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의 갭이어를 마치며 회고록 시리즈 1탄
올해 상반기 드디어(아니 벌써), 2년짜리 인생의 자유이용권이 만료되었다. 놀이공원에서 팔짝팔짝 뛰놀던 꿈과 희망이 가득한 시절로 기억될 거다. 나는 퇴사 후 약 2년 동안 고정된 직장 없이 자유이용권으로 여러 놀이기구를 프리패스하며 살았다. 이걸 요즘은 갭이어라고 부르는 게 힙한 듯 하다.
갭이어(Gap year)란?
유럽, 미국에서 대학교 입학이나 취업 전 진로와 인생을 탐색하는 시간을 의미하는 말이다. 오바마의 딸 말리아가 하버드 합격한 후 갭이어를 선택하며, 평범한 알바를 한다고 했을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수능 끝나고 입학부터 취업까지 초고속 직진하는 대한민국에서는 갭이어가 뒤늦게 찾아오곤 한다. 대부분 다녀왔던 직장을 퇴사 후, 바로 이직하는 대신 몇 주에서 길게는 몇 년까지 휴식하며 일의 의미와 방향성을 돌아보고는 한다.
잠시 2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자면, 나는 회사 생활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퇴사를 결심했다. 충분히 많은 야근을 했고, 충분히 많은 번아웃을 견뎠고, 충분히 많은 식빵을 구웠고, 나를 희생하면서 다른 사람의 꿈을 이뤄주는 것도 충분히 했다.
딱히 가고 싶은 회사도 없었고, 언젠가 막연히 창업을 해보자는 마음만 있었다. 당시에 퇴사의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뭐든 어렵고 안된다고 하는 개발자와의 갈등도 컸다. 그게 한이 맺혀서, 야나두 코딩할 수 있어 하려고 인지과학(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언어+철학+컴퓨터를 융합한 학문) 대학원을 준비했다.
자율전공과 같은 학풍 덕분에 대학원 합격 후 이정표 없는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사회적 계약으로 채워지지 않은 시간은 대학교 휴학 이후 오랜만이었다. 그 사이에 나는 인생을 한번 막 살아보기로 했다. 목표와 계획을 즉흥적으로 정할 수 있는 삶. 망하더라도 (최소) 대학원 졸업장이라도 남아있겠지 하면서 말이다.
길게 생각하지 않고 눈 앞에 있는 옵션 중에 가장 재밌는 선택을 하면서 지내기로 했다. 그렇게 삶과 일을 왔다갔다 하면서, 밑그림도 없는 빈 도화지의 나를 채워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갭이어 첫 1년은 춤 바람난 프리랜서라는 혼종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먼저 춤바람 이야기. 직장인일 때 보통은 일요일 저녁부터 월요병 예방을 위해 업무를 깔짝거리고는 했다. 스윙댄스를 시작하고서는 일요일 밤 11시까지 만사 제쳐두고 춤을 추고 있었다. 사직서 제출 후 물 만났다는 듯이 따로 교습까지 받아가며 주 4일 평균 20시간 정도 춤을 췄다.
*여기서 주 20시간은 지금 역산을 해본 수치이다. 당시에는 내가 웬만한 프리랜싱 프로젝트 하나의 시간만큼 춤을 추고 있을 거라 생각을 못했다.
그러다 이내 춤을 압도할만큼 또 다른 재밌는 일이 찾아왔다. 스타트업에서 프리랜서로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찌보면 노동을 하고 있으니 이게 갭이어인가 싶긴하다. 하지만 이직처럼 재고 따지고 연봉 흥정할 필요 없이, 직군을 넘나드는 새로운 도전을 잔뜩했다는 차원에서 갭이어로 생각하기로 했다.
일과 춤을 오가는 갭이어 3개월 차, 내 인생에 가장 호시절의 기록이다. 나의 노예력이 쌓여서, 탁월해졌고, 그리고 자유를 즐길 수 있었다.
백수 때는 12시 넘어서까지 잘 잤는데 이제 아침에 눈이 저절로 떠진다.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의무감과 적당한 압박감으로. 그리고 이내 일을 하면서 즐겁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고백했다. 내가 정말 애정하고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해줬다.
"노예력이 쌓였기에 지금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기차가 지나온 역이었던거에요. 잘했어요. 탁월해졌으니 자유로울 수 있는거에요"
"지금껏 그래도 헛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반증 아니겠어? 원래 연애 오래하던애가 헤어지면 소개팅 많이 들어오거든. 쟨 연애하는거 보니까 괜찮더라 소문나서"
하지만 자유가 선사하던 호시절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무한의 자유 속에서, 아주 빠른 bpm의 음악을 틀어놓고, 중심도 없이 흐느적 거리는 스텝을 밟고 있었다. 아래 일기를 쓸 때 쯤에 나의 위기를 조금 더 빠르게 캐치했어야 했다.
즐겁지만 무거운 하루였다. 나를 오버 에스티메이트 했다. 하루만에 될 일이 생각보다 안 끝나고 꼬리에 꼬리의 호기심이 물고 늘어섰다.
평소였으면 내일 보고라서 밤샘을 했을텐데, 저녁에는 춤을 배우러 왔다. 아니 근데 왜이렇게 춤이 신나지. 스윙댄스의 리듬감을 안다기엔 너무 경솔하지만, 오늘 정말 신나게 춤을 췄다.
춤추면서 오랜만에 땀을 한바가지 흘렸다. 혼술을 하러 왔다. 그러더니만 금방 취했버렸다. 고민 질량보존의 법칙이라도 있나보다. 일 고민이 커지니, 이제 춤 진도 못따라가도 신경이 둔해지고 있다.
갭이어 6개월 즈음엔 애정하던 춤도 진작에 포기해야 했다. 프리랜서로서 리소스 상태를 확인하고 프로젝트를 받아야 하는데, 그러질 못한 것이다. 태스크를 하는데 얼만큼 시간이 걸리는지 간파하지도 못하고, 하루 걸릴 줄 알았던 일이 이틀삼일로 늘어지고는 했다. 결국 하루에 3시간을 자도 일을 다 못 쳐내는 순간이 발생했다.
여러 일을 동시에 해댔으니 단기적 수입은 짭짤했다. 하지만 장기적 신뢰를 놓치고 있었다. 결국 갭먼쓰 in 갭이어를 가지기로 했다. 페이드 프로젝트를 쉬면, 글을 쌓으면서 충실히 시간을 가질 줄 알았지만...
방에 한 가득 책을 쌓아놓고 널널한 시간을 보내도, 쓰고 싶었던 글을 다 써내지 못했다. 그 시기에 코로나까지 겹치면서, 나는 다시 회사를 들어가야 하나도 고민을 했다. 내가 과연 직장 없이 삶을 개척할 수 있는 깜냥이 있을까?
스윙댄스에서는 안무를 미리 짜지 않아도 파트너와 즉흥적으로 춤을 출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약 100여가지 안에서 패턴이 규칙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의 규칙을 바로 잡아야지, 이 즉흥적인 인생에서 무너지지 않고 리듬을 탈 수 있다.
도대체 나의 시간은 어디로 공중분해되고 있던걸까? 시간을 좀 집요하게 파보기로 했다. 나의 시간을 돈이라고 생각하고 '타임버지팅'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2020년은 유명한 시간관리 방법론들을 읽어보고, 나에게 적용해보기 시작했다.
내가 깨달은 주요한 레슨런 3가지를 소개한다.
시행착오 #01
계획을 빈번하게 바꾸는 것은 당연하다.
(= 계획대로 살아지는 것, 그거슨 인생이 아니다)
처음에는 구글 캘린더에 미팅 뿐만 아니라 태스크도 빡빡하게 작성해보았다. 하지만 구글 캘린더의 시간관리는 초등학생 방학 생활계획표 만큼이나 쓸모가 없었다(..) 처음엔 내가 요즘 그 화제의 여자 성인 ADHD을 의심하다, 이내 희망적인 글을 하나 발견했다.
1. 사람들은 계획을 짜기 시작하면 투두리스트를 종교처럼 고수하려고 한다. 하지만 투두리스트는 그저 월요일은 맑을 거라는 기상예보일 뿐이다. 막상 월요일에 맑을지, 비가 올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갑자기 비가 오면, 계획에 변주를 줘야 한다.
2.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는 것. 그게 인생이다. 계획이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데, 원래 계획을 집착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현실에 맞는 계획을 더 잘 배치해줘야 한다.
3. 투두리스트를 관리에는 실패라는 것은 없다. 그저 매순간 우선순위를 다시 결정할 뿐이다. 따라서 위클리 계획은 실시간으로 우선순위에 대한 의사결정을 빠르게 내릴 수 있도록 가이드 해줘야 한다.
시행착오 #02
시간의 트레이드 오프를 파악하라.
(= 허언증 진단을 받고 뼈를 맞자)
나에게는 허언증이 하나 있었다. 언젠가 전업 작가가 되서 글로 먹고 살고 싶다는 것. 정작 올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50% 이상의 시간을 컨설팅 프로젝트에 투자 했다. 평생을 다른 회사의 일을 더 잘 아는 척 해야하는 컨설턴트가 인생의 최종 목표인게 더 적절한 타임 포트폴리오였다.
한정된 시간을 어디다가 투자할지에 따라서 인생의 윤곽이 결정된다. 가끔은 우선순위의 재배치가 아니라,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결정을 하기도 한다. 결국 나는 컨설팅 일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글을 쓰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도록 조정했다.
트레이드 오프. 나라는 주식회사에서 어떤 업무에 더 힘을 실어줄 것인지. 이것도 저것도 밤을 새서라도 다 해내라고 하는 회사에서, 내가 왜 지쳤는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나 스스로 우선순위를 잘 결정내려주는 리더가 되기로 했다.
시행착오 #03 태스크도 숙성이 필요하다
(= 나의 능력을 과신하지 말지어다)
위클리 일정을 짜다보면 항상 월요일 화요일에 모든 것을 파워넘치게 해낼 거라고 과신하고는 한다. 태스크마다 목표와 현실을 비교해보니, 어느정도 업무 성격에 따라 태스크의 단위를 나누고 있다.
간단하게 끝낼 수 있는 일이라면 할일: 2분
다른 사람에게 받을 일은 커뮤니케이션: 1시간
여러 단계의 일이 필요한 것은 프로젝트: 3시간
당장 실행할 수 없는 일이라면 인큐베이팅: 6시간
시간관리의 중요성을 깨달으면서 현질을 해서 타임 트래킹을 해주는 어플을 사용해보기도 했다. 첨단 기술을 이용하여 나온 결과는 허무하게도 노션, 크롬 그리고 카카오톡 시간을 많이 쓴다는 것이었다. (나도 안다 알아..)
나라는 즉흥적 인간을 맞춰줄 소프트웨어는 없구나 싶어, 노션을 가지고 직접 툴을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1) 오픈 마인드인 당신, 언제든 변경을 계획하자.
일단 할일박스에 투두리스트를 쌓아두자. 모든 것을 다 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칸반 보드를 옮겨가며 나에게 더 중요한 일의 우선순위를 파악하고 순간적 의사결정을 높이는 능력을 가지자.
2) 꿈이 많은 당신, 태스크에 목표 라벨링을 붙이자.
내가 이루고 싶은 프로젝트를 나열하고, 마음의 우선순위에 따라 타임 버지팅을 해보자.
3) 이상주의자인 당신, 이상과 현실을 체크해보자.
내가 외치는 목표와 실제나의 행동의 우선순위 사이 간극을 느껴볼 수 있다. 그때 선택을 해보게 된다. 나는 이상을 조정할 건지. 현실을 조정할건지.
갭이어 1년차 경쾌하게 시작했지만 기본기가 부족해서 실패로 끝났다.
갭이어 2년차는 기본으로 돌아가 기초 리듬만 다시 익힌 한 해였다.
이제 갭이어 만 2년의 자유이용권이 마무리 되었다. 더이상 인생을 유예하지 말고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갈지 목표를 확고히 해야하는 시간이 왔다.
2년 전 퇴사 당일에 썼던 일기장을 들춰보았다.
삶의 우선순위를 떠올려 봤다. 스톡옵션을 포기하면서 회사를 나온 것은 후회하지 않겠다. 돈을 더 벌어도 나에게 안 맞는 옷을 버리자.
나이 들어가는 것은 많은 단점을 수반함에도 불구하고, 좋은 점을 들자면 내 인생의 우선순위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것일지도. 웃고, 울고, 화내고 어디에 할 것인지.
아무튼 봄밤은 좋고, 퇴사의 밤도 좋다
2년전 퇴사날처럼 인생의 우선순위를 생각해보았다. 처음에는 '야나두 창업' 같은 막연한 생각으로 붕붕 떠다녔다. 빈도화지에 나를 채우는 갭이어 2년이 지나고 나니, 분명 나에 대한 이해도가 선명해졌다. 아래는 2021년 상반기 갭이어를 마무리하며 써본 상상의 기록이다.
갭이어 기간 준비되지 않은채 공짜로 주어진 자유를, 이제 자유를 체계적으로 만들어보려고 한다. 사람들과 가장 먼저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 했을 때, 바로 1년을 몸소 알파테스트하면서 만든 시간관리 기법 '타임폴리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직업적 자유'를 위한 여러가지 콘텐츠를 구상하는 중에, 타임폴리오 챌린지를 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조금씩 자유를 만들어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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