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국일보 <여성의 창> 기고 8
운전 중 눈을 비비다가 콘택트렌즈 한쪽이 떨어져 나갔다. 다른 쪽 눈에 남아 있던 콘택트렌즈로 세상을 마주하며 난시와 근시의 쌍방 공격을 막아내다 보니 내가 내 몸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무언가를 몸에 장착하고 있는 것이 실감 났다. 예전에는 그 이질감을 왜 못 느꼈을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감을 잡다’는 ‘느낌으로 알아차리거나 그것의 실마리를 찾는다’는 뜻을 갖는다. 이때 감의 한자어는 마음 심(心) 자와 다 함(咸) 자가 결합한 느낄 감(感) 자다. 한 마디로 ‘오감을 통해 모조리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콘택트렌즈를 착용하는 일상이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나의 일부인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에 다다랐었다. 그 사실은 나에게 꽤나 큰 충격이었다.
나는 서둘러 귀가하여 안경을 쓰고 뚜렷해진 시야를 확인했다. 그리곤 다른 감각들의 안녕도 살폈다. 귀도 쫑긋, 코도 킁킁, 입도 뻥긋, 그리고 손가락도 까딱. 온몸의 신경망을 타고 뇌로 전달되는 자극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나 곧 신문의 첫 장을 크게 장식한 생성 AI관련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명령문만 입력하면 결과물을 원하는 분량에 맞춰 생성해 주는 기술이 그 어떤 제어도 없이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고 한다. 이제 곧 AI 기술을 활용하는 일상이 너무 익숙한 나머지 나의 지식으로 습득한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AI 기술이 만들어 낸 ‘단절된 결과물’에 그 어떤 이질감도 느끼지 못한 채 말이다.
얼마 전 아들과 동네 마트에 가서 과일 코너를 찾았다. 아들은 ‘엄마 내가 맛있는 귤을 골라볼게’라고 말하며 코를 킁킁하고, 손가락으로 까딱 귤을 튕겨 보며 심사숙고의 시간을 가졌다. 최종 선택까지 시간은 좀 걸렸지만 아이가 직접 고른 귤은 보기에도 정말 탐스러워 보였다. 내가 아들에게 맛있는 귤을 맛보지 않고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묻자 아들은 ‘만져 보면 알지’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 나는 무척 흐뭇했다. 오감을 통해 습득한 지식은 온전히 개인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컴퓨터 명령어로 세상을 탐색하고 데이터로 대화하는 것이 더욱 익숙해질 미래에도 사람의 두 손으로 직접 고른 지식의 가치가 이어져 나가길 바란다. 아이가 골라온 맛있는 귤을 입에 넣으며 AI 시대에 감 잡는 기술을 겸하는 것이야 말로 변화하는 가치관이 초래할 이질감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고, 다양한 문제점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더 크게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