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엄마가 30년을 써온 냄비가 고장이 났다고 새로운 냄비를 사야겠다고 했다. 내 나이가 올해 31살이니 거의 나와 일생을 함께해온 냄비와의 안녕을 고하게 되었다.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당근마켓을 열었다. 엄마가 원하는 브랜드의 냄비가 있길래 찾아봤다. 찾아보니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에 바로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연락을 했고 구매를 하기로 했다. 판매자의 주소를 찾아보니 우리 집에서 5킬로 미터가 조금 넘는 거리에 있었다. 버스를 타면 30분. 걸어가면 1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였다. 버스를 타고 갈까 하다가 이참에 운동도 할 겸 걸어서 가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산책. 종종 가물에 콩 나듯 가끔 산책을 해왔지만 매일 같은 루트로만 다녔다. 오늘의 루트는 새로웠다. 강을 건너야 했고 이전에 했던 산책은 주로 밤에만 다녔다. 더군다나 작품에 들어가 촬영을 하게 되면 주로 주말에는 촬영이 잡혀있어 주말 정오에 밖을 나설 일이 잘 없다. 일요일 정오에 만나는 바깥 풍경은 색달랐다. 2년을 넘게 살아온 동네였지만 처음 걸어보는 길들이었다. 강변 옆에는 축구를 하는 사람들, 야구를 하는 유소년 선수들,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대로변 옆에 위치해있는 교회 앞에도 또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집에서 나와 얼마 가지 않아서 바로 이런 시설들이 있었다니 새로웠다.
혼자 걸어가는 데 역시나 음악이 빠질 수 없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Wouter hamel의 2007년도 앨범 ‘Hamel’은 봄에 듣기에 제격이다. 중저음의 목소리와 사뿐하고 경쾌한 사운드의 조화가 신이 난다. 특히 수록곡 중에 ‘breezy’와 ‘details’, 그리고 ‘ride the sunbeam’은 내리쬐는 햇살 아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 봄 냄새가 물씬 나는 공기와 비비드한 색감의 하늘은 세상 가장 우울한 사람이 봤어도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게 맑게 갠 날이었다.
길가에 얼굴을 활짝 내민 개나리, 수줍게 고개를 기웃거리는 벚꽃들은 선선하게 불어오는 봄바람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계속 걷다 보면 다리를 건너게 된다. 다리 밑에는 버드나무들이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아직은 노란 버드나무가 내가 듣던 음악의 반주와 박자를 맞춰서 흔들흔들 춤을 추고 있다. 옆에 흐르는 강물은 잔잔했고 햇빛에 반사된 윤슬의 리듬은 적당한 bpm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1시간 남짓 걸어간 길에서 마주친 찰나의 순간들이 너무나 소중히 눈에 찍힌다. 엄마의 심부름으로 예정에 없던 짧디짧은 여행길이었다. 덕분에 걷게 된 길거리는 마음의 풍요를 채워주었다. 틈이 있는 사람은 새로운 무언가를 채워 넣을 여유를 갖게 된다. 가뜩이나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에서 자주 이런 여유 한 방울에 목축이며 살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