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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hlia Jun 28. 2020

담배 피는 여자

그녀의 '기호(嗜好)'일 뿐, 어떤 '기호(記號)'도 아닙니다.


# 등을 돌린 여자들


길을 걷다보면 큰길 골목길 할 것 없이 인도 한 켠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들이 자주 눈에 띈다.


아무리 간접흡연의 악영향이 대두되면서 흡연구역이 사라지고 흡연자들을 설 곳 없이 내몰고 있지만, 여전히, '길빵'하는 남자들을,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면서도 담배를 태우고 있는 아저씨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에 반해 골목의 아주 깊숙한 끝, 편의점 간판 아래 가장 귀퉁이, 주차된 차들의 일렬 속 키만큼 높은 SUV 뒤켠, 그곳에는, 여자들이 있다.


그녀들은 주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향해 정면을 바라보지 못한다.

언제든 사람들의 시선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 있게, 옆을 바라보고 서 있거나,

대개는 아예 등을 돌리고 서 있다.


그마저도 마치, 낯선 기척이라도 느껴지면 몸을 바짝 웅크리고 긴장하는 숲 속 초식동물처럼,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흠칫거리며 눈치를 살핀다. 


가능한 짧은 시간에 이 민망하고 눈치보이는 의식을 끝내고 싶은지, 가는 하얀 막대를 꽂아 든 손가락은 아주 바쁘게 입을 오간다.


행여 누군가의 불편한 시선을 마주하게 될까, 시선은 스마트폰에 박은 채로.




# 담배 피는 여자


나는 흡연자다.

인간 여자 흡연자다.


10대 때 호기심으로, '쎄 보이기' 위해 뭣도 모르고 손을 댄 담배는, 테이블마다 전화기가 놓인 카페에서 뭉텅이 연기를  뻐끔대는 '겉담배'를 거쳐, 대학교 시절, 아주 깊숙히 들이마셔 가늘고 곱게 뿜어내는 본격적인 흡연으로 발전됐다.


물론 지금은 '궐련형 전자담배'라고 칭하는 일종의 전자담배로 전향했지만, 흡연 경력을 치자면 20년이 넘었다.


중-고등학교는 여자가 절대적으로 많은 예술학교를 다녔고, 대학교는 여대(꼴페미의 집합으로 낙인 찍힌 그곳)에 진학했다.

당시에는 흡연자들이 지금처럼 '죽일놈' 취급을 받던 시절은 아니어서, 대학교 캠퍼스 안에서는 자유롭게 흡연할 수 있었다. 종종 캠퍼스 안에서 길빵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뉴욕으로 8개월 어학연수를 떠나 마음껏 흡연을 했고(부모님의 잔소리도 멀어졌겠다), 졸업 후 들어간 첫 직장에서는 '기자'라는 직군의 특성상, 흡연자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았던 남자 기자 선배들과 함께 담배를 피웠다. 당당하게.


두번째 직장에서는 이제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겠다, 야외 흡연실도 갖춰져 있겠다, 방송국답게 여성 흡연자 동지들도 많겠다, 전혀 거리낄 것 없이 피웠다.


남자친구는 당연히 담배를 피지 않으면 사귀지 않았다.(한 번 비흡연자가 있었는데, 담배 냄새를 집요하게 추적하며 끊으라고 어찌나 지랄을 해대던지, 그 놈을 끊어버렸다.)



# 담배는 기호(記號)가 아니라 기호(好)


아무리 내 본인이 당당한들, '담배피는 여자'를 곱지 않게 바라보는, 심지어 불편해하며, 하다 못해 자기 딸이나 며느리나 되는 양, 아니면 인류의 종속을 걱정이라도 하는 듯 "어디 여자가"를 시전하는 '남자'들을 마주한 적이 꽤 많았다.


술을 한창 부어대던 대학생~첫직장 시절에는 그런 시선이나 비난을 마주할 때마다 한껏 공격적인 눈빛을 쏘아올리며 맞받아쳤고, 그게 다행인지는 정말 모르겠지만, 일행인 '인간 남자'가 있었거나, 나의 대꾸에 손바닥을 치켜들며 짓밟겠다고 달려드는 남자는 없었기에 험한 일을 겪지는 않았다.


험한 일을 안겪고 살아서, 그래서 나는 여전히 당당하게 담배를 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길을 걷다가 잔뜩 움츠린 여자 흡연자들의 모습을 보게 되면, 짜증이 난다.


그녀들을 향한 짜증이 아닌, 그녀들을 그렇게 만드는 시선과 세상에.


여자가 담배를 피는 게, 등까지 돌려가며 벽에다 시선을 쳐박고 피워야 할만큼 지탄받을 이유가 뭐냐는 말이다.

자기 딸도 가족도 마누라도 뭣도 아닌 생판 남에게 '여자'이기 때문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이유가.



담배는 기호식품(品)이다. 

기호식품(嗜好食品) : 사람 몸에 필요한 영양소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독특한 향기나 맛 따위가 있어 즐기고 좋아하는 식품. 술, 담배, 차(茶), 커피 등이 있다. <고려대한국어사전>


'임신'과 '출산'을 해야하는 여성이기에, '태아'에 안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된 연구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에는, 남성의 흡연 역시 '임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정자의 퀄리티를 떨어트린다는 연구 결과도 많다.


여성을 '출산 도구' 수준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생겨나는, 임신과 출산, 태어난 아이의 건강상태가 철저히 여성의 책임이라는 그릇된 지식과 통념에서 만들어지는 요상한 고집이다.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굳이 여자가' 담배를 피워야 하느냐고 따지는 사람들이라면, '굳이 남자가' 담배를 피워야 할 까닭은 무엇인지, '기호식품'을 즐기는 데 성별 제약이 있어야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커피도, 차도, 담배와 마찬가지로 기호식품이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 기호식품을 즐기는 데에 성별을 따지지는 않는다.


어디 남자가 커피를 마셔!
(?????)


물론 백해무익하다고 알려진 담배에 비하면, 대중적으로 많은 인기를 얻는 커피와 차는 '영양소가 들어있는 것은 아닌 기호식품'임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효과와 가능성(심장병 예방, 다이어트 등)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살면서 담배라곤 한 번 입에 댄 적 없는 사람도 폐암에 걸리고, 평생 가족들을 먹이느라 주방에서 요리를 해낸 엄마들이 폐암에 걸리기도 한다지만, 금연이 흡연보다 건강에 좋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그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내 건강에 대한 책임도 나의 몫이며, 미래에 아이를 출산하기 위한 건강 관리도, 임신에 대한 나의 선택도, 그래서 흡연을 할지 금연을 할지, 모두 내가 결정할 일이다. 


그 선택과 결정에 대한 무게가 '여자여서' 다를 이유가 없는 문제다.


아이 계획이 있는 남성이 흡연 여성과 결혼을 할지 말지는 당사자인 한 명의 남성이 결정할 문제이며,

출산 계획을 세운 부부가 예비엄마의 흡연을 감안해 금연과 출산 시기를 조율하는 것도, 그들 부부가 결정할 문제다.


담배는 기호식품이다.

기호식품을 즐기는 여성이, 그 여성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뿌연 연기가,

조물주나, 신이나, 우주가 짊어준 '여성성'을 내버린, 

몰지각하고 저급한 여성임을 나타내는 '기호(記號)'는 아니다.


기호(記號) : 어떠한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쓰이는 부호, 문자, 표지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유의어] 마크(mark), 사인(sign), 심벌(symbol) <고려대한국어사전>





남혐 여혐과 비흡연자들의 비난이 두려워 궁시렁궁시렁 덧붙이는 추신


- 여자들 중에서도 당당하게 흡연하는 사람도 많아요. 그런 사례를 무시한 채 모든 여성 흡연자가 '불쌍한 초식동물'인 것처럼 예시를 들려한 것은 아니며, 흔하게 볼 수 있는 '숨어 피는 여자들', 그 여자들이 숨어 피울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생각한 글입니다.


- 나는 여자이고, 어떤 측면에서는 페미니즘을 추구하지만 무조건적인 '여성 우대'를 추구하는 일부 페미니즘은 반대합니다. 주로 뿌리깊은 사회적 성별 편견이나 섹슈얼리즘에 대한(이를테면 사회적 지위를 이용한 성희롱 등) 이슈에 분개하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섹슈얼리즘을 교묘하게 활용하며 사는 여성들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기에, 여성의 편만 들 수 없는 것도 현실입니다.


- 일상에서 최대한 흡연 가능구역을 지켜 담배를 피우며 비흡연자들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도 남의 담배 냄새는 맡기 싫으니까요. 특히나 기존 연초 담배는 정말이지 꿉꿉한 냄새가 옷이며, 머리며, 손에 끈적하게 눌어붙습니다. 


- (경고 주의 워닝 댄저) 흡연은 해롭습니다. 청소년기의 흡연은 더더욱 해롭습니다. 한 번 흡연하면 끊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시작을 하지 마시길 추천드립니다. 흡연은 해롭습니다. 정말 해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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