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이라는 말은 남녀노소 통용되는 칭찬이다.
"와, 정말 젊어 보여요."
"진짜로요? 저는 저보다 어린 줄 알았어요."
누구나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나도 그랬다.
나는 동안이다.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는 편이다. 비결은 피부. 별다른 관리 없이 로션만으로 평생을 살았어도 여드름 한번 나본 적 없다.
여기에 둥그스런 얼굴 모양과 다소 가까이 배치된 두 눈까지, 동안의 필요조건을 갖춘 나다. 칠흑같이 까만 머리색까지 장착하면 금상첨화, '최강' 동안이 된다.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무턱대고 동안이라고 주장하는 말을 어찌 믿으랴. 사진은 공개 못해도 몇 가지 에피소드는 공개할 수 있다.
업무 상 알게 된 한 티르키예인은 본인의 나이가 훨씬 많다고 우기다가 내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며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보여줘도 되냐고 묻기도 했다. 그는 나보다 5살 어렸다.
3살 많은 지인과 미국의 한 자동차 매장을 방문했다. 그 지인이 화장실 간 사이 현지 매니저가 내게 물었다. "네 아버지는 뭐 하시는 분이니?"
외국인을 어떻게 믿겠냐고?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꽤 여러 번 비슷한 에피소를 겪었다.
사무실에서 화가 잔뜩 난 한 민원인은 "너는 아직 어려서 몰라."라고 물꼬를 튼 후 내게 거친 된소리를 쏟아낸 적이 있다. 민원인의 나이를 알고 있던 나는 "내가 네 인생선배야. 인마"라고 수차례 '속'으로 외쳤다.
그리고 나와 가장 가까운 두 명의 여성, 아내와 딸 모두 인정한다. 내가 동안이라고. 이 정도면 동안이 나만의 착각은 아닌 듯하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머리. 숱도 적어지긴 했지만 정작 문제는 흰머리다. 마흔 무렵부터 듬성듬성 나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분포 면적이 제법 넓어졌다.
그 무렵부터였다. "왕년에 나 동안이었어."라는 꼰대감이 충만한 나의 말에 도통 힘이 실리지 않은 시점이. 모두 이 망할 흰색의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동안, 몇 되지 않은 나의 자부심 중 하나였는데,,,'
'이대로 떠나보낼 수 없다.'
흰머리를 솎아서 조금이라도 '회춘'하고자 했지만, 그 솎을 머리숱조차 바닥을 드러내던 마흔두 살이 되던 해. 나는 처음으로 염색이라는 것을 했다.
현대 미용의 힘을 빌린다니 자존심 상하지만 그 시절의 '영광'을 되찾고 싶었다. 그리고 그 영광이 재현되었다. 염색 후 나의 모습은 순식간에 어려졌다. 그것도 꽤 많이.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사무실에 출근하니 모두 놀란다.
"팀장님 완전 젊어 보여요."
"오, 훨씬 낫네. 진작 염색하지."
한결같은 반응이다.
'으하하하, 그래 그랬지. 내가 그랬지. 내가 동안이었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꽃이 피면 이내 지고, 봄, 여름,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듯, 벼랑 끝에 달려 아슬아슬하게 몸통을 지탱하는 다 말라버린 나무뿌리처럼 내 동안을 위태롭게 지켜주던 칠흑같이 까만 머리는 어느덧 그 생명이 다해버렸다.
대략 3개월의 삶을 산 듯하다. 내 신체는 3개월 치 노쇄했지만, 내 머리는 3개월 이전으로 회귀했다.
주변의 반응은 너무나도 솔직했다. 특히 오랜만에 마주치는 직원들의 반응은 더 극적이다.
"아니, 그 사이 무슨 일 있었어? 왜 이리 흰머리가 늘었어?" 이런 반응은 평타 수준이다.
조만간 퇴직 예정이신 한 상관은 "흰머리가 너무 많아 몰라봤네."라고 말했다.
뭔가 한 단계 더 들어간 듯한 반응이다. 참고로 정보통에 의하면 이분의 머리는 원래 백발 수준이다.수십년 염색해오신 분이다.
여기에 더해 쐐기를 박는 직원도 있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리 늙었어?"
'눈물이 난다. 어떻게 되찾은 영광인데. 허무하다.'
다음 달 다시 염색하러 미장원에 방문했다. 정작 미장원 원장님은 내 흰머리가 보기 괜찮다며 염색을 말리셨다. 그것도 완고하게. 나는 다잡은 마음을 접고 커트만 하고 돌아왔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때, 반복되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결국 난 미장원 의자에 다시 앉았다.
"이번에는 꼭 해야 할 거 같아요."
그렇게 나는 약 3년간 염색을 반복했다. 대략 1년에 세 번 정도 한 듯하다.
그러다 문득 예전의 동안의 얼굴도, 흰머리가 난 지금의 모습도 오로지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흰머리를 굳이 감출 필요가 있을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 나이가 드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자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물론 염색하면 머리숱이 더 빠진다는 속설이 나의 결정을 정당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당당하게 염색을 안 한 지 2년 정도 흘렀다. 아직도 흰머리를 지적하는 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신경이 쓰이지는 않는다.
'아, 내가 내적으로 성장했구나.'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나 자신이 스스로 대견하다고 생각하던 순간, 전방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은 같은 회사 직원이다. 본지 몇 년은 지났지만 젊고 훤칠한 키 때문에 기억에 남는 직원이었다.
그가 내 옆을 스쳐지나간다. 이상하다. 뭔가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듯한 느낌이다.
그 젊은 직원의 머리가 하얗다. 나보다 더 하얗다.
하마터면 "무슨 일 있었어요? 왜 이리 흰머리가 많아요?"라고 할 뻔했다.
그렇다. 나는 내적으로 성장을 이룬 것이 아니다. 그저 한 단계 더 발전한 인간으로 스스로를 포장했을 뿐이다.
나도 내 흰머리를 지적했던 무리들 중 한명이었던 것이다.
짐짓 괜찮은 척 했지만 나이들어 보여도 된다는 용기가 아직 부족한 듯 하다.
흰머리가 자연스럽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내듯 내 마음도 그만큼 성숙해졌으면 좋겠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물론, 기적처럼 흰머리가 다시 까매지면 더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