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ike out not out.
스포츠를 참 좋아한다. 정해진 규칙 안에서 정정 당당하게 승부를 겨룬다는 점에서 내가 겪는 현실의 부조리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 국제 스포츠 이벤트가 있을 땐 잠을 설쳐가며 응원하고, 국내외 주요 프로 스포츠 일정은 시즌 시작 전에 미리 한 번 훑어보고 내 나름의 분석을 하기도 한다. 그 관심이 조금 과해서 스포츠 경영학을 공부하러 유학도 다녀왔는데 덕분에 커리어 패스(Career path)가 약간 꼬이긴 했지만, 오히려 채용 담당자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각설하고, 여느 한국 남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축구와 야구를 가장 좋아한다. 오늘은 야구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야구라는 스포츠가 가진 매력은 매우 다양하다. 야구는 타 스포츠 종목과 다르게 타고난 신체적 역량이 절대적이지 않다. 휴스턴 애스트로스(Houston Astros)를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호세 알투베는 168cm이고 기아 타이거즈의 작은 거인 김선빈은 165cm에 불과하지만 시즌 타격왕에 오른 선수이다. 신체적 불리함은 정교한 타격, 주루 및 수비 능력으로 충분히 커버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미국의 메이저리그에서도 체격적으로 열세인 많은 아시아 선수들이 사랑받기도 한다.
또 다른 야구의 매력은 예측을 벗어난 드라마틱한 상황이 주는 즐거움이다. KBO 리그는 현재 한 시즌에 팀당 144경기 총 720 경기가 열린다. 봄부터 가을까지 월요일과 비가 오는 날을 빼고 경기가 진행된다. 경기수가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많은 데이터들이 쌓인다. 최근 그 데이터들은 매우 정교하게 분석되고 활용된다. 이미 세이버메트릭스(Sabermetrics)며 스탯캐스트(Statcast) 같이 야구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위를 통계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데이터의 연구는 메이저리그뿐만 아니라 국내 프로야구에서도 볼 수 있다. (세이버메트릭스가 궁금하면 영화 '머니볼'을 꼭 보세요.) 이러한 분석은 선수 선발과 상황에 따른 작전, 그리고 승부 예측 등에 활용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러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나름 정확한 예측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도 대단하다는 것이다. 가장 쉬운 예로 타자의 타구 방향에 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수비 쉬프트(Shift)를 걸면 타자는 그 쉬프트 반대로 타격을 하거나 아예 빈 방향으로 번트를 대기도 한다. 쉼 없이 이어지는 수 싸움이 보는 이를 즐겁게 하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야구를 보다 보면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이 자주 나온다. 한 아웃카운트의 투 스트라이크 이후, 한 이닝의 투 아웃 이후, 한 게임의 9회 말 투 아웃 이후, 타석에 들어선 타자와 투구를 준비하는 투수는 어쩌면 승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마지막 공 하나에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한다. 그러한 긴장감 속에서 정말 다양한 상황이 발생하는데 그중 하나가 스트라이크 아웃 낫 아웃 (Strike out not out)이라는 상황이다.
흔히 '낫 아웃' 이라고도 하는데, 말 그대로 스트라이크 아웃이지만 아웃이 아닌 상황이다. 말장난 같지만, 1루가 비어있을 때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스트라이크로 아웃이 될 공을 포수가 포구하지 못했을 때 낫 아웃이라 한다. 재밌는 것은 포구가 안된 공을 포수가 잡아서 1루에 연결하기 전에 타자가 1루에 도달하면 세이프로 인정된다. 그래서 한 이닝에 4개의 아웃카운트를 챙기는 투수가 생기기도 한다. 보통 이러한 상황은 투수의 공이 바운드되는 상황에서 자주 발생하는데 유인구에 속아 헛스윙한 타자는 당연히 아웃이라는 생각에 좌절한다. 하지만 포구 실패로 낫 아웃이 되면 그 순간이 다시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아웃일 거라는 아쉬움에 하늘만 쳐다보다 뒤늦게 낫아웃임을 알아챘지만 이미 1루에 공 보다 먼저 도달할 수 없음을 알게 되어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선수는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그 상황에서 1루로 전력 질주해서 팀의 승부를 이어가기도 한다. 그 찰나의 순간은 승리를 향한 간절함으로 인해 절망에서 기회로 바뀐다. 간절함이 반드시 승리를 장담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미 끝난 승부를 이어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대학교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준비하던 때였다. 한 대기업의 면접날 아주 호기롭게 차를 몰고 강남으로 출발했다. 이미 전날에 코스와 시간을 체크해 놓았기 때문에 적당히 여유를 두고 면접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내가 정신 나간 판단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15분도 걸리지 않았다. 서울에서 중요한 일정을 앞두고 감히 차를 몰고 나간 그 대가는 정말 혹독했다. 길 한가운데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결국 난 가양동 어디쯤에 차를 버리고 지하철을 타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일단 한 손에 제출서류봉투 들고 가장 가까운 역으로 전속력으로 달렸다. 다행히 9호선 급행열차를 타고 신논현까지 갈 수 있었다. 거기부터 믿을 건 내 다리밖에 없었다. 무조건 앞만 보고 강남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강남역 근처의 면접장에 정시보다 약간 늦게 도착할 수 있었다. 인솔 선배가 면접자들을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기 직전에 반쯤 정신이 나간 채 뛰어 들어오는 나를 발견했다. 면접자임을 확인을 위해 내 이름을 물었을 때 그제야 안도감과 함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중요한 면접이라고 빼입은 정장은 이미 땀으로 범벅되어 있었고 다른 면접자들과 달리 행색은 단정 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지하철 게이트는 돈 내지 않고 뛰어넘었기 때문에 추가 요금이 발생했고 모르는 동네에 버리고 간 차는 나중에 위치가 기억이 나지 않아 한참만에 찾을 수 있었다.
사실 평소 내 성격대로라면 포기할 수도 있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함으로 붙잡은 면접은 나중에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낫 아웃이라 인식한 순간에 얻게 된 기회는 지금까지 내 경력에 큰 기반이 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야구 경기 하나에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있다고 한다. 타고난 불리함을 극복할 수 있는 종목 특성,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예측을 벗어나는 드라마틱한 상황들, 그리고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하는 긴장되는 순간들 그 모두 인생의 축소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