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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여기록2) 과거의 나를 따라 걷다.

추억 #1. 기숙사

by 언제라도봄

일본에서 교환학생을 지낸 이후에도 도쿄에는 가끔 왔었다. 여행으로도 출장으로도 몇 번 왔었고 오면 교통이 편하고 지리에 익숙한 시부야에 숙소를 잡기도 했었다. 익숙한 타지를 몇 번이고 다시 밟았지만,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 있었다. 기숙사. 나에게는 추억의 장소이지만 남들에게는 정말 아무 별 볼 일 없는 외곽 주택가인 그곳에 가보자고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쩌면 학교보다 더 오랜 시간을 머물렀을 곳. 그곳으로 향해 본다.


도쿄 도심에서 좀 떨어진 그곳은 시부야역에서 덴엔토시센(田圓都市線: 전원도시선)을 타고 딱 10번째 역인 카지가야(梶が谷)역에 내려야 했다. 또 걸어서 약 15분 거리에 기숙사가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자전거로 다녀 5분 안팎이면 역에 닿을 수 있었지만 겨우 1년 지내면서 자전거를 사기도 부담스러웠다. 아니 사실 그건 공식적 핑계였고, 자전거를 타는 방법은 알지만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것이 매우 무서운 쫄보는 그 오르막 내리막을 자전거로 다닐 용기가 없었다. 그나저나 25년이나 지난 지금, 그때 다니던 그 길을 찾아갈 수 있을까?


시부야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맡기고 바로 역으로 향했다. 스크램블 교차로를 건너는데 백팩하나 메고 그 길을 걷는 느낌은 정말 25년 전의 어느 날인 듯했다. 하치코 동상을 지나 역을 두리번 거린다. 예전에 있던 길이 공사 중이고 다른 길은 새 역처럼 리노베이션이 되었다. 하긴 강산도 2번 반 더 변했을 시간이니 당연하다. 오래되어도 몸이 기억하는지 자연스레 옮겨지는 발걸음. 표지판이 제대로 가고 있다며 안심시켜 준다.


지하철 티켓을 구매하고 플랫폼에 선다. 변한 듯 변하지 않은 느낌이다. 일요일 낮시간이라 그런지 한산한 전차에 올라 빈자리에 앉았다. 시부야 역을 지나 이케지리오하시, 산겐자야, 코마자와다이가쿠.... 한 번도 내려서 구경도 해본 적도 없는 동네들이지만 25년 만에 듣는 반가운 역이름. 매일 두 번씩은 들었을 역 안내방송에 갑자기 마음이 일렁거렸다. 전원도시선이란 이름에 걸맞게 창밖풍경이 전원적이면서도 도시의 건물이 보이기도 한다. 풍경이 점차 도심에서 벗어날수록 시간도 현재를 벗어나는 느낌마저 들었다.


전철에서 본 풍경



금세 도착한 역. 작은 역이라 출구도 하나다. 개찰구를 나오자마자 보이는 풍경. 분명 역 앞이 어떠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는데 눈으로 보니 '맞다 맞아' 연발하게 된다. 구글맵을 켜고 가면 기숙사까지 금방 가겠지만 길을 잃더라도 기억을 더듬으며 가고 싶었다.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역에서 내려 오른쪽에 도큐스토어라는 제법 큰 슈퍼마켓이 하나 있고 그 길을 따라가다가 골목길을 돌아 돌아가야 했다는 것뿐이다.


하교할 때마다 참새방앗간처럼 드나들던 도큐스토어에 들어가 괜히 작은 물을 하나 사고 무작정 걸어본다. 큰길을 따라 걷는데 차도 건너편으로 보이는 오르막길. 차도와 인도가 구분이 없는 그 동네길을 보는 순간 갑자기 기억이 살아났다. 어슴푸레 기억이 날랑 말랑 하는데 길을 따라 걸으니 오래된 병원과 세탁소가 보인다. 확실했다. 저 병원도 한번 들른 적이 있었고, 세탁소도 한번 들렀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학생이었으니 드라이클리닝 할 일이 없었지만 친구 어머니가 선물해 주신 실크스카프에 은행이 묻어 큰 맘먹고 한번 들렀던 기억이 난다. 완전히 까맣게 잊어버린 줄만 알았던 기억들이 갑자기 선명해진 신기하고도 신비한 경험이었다. 하얗게 빛바랜 간판만이 긴 시간이 지났음을 말해주는 듯했다.

동네길. 하얗게 바랜 간판의 세탁소와 동네 놀이터
기숙사 건물과 주변 풍경

마치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처럼 기억저장소 구석 어딘가에 있지만, 있는지도 몰랐던 구슬을 건네받은 듯했다. 오래되었지만 깨끗하고 조용한 주택가, 시간마저 느긋하게 흐르는 듯한 그곳에서 잊고 지낸 구슬 몇 개를 만났다. 문득, 이렇게 꺼내보지 못하고 스러져가는 기억들이 얼마나 많을까 싶어 안타깝기도 하다.


그렇게 길을 따라, 아니 대학생이었던 과거의 나를 뒤따라 걸으며 기숙사에 도착했다. 대문까지 오르던 그 계단도 그대로다. 어느 대학의 국제 기숙사로 바뀌어 있었다. 들어가진 못하지만 밖에서 보면서 이런저런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문득 깨달았다. 이번 여행은 단순히 추억을 위한 여행이 아니라 마흔일곱 살의 내가 스물두 살의 나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는 걸 말이다.


낯선 듯 익숙한, 별거 없는 듯 별거 많은 작은 동네길을 서성이는 내 머리 위에 햇살이 쏟아진다. 그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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