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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채원 Jan 30. 2024

연상 남편과 사는 마음

아재력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몇 살 차이까지 극복할 수 있을까? 결혼 전이나 지금이나 내 결론은 같다. 나이 차이가 사랑을 막을 수는 없을 거라는 것. 내가 한 번이라도 스무 살 연상이나 열 살 연하를 만나봤다면 조금 더 자신있는 어조로 '나이 차이는 사랑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하고 외칠 수 있을 텐데, 경험이 없어서 아쉽다. 나는 항상 위아래로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상대를 기다렸으나, 대체로 나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들만 만났다.


가장 나이 차이가 크게 났던 남친은 6살 연상이었다. 지금 우리 집 거실에서 아이들에게 우유를 따라주고 있는 그 남자, 바로 우리 남편이다. 전남친이자 현남편인 이 남자와 연애를 시작하고선 혼기 꽉 찬 남편의 나이가 신경 쓰여 결혼을 서두르긴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남친이 연상이라는 건 결혼을 결정할 때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결혼하고 나서야 남편의 나이가 신경 쓰일 거라는 걸 그땐 꿈에도 몰랐다.


내가 서른이 되던 날이 여전히 생생하다. 매년 꼬박꼬박 군말 없이 한 살씩 먹던 나였는데, 서른이 되는 그 한 살은 쓰디쓴 한약을 앞에 둔 어린아이처럼 두 손으로 입을 꼭 막고 버텼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 나는 그저 한낱 인간일 뿐이었다. 아무리 몸부림쳐봤자 서른이 되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억지로 끌려간 삼십 대에 겨우 적응 좀 하려는데 남편이 마흔이 됐다.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했다는 게 처음으로 실감 난 순간이었다. 나까지 사십 대가 된 것 같아 침울했는데, 진짜 사십 대가 된 남편 앞에서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애써 괜찮은 척까지 했으니 괴로움이 두 배였다.


이렇듯 나이에 민감한 나였는데, 요즘엔 약국에서 받아온 약 봉투에 적혀 있는 '김채원(만37세/여)'라는 글자를 볼 때는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화장을 아무리 공들여서 해도 예뻐지지 않을 때, '갱년기'같은 단어에 관심이 생길 때, 요즘 애들의 감성을 이해할 수 없을 때는 내가 나이 들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찬물처럼 끼얹어져 소름이 돋곤 한다. 그러고 보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틀린 것 같다. 나이는 숫라기 보다는 피부 상태나 갱년기, 공감대 같은 것과 더 가까운 것 같다. 특히 연상 남편과 같이 살다 보니 나도 6살은 더 많게 느껴진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연상 남편과 산다는 건 가까운 미래를 미리 보기 하는 기분이다.   


노화는 몸으로만 오지 않는다. 남편은 요즘 들어 부쩍 깜빡깜빡한다. 평소에 자주 쓰던 단어도 바로 생각이 안 나서 '그, 있잖아, 저기 뭐야, 그거..'하며 기억해 내려 애쓴다. '또 저러네.'하며 한숨을 푹 내 쉬고 대신 정답을 얘기해줄 때마다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함께 밀려온다. 아직 오십도 안 된 사람이 벌써 이러면 어쩌나 싶다가도 타들어 가는 내 속은 모르고 천하태평인 남편의 태도가 못마땅하다.


게다가 부장님이나 할 것 같은 아재 개그를 할 때면 무서울 지경이다. 오늘도 그랬다. 오랜만에 집중해서 글 좀 써보려고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남편에게 말했다.

"작가님 글 쓰실 거니까 일반인은 좀 나가주시죠?"

"저 일반인 아니고 이반인인데요."

(실제로 남편은 6학년 2반 담임이다.)


어제는 뭐라더라.

남편이 "초코우유 마실래? 바나나우유 마실래?" 이러길래

"바나나우유!" 했더니

"바나나우유는 없는데?" 하는 거다.

지금 뭐 하자는 거냐는 표정으로 한번 쳐다봤더니 냉장고에서 바나나우유를 꺼내주며 한마디 했다.

"바나나우유는 없지만 버내너우유는 있습니다. 촤하하!"


아재가 아재 개그 좀 할 수 있지 뭘 그런 거 가지고 무섭다고까지 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게 왜 무섭냐면, 내가 이 아재 개그에 매료되어 같이 웃어버렸기 때문이다. 남편은 10년 전에도 아재 개그 전문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나는 남편의 개그가 하나도 재미없었다. 그래도 성의가 있으니 억지로 '하하하' 웃어주며 넘기곤 했는데 이제는 진심으로 남편의 개그가 웃긴다. '일반인'과 '바나나우유' 에피소드를 봐서 알겠지만 남편 개그의 질이 높아진 건 아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내 아재력이 상승한 거다. 끔찍하다.


남편이 나에게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고 말할 때마다 삼십 대와 사십 대는 엄연히 다르다며 선을 그었는데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남편의 뒷모습이 안쓰러운 걸 보면 나도 같이 늙어가는 것 같다. 이제는 더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다. 부부 사이에 나이 차이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고. 빨강과 파랑을 섞으면 보라가 되는 것처럼 부부도 각자의 나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둘이 합쳐 새로운 무언가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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