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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아니 Apr 08. 2020

인테리어의 이상과 현실

일상-그래도 괜찮아, 집이니까

새 집에 둥지를 튼 지 이제 네 달 정도 지났다. 지난해 연말, 아내를 비롯해 양가 온 가족들이 신기하게 둘러봤던 새 아파트는 어느덧 일상이 됐고, 매일 그 안에서 먹고 자고 마시고 싸고 놀면서 편안한 보금자리가 됐다. 


이사를 준비하면서, 그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새 집을 장만하면서, 아내와 나는 꿈이 있었다. 이사를 가고 집을 단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말이다. 우리만의 ‘언덕 위의 하얀집’을 만들어보고 싶은 욕구. 생전 치장이나 패션에는 관심이 없던 아내도 집 단장에는 놀랍게 본인의 생각을 명확히 표현했고, 원래 인테리어나 미술에 좀 흥미 있던 나는 또 나만의 ‘미니멀리즘!’을 주창했다. 대세는 미니멀이지! 하면서. 물론 그때 아기는 아직 걸음마도 못하던 때였고, 이 아기가 어떤 변수가 될지 아둔한 우리 부부는 알지 못했고.


-안방 침대는 좀 높았으면 좋겠어. 호텔처럼 말이지. 이불이랑 시트도 온통 하얗게.

-거실은 배색이 중요해. 컬러 톤을 통일하자. 소파만 포인트로 빨간색이나 파란색 어떨까?

-인테리어의 핵심은 역시 조명이지. 스타벅스 천장에 그 조명 그거 있잖아. 동그랗게 여기저기 박힌 LED. 그거 박자.

-주방 식탁등은 심플했으면 좋겠어.

-욕실에는 간접조명이 뭔가 고급져보이지.


이런, 지금 돌이켜보면 ‘씨잘데기 없는’ 대화에 마음이 솜사탕처럼 부풀었다. 혹 도움이 될까 싶어서 구글이나 네이버에 ‘아파트 인테리어’, ‘거실 인테리어’ 따위를 검색해서 사진도 돌려보고, 가끔은 백화점 가구매장 사이를 유모차를 밀며 누비기도 하고.


처음에는 깨끗하고 단정하고 밝아 보이는, ‘미니멀 거실’을 추구했다. 이런 거실 말이다.


구해줘 홈즈!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햇살이 나를 감쌀 것 같은, 새우깡 부스러기 따위는 절대 허락할 수 없는 거실 말이다. 


아니면 ‘나무’를 활용한 인테리어도 좋겠다 싶었다. 그 있지 않은가. 나무가 주는 안락함, 편안함, 약간의 고급짐. 웬지 집에 나무가 여기저기 많으면 아이와 가족 정서에도 좋을 것 같고, 집에 좀 생기가 돌 것 같기도 하고. 요런 요런 거실 말이다.


나무나무해


나중에는 깔끔보다는 유럽이나 미국식 거실은 어떨까 생각도 했다. 원래 여행을 좋아했고, 특히 유럽을 다니다보면 집 구조가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그 이국적인 느낌이란 일종의 로망이었다. 소파가 여기저기 있고 언제든 푹 눌러 앉아 편하게 책을 볼수도 있고. 왠지 한국 아닌 것 같은 그런 거실. 여행가서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거나, 미드를 보면 나오는, 셜록에서 오이비치 형님이 벽 여기저기 총을 난사해대던 그 거실 말이다. 웨스턴 스타일이지. 


저 소파에선 왠지 추리도 잘 될 것 같다


그로부터 약 반년이 지난 지금. 우리집 거실의 현실은 이렇다.


이게 바로 카오스와 리얼리티


옵션으로 붙은 TV는 결국 떼지 못했다. 좀 구식인 형광등 조명은 그대로 있고 천정 몇 곳에만 겨우 LED 등을 박았다. 


소파? 놓지 못했다. 지안이가 올라가서 떨어질까봐. 거실 전면 벽장? 짜지 못했다. 이사에 이런 저런 비용이 들고 세금도 내다보니 돈이 쪼달려서. TV 장식장도 놓지 못했다. 이지안 올라가서 떨어질까봐. 미니멀리즘? 그건 먹는 건가요. 거실에 이지안이 늘어놓는 장난감을 치우다 치우다 최근에는 반(半) 포기 중이다. 아내가 그랬다. “어차피 내일도 지안이는 그럴 거야, 하하하.” 화분은 정신없고, 아기가 잎을 잡아 뜯을까 베이비룸으로 대충 막아놨다. 이게 우리의 현실 거실 인테리어다.


가끔 이런 풍경을 보곤 우리 부부는 서로에서 묻는다. “여기 새집 맞아?” 애초 상상했던, 동경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풍경에서 우리는 지낸다. 엊그제는 한쪽 벽에 야채, 동물, 한글 등 갖가지가 그려진 포스터를 쭉 붙여놨는데 24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지안이 다 찢어버렸다. 내가 출근한 사이, 특유의 '꺅꺅' 새소리를 내면서 매우 즐거워하며 찢었다는, 아내의 전언이다. 


가끔 할머니(우리 어머니)가 와서 “우와 우리 지안이 열심히 놀았구나!” 감탄하며, 거실을 싹 치워주시지만, 그 할머니가 인천으로 돌아가고 나면 이지안은 다시 거실을 제 것으로 만든다. 그 성실함과 꾸준함이란.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이 인지부조화가 일어나는 거실에서 여전히 아내와 나는 가끔 꿈을 꾼다. 돈이 좀 모이면 한쪽 벽에 멋지게 원목 수납장을 짜자고. 아기가 크면 아름다운 소파를 놓자고. TV는 교육에 안 좋으니 안방으로 옮기고 거실은 긴 우드슬랩 테이블을 놔서 스타벅스로 만들자고. 저 촌스러운 형광등 조명은 다 떼버리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노란, 카페 조명으로 바꾸자고. 그 대화의 끝은 늘 ‘그땐 우리가 몇 살이 돼있을까’로 끝난다. 올해 내가 서른일곱, 아내가 서른 넷, 이지안이 이제 16개월, 지안이 동생은 올 가을에 나온다. 


아빠가 사십 중반 되면 가능할까, 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근하면 그 거실에서 나는 지안이와 뒹굴고, 아내는 지안이와 밥을 먹고, 지안이는 반찬과 밥알을 신나게 집어 던진다. 한쪽 벽에 웅크린, 바람 빠진 빈백은 부부가 그나마 몸을 뉘일 안식처이자 주말 밤 아기를 재운 뒤 넷플릭스를 시청할 수 있는 보금자리다. 미끄럼틀과 주방놀이와 장난감과 책, 그리고 과자 부스러기로 이미 거실의 삼분의 이를 아기에게 내줬지만, 걷다가 조그만 장난감과 블록을 밟아 ‘악!’ 소리를 지르기 일쑤지만, 이 거실에서 우리 세 가족, 잠재적 네 가족은 잘 지낸다. 그래도 아기가 어디 올라가서 떨어질 곳 없고, 날카로운 모서리 없고, 1층이라 방방방 뛰어다닐 수 있으니. 마음이 편하다.


여전히 우리는 ‘미니멀리즘 거실’을 동경하고, 늘 그 이야기를 하면 ‘언젠가’란 수식어가 붙지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뭔가, 아직 집이라는 공간에서 할 것들이 남아있고 바꾸고 싶은 것들이 있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여전히, 언젠가 우리 집 거실은 스타벅스가, 북카페가 될 거라 믿으면서 말이다. 


인테리어의 이상과 현실은 너무 멀고, 매일 일상의 집은 정신없지만 그 사이의 공백은 결국 가족과 사람이 채워간다. 집은 가구가 사는 곳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이고, 그 안의 콘텐츠도 일상, 이야기, 대화, 지나간 추억, 그런 것들이다. 거실을 볼 때 마다 아쉬운 것들이 있지만, 난장판인 거실 한 쪽에서 아내와 저녁에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며 그 공백을 메워나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흔적들, 우리의 동선과 이야기들이 이 거실을 꽉 채우고 있다고 오늘도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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