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은 실패를 전제한다.
신분상승의 욕망과 실패의 하강, 끝없는 하강.
1.
다송(이선균 가족 아이)은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이다. 또한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다송의 트라우마는 지하실 남자(박명훈 배우)에 의해 발생한다. 지하실 남자는 박사장(이선균)집에 몰래 숨어서 박사장의 걸음에 맞춰 전등을 켜주는 보이지 않는 기생충이다. 지하실 남자에게 지극 정성을 다하는 가정부 문광이 있다. 지하실 남자는 무능하지만 가장으로서 권위를 지켜낸 인물이다. 지하실 남자는 지하실의 주인으로 문광이 먹여주는 젖을 먹고 산다. 젖을 먹는 행위는 유아기적 행동이다. 지하실 남자는 상징계에서 도망쳐 나온 상상계적 인물이며, 가장의 권위는 물론이고 능력까지 갖춘 집의 주인 박사장을 동경한다.
박사장은 유능하며 다정하고, 가장으로서 권위를 완벽하게 지켜낸 인물이다. 그러나 조금의 위선이 있다. 다송은 다정하고 권위적인, 이상적인 아버지의 공간 밑에 존재하는 추악한 아버지, 즉 지하실 남자와 조우한다. 아직 상징계로 들어가지 못한 아이는 아버지에게서 거세공포를 느끼는 한편 아버지와 자신의 동일시를 꿈꾼다. 그러나 동일시 대상의 추악한 모습, 위선으로 둘러싼 모습의 표상인 지하실 남자와의 조우는 다송의 정신적 성장에 큰 충격을 준다. 때문에 다송은 트라우마에 걸리고 ADHD 행동을 보이는 것이다.
마르크 샤갈의 그림을 떠오르게 하는 다송의 그림은 추상적이다. 추상화의 가장 큰 의미는 현실과 꿈, 환상을 구분하지 않고 보는 것에 있다. 또한 이것은 고대 구석기 시대 미술, 더불어 몇몇 원시 부족 미술의 특징이다. 다송의 모습은 원시 부족, 혹은 인디언이다. 즉, 다송의 그림은 자신의 환상인 아버지와 현실의 아버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것을 마술로 표현해내고 스스로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미술의 시작은 죽음이라는 두려움의 극복이다. 그래서 기정과 그림을 그리는 시간에는 다송이 가만히 있는 것이다. 트라우마가 극복되는 과정이라서.
박사장의 아내 연교(조여정)은 전형적으로 남편의 권위에 복종하는 아내의 모습이다. 연교는 집안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이 박사장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일을 처리한다. 이는 자신의 실수를 혹여나 박사장이 알게 되어서 자신이 쫓겨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나 집안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녀는 지하실 남자와 같은 기생충일 뿐이다. 그런 그녀 대신 집안의 일을 도맡아 하는 가정부 문광은 연교의 꿈이자 분신이다. 남근이 없어 남근을 우상하는 엘렉트라 콤플렉스에 빠진 여성으로서 가장 최고의 상황은 남근을 가진 것 같은 인물이 자신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때문에 지하실 남자가 아기처럼 젖을 먹으며 들러붙어 있는 문광이 연교의 환상이다. 연교가 문광의 실체를 모르는 것에는 관계가 없다. 연교의 눈에 문광은 자신의 가족에게 헌신하는 인물이다.
연교는 캠핑에서 돌아오며 새로운 가정부 충숙에게 라면을 끓여 놓으라고 한다. 이는 아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다송이 거부하자 박사장에게 권한다. 박사장 역시 거절하자 자신이 먹는다. 남근 만을 소원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동일시하는 딸 다혜는 역시 남성에게 집착한다. 그래서 기우(최우식)의 친구(박서준)에게 금세 사랑에 빠진다. 기우의 친구가 떠나고 난 후 남근이 있는 것 같은 인물 기우에게도 쉽게 빠지게 된다. 박사장의 가족 구성원은 모두가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이다.
다혜에게 나타난 새로운 남자 기우는 지하실 남자와 문광을 쫓아내고 이 집을 숙주로 삼을 새로운 기생충이다. 기우는 놀라운 번식력으로 기정과 기택, 충숙을 집 안으로 불러온다. 기우에게 있어서 트라우마는 가난이다. 집 앞에서 오줌을 싸며 자신에게 굴욕을 주는 인물에게 큰소리 한 번 내지 못하는 기우에게 가난은 떼어낼 수 없는 꼬리표이다. 때문에 기우는 신분상승이라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2.
기정은 기우와 마찬가지로 신분상승을 원한다. 고전적 여성성을 버리고 현시대에 걸맞는 신여성으로서 나아가고자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과장하며 거짓의 가면을 쓴다. 그러나 기정의 허세와 사기는 오히려 자신의 신분상승을 막는다. 비가 와 집이 물에 잠긴 날, 기정은 구정물이 솟구치는 변기 위에 앉아있다. 구정물은 기정의 가족과 같은 하층민의 존재이고, 이를 올라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은 역시 하층민 본인들이다. 구조적 모순을 탓하던 봉준호식 스토리가 개인의 문제를 짚은 최초의 장면이다.
기택은 무계획을 강조하며 무능하지만 가장의 권위와 무거운 남성성의 모습은 지키고 싶어한다. 이 모습은 기택의 말투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기택은 흔히 말하는 선비들의 언어를 사용한다. 자신의 모습과는 대비되는 모습을 통해 가장의 권위를 지키고자 하는 구시대적 아버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잠시나마 신분상승을 누렸던 박사장이 캠핑을 간 사이의 파티에서 기택은 충숙의 멱살을 잡는다. 자신을 깔보고 무시하던 아내, 가장의 권위를 끝없이 추락시키던 아내에게서 자신의 권위를 되찾아 오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모습이 꿈과 환상이라는 것을 아는 인물은 기택의 가족 4명 중 기택밖에 없다. 그래서 장난이라며 넘긴다.
기택은 박사장에게 동경심을 품어간다. 박사장의 모습에 대한 동경이 아니다. 박사장 옆에 존재하는 연교를 향한 동경이다. 가장의 권위가 확실하며 고독한 남성이자 자신만을 챙겨주는 아내 연교가 있는 것을 보고 기택은 욕망이 생기기 시작한다. 기택의 욕망은 박사장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이 곧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부자라서 착하다는 생각을 부숴버린 박사장과 연교의 기택을 향한 뒷담화를 테이블 밑에서 듣고 있던 기택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게서 큰 좌절감을 느낀다. 트라우마가 존재하지 않던 인물에게 생긴 욕망이 억압되고 트라우마가 생긴다. 이 트라우마를 키운 것은 다송의 기상이다. 마당에서 잠이 안 온다며 박사장과 연교를 깨운 다송의 움직임 때문에 기택은 바닥에 눌러 붙은 채 가만히 있는다. 밖에 있는 다송의 얼굴은 깨끗하지만, 집 안에 있던 기택의 발바닥은 더럽다. 어린애의 움직임에도 행동을 멈추는 굴욕적인 사태에서 기택의 트라우마는 더욱 커진다. <마더>에서 도준(원빈)의 트라우마를 발동시키는 기제가 ‘바보’였다면, 기택의 트라우마 기제는 ‘냄새’이다. 이 냄새는 가난의 냄새이다. 기택에게 트라우마는 가난이다.
지하실 남자는 박사장의 추악한 분신이기 때문에 기택의 동경 대상의 구멍이다. 기택이 꿈꾸는 올바른 상징계인 박사장의 집안에도 구멍이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된 기택은 지하실 남자라는 구멍을 영영 가둬버린다. 그러나 다송의 생일 번개 당일, 지하실 남자는 탈출해 박사장과 조우한다. 거기서 박사장은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보고 코를 막는다. 코를 막는 행위는 기택에게 하던 행위이다. 기택은 자신이 애써 숨겨준 동경하는 대상의 추악한 모습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박사장에게서 큰 배신감을 느낌과 동시에 가난이라는 트라우마가 기폭제역할을 하여 결국 박사장을 칼로 찌른다. 기택이 박사장을 찌르는 장면은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선사해준다. 프롤레타리아를 무시한 부르주아 계급을 향한 반항이자, 미국 우월 주의자들을 향한 분노이다.
3.
지하실 남자, 즉 박사장의 추악한 모습을 불러낸 인물은 기우이다. 기우는 신분 상승이라는 강한 욕망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기택은 이런 기우에게 무계획은 실패할 일이 없다고 말한다. 계획은 욕망하는 대상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래서 계획은 욕망으로 치환된다. 그런 기택에게 기우는 자신이 욕망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라 말한다. 욕망은 곧 기우의 친구가 준 수석이다. 수석은 가정에 재물을 가져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욕망이라는 실재의 상징계적 표상이 수석이고, 기우는 그것을 놓치지 못하는 것이다. 때문에 기우의 결말이 비극임은 정해져 있는 사실이다. 욕망은 실패를 전제한다.
이를 모르는 기우는 자신의 욕망을 들고 지하실로 향한다. 자신의 신분상승이라는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비밀을 알고 있는 지하실 남자와 문광을 확실히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욕망을 이루기 위한 쾌락, 주이상스의 본질은 자기파괴이다. 때문에 욕망을 이루러 간 기우는 오히려 죽을 위기에 처한다. 오히려 그의 몸부림이 상징계에 난 구멍을 확장한다. 지하실 남자는 기우가 낸 상징계의 구멍을 통해 세상에 나온 것이다. 기우는 자신의 실수로 아버지를 상상계로 가두며-죽이며- 자신의 가족을 죽게 만든다. 기우가 <기생충>의 주인공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기우는 욕망을 이루려다가 큰 고통이자 쾌락을 느껴 돌을 몸에서 떼어놓는다. 그러나 기우는 여전히 욕망을 놓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기우는 꿈을 꾼다. 신분상승에 성공해 결국 박사장의 집을 사는 꿈. 때문에 기우에게는 다시 욕망이 들러붙었다. 카메라는 다시 아래로 떨어지며 기우를 비춘다. 가장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의 상승을 꿈꾸지만 추락을 전제한 인물을 비추기 위해 카메라의 시선은 추락한다.
4.
트라우마와 욕망이론을 중심으로 인물의 위치와 성격, 그리고 행위들을 분석해보았으나, 이러한 어려운 분석 없이도 <기생충>은 주제파악이 쉽게 가능하다. 많은 이들이 말하고 있듯이 빈부격차를 풍자한 블랙코미디라 생각한다. 또한 신분상승을 노리는 인물들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넓은 곳으로 상승했다고 생각했으나, 더욱 넓은 공간을 지닌 자들이 다가오면 우리의 공간은 더더욱 좁고 어두워진다. 때문에 기택은 박사장의 집을 차지했다가 테이블 밑이라는 아주 좁고 어두운 공간으로 추락한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상징계로 들어서 욕망을 탐한 인물들에게 상상계로의 퇴각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 많은 계단을 내려와서 본래의 집으로 돌아와도 집은 이미 없어져 있는 상황인 것이다. 돌아갈 수 없다.
영화 내내 ‘상징적이다’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이것은 모든 인물들은 상징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상징 뒤의 실재를 보아야 한다. 내가 바라본 <기생충>이라는 환상 뒤에 존재하는 실재는 위와 같다. 물론 개인적인 견해이기에 틀린 부분이 많을 수도 있다. 내 글 역시 상징이기 때문에 실제로 봉준호가 ‘남근’, 혹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등의 고전 영화 비평 도구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분석을 한 이유는, 구조적인 언어의 기의를 제대로 담아낼 기표가 아직 존재치 않기 때문이다. 많은 영화광들이 고전 영화 비평 방식을 두고 반항심을 가진다. 이는 공격적인 프로이트식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탓이 크다. 기의를 보자. 상징 뒤 실재를 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