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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Jan 29. 2024

아침마다 시를 낭송하는 마음

전혀 다른 아침이 온다


재작년부터 '미라클 모닝'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사람마다 생체 시계가 다르고 나는 아침잠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말은 바로 하자. 이불속에서 나오기를 싫어한다고. 그럼에도 자의든 타의든 새벽 4~5시에 꾸준히 일어나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존경했다. 공평하게 주어진 하루를 알뜰하게 쓸 수 있으니 말이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시간에 일어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자신만의 루틴을 지켜가는 그이들이 멋져 보였다.


새해부터 설정한 나의 기상 목표 시간은 오전 8시. 새벽 기상은 못해도 '모닝'에는 일어나야 한다는 결심이었다. 8시라니, 회사원이라면 이미 씻고 아침을 먹고 출근 버스 안에 앉아있는 그 시간(누군가는 이미 도착했겠고)이 나에게는 '미라클'인 것이다. 그렇다고 아주 늦게 잠드는 것도 아니다. 평소 밤 11시가 좀 넘으면 침대에 눕는다. 마치 오래된 배터리처럼, 나는 충전시간이 긴 사람이다.


그럼에도 새해이지 않은가. 오전 8시에 일어나기 위해 '기상 시스템'을 만들었다.


[2024 글밥의 미라클 모닝 기상 시스템]

1. 기상 알람을 끄자마자 바로 시집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간다. (이것만 해내면 90% 성공)

2. 옥상을 빙글빙글 돌면서 잠을 깨운다.

3. 시 3편을 낭송한다.


여행갈 때마다 독립서점에서 산 시집이 몇 권 되는데 다른 책들에 밀려서 손이 안 갔다. 매일 아침 시 한 두 편이라도 읽는 루틴을 만들면 저절로 읽겠구나 싶었다. 아침에 감성적인 시들을 충전하면 하루 종일 촉촉한 마음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되었다. 또 시를 소리 내어 읽으니 잠도 깰 테고, 여러모로 괜찮은 아이디어 아닌가.


1월 1일부터 바로 기상 미션을 시작했다. 옥상을 서너 바퀴 정도 돌면서 신선한 아침 공기를 폐 깊숙이 들이마셨다. 책꽂이에서 제목도 보지 않고 뽑아온 시집의 중간 페이지쯤을 열었다. 새해 첫 시는 어떤 시가 될까. 랜덤박스 포장을 풀 듯 두근거렸다. 시는 소리 내어 읽는 것이라고 박연준 시인에게 배웠다. 나는 잠겨있던 목구멍을 부드럽게 달래듯 깨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었다.



심해

                   박찬세


선생님 잔소리가 심해졌다


얘들아 물놀이 조심해라

차 조심해라

오토바이 타지 마라

공사장 근처 가지 마라

밤늦게 다니지 마라

자전거 탈 때 조심해라


숨쉬기가 힘들 정도다

선생님 말 듣는 게 싫다

가만히 있기 싫다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져

깊은 곳으로 깊은 곳으로

자꾸만 가라앉는 것 같다

창문을 깨고 나가고 싶다


2014년 4월 16일 이후부터다







마지막 문장에서 방심했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내 주변에서 호시탐탐 얼씬거리던 잠이 맹수를 만나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달아났다. 누구도 잊지 못할, 잊어서는 안 될 날짜였다. 그날의 아픔이, 새해 아침부터 나를 매섭게 할퀴었다. 모두가 희망을 노래하는 새해 아침에도 누군가의 고통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라도 하려는 듯.


시집 제목은 <검은 돌 숨비 소리>이다. 작년 가을 제주 여행 중 '풀무질'이라는 독립서점에서 샀다. 제주 4.3 사건 70주기를 추모하고자 신경림 시인을 비롯한 91명의 시인들이 쓴 시를 모은 책이다. 서재에 꽂아두고 한동안 잊고 있었다. 시집에는 4.3뿐만 아니라 세월호 참사 등 희생자들을 위한 시도 함께 실려있는 모양이었다.


다음 날에도 시집 랜덤뽑기는 계속됐다. 진은영 시인의 시를, 그다음에는 강혜빈, 기형도, 최승자를 차례로 읽었다. 시는 대체적으로 어두웠다. 나는 아침마다 촉촉한 감수성을 얻는 대신 누군가의 고통을 마주했다. 그렇게 낭송하다 보면 어느새 불그스름해지던 하늘에 달걀노른자처럼 선명한 태양이 떠올랐다. 희망처럼 찾아온 오늘이 고마웠다. 달콤하지 않아도, 낭만적이지 않아도 좋았다. 누군가의 아픔을 헤아리는 아침은 꽤 근사했다.


눈을 뜨자마자 따뜻한 이불속에서 나오기 싫어 SNS를 확인하고, 유튜브 숏츠를 넘겨보던 회피형 아침이 작년부로 종결됐다.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정보가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런 아침은 마지못해 시작하는 기분이었고 그래서 지긋지긋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제는 아니다. 달라진 나의 아침은 생의 의지로 출발다. 미안한 마음, 부끄러운 마음, 현재를 살라는 준엄한 고가 책장에 꽂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집을 더 채워 넣어야겠다.




새해에는 흘러가는 시간을 잠깐 멈추어 세워 나의 '일상을 살피는 마음'을 가지려고 합니다. 의미 없이 지나친 순간도 그러모으면 하루를 사는 비타민 한 줌이 될 거라 믿어요. 아무리 바빠도 매일 글 쓰는 작가 섯이 꾸려가는 공동매거진 <일상을 살피는 마음>을 구독하고 당신의 일상에도 영양 듬뿍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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