의도를 알아챈 것 같았다.
터벅터벅, 순식간에 찾아온 밤이 돼서야 겨우 찾은 그의 흔적은 참 반가웠다.
아주 작은 대한민국과 일본의 국기 그리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작은 수납함이 있었다. 괜한 호기심에 천천히 열어본 수납함에는 공책 몇 권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펼친 공책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계시구나.”라는 혼자만의 생각을 하게 만들어줬다. 머나먼 이곳까지 찾아온 여행자들이 남긴 편지들로 가득한 공책에서 그를 향한 동경과 존경 그리고 애정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과 달리 안중근 의사를 만나러 가는 길은 비교적 아주 험난했다. 방사능이 유출되는 후쿠시마를 거쳐 구리하라시까지 갔어야 한 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방사능위험지역으로 향한다는 게 남들에게는 미련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를 대면하고 싶은 욕심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후쿠시마역을 지나칠 때는 괜히 숨을 참는 바보 같은 짓을 하며 도착한 구리하라역은 한국의 어느 시골과도 다를 것 없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논과 밭 사이에 곱게 포장된 길을 30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대림사는 한적함이 맴도는 크지 않은 사찰이었다.
똑똑똑 거기 아무도 없나요?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아 사찰 주변을 서성이다가 인내심의 한계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정리정돈이 아주 잘된 사찰 내부의 구석에 위치한 재단에서 반가운 얼굴을 찾아볼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역사책에서 자주 보던 안중근의사였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안중근 의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낯익은 한 남자를 응시했다. 그의 이름은 지바 도시치.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간수로 복무하던 일본 헌병이었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대단한 인물로 평가되던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 의사를 증오했지만 언제나 겸손했던 그의 인품에 빠져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순국 직전에 지바 도시치에게 위국헌신군인본분(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유묵을 전하고 “동양에 평화가 찾아와 한일 우호가 살아났을 때, 다시 태어나 또 만나고 싶군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바 도시치는 일본으로 귀국한 뒤 유묵을 집안의 가보로 삼고 안중근의 명복을 비는 매일을 보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른 뒤 후손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 안 의사의 이념과 영정을 모실 수 있는 작은 사찰을 마련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대림사이다. ‘독립운동가와 간수’라는 다른 국적과 상황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존중이 109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대림사에서 빛나고 있다. 사찰에서 조용히 나와서 안 의사의 유필로 남긴 문구가 새겨진 2미터 높이의 비석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일본과 이어진 공존의 연결고리는 머나먼 이국의 땅에 남은 우리 위인들의 넋 덕분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