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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현 Nov 28. 2020

자기 혐오의 기반

<황야의 이리> - 헤르만 헤세

 “그의 생애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본보기였으며, 자기 증오는 지나친 이기심과 똑같아서 종국에는 끔찍한 고립과 절망을 낳을 뿐이라는 사실을 예시해 주는 것이었다.” - 21p

 열등감. 최근 내 머리를 잠식하고 있는 단어다. 나는 나 자신을 믿지 못하여 타인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타인의 말을 방패삼아 나를 실패로부터 보호했다. 이 다음은 타인을 믿지 못하게 되고 결국에는 고전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반 미치광이 상태가 되었다.

 주기적으로 황홀감과 우울감의 양극단을 여행하는 나를 중도의 상태로 붙잡는 유일은 소설이었다. 양 끝의 정중앙에 위치한 나를 이제 위로, 혹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이었다. 그래서 난, 황야의 이리를 독서대 위에 올렸다.


 “인간은 수백 개의 껍질로 된 양파이고, 수많은 실로 짜인 천이다.” - 86p


 퇴사 후, 진정한 나를 찾겠다며 회심 차게 가진 휴식기. 사실 두려웠다. 수년간 나를 괴롭혀온 타고난 기질에 대한 고뇌를 잠시 동안에, 그것도 막대한 스트레스를 함께 짊어진 지금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없었다. 이때, 헤르만 헤세가 내게 말한다. 타고난 기질 따위는 없다고. 나는 수많은 실로 짜인 천이었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어제의 결심이 오늘 바뀌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를 내 스스로가 부인하고 있었다.

 처음엔 광고, 이후엔 영화, 지금은 책이다. 이 꿈의 변모 과정이 모두 순차적으로 진행된 것이라 생각했으나, 착각이었다. 인간은 본래에 태어나길 여러 모습을 갖고 있을 뿐이고, 나는 나의 수많은 실 중 하나를 뽑아내어 들추어 보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부끄러움이 보인다. 늦음에서 오는 부끄러움. 두려움이 생긴다. 뒤쳐졌다는 두려움.


 “나는 정말이지 무척이나 살 궁리를 해왔습니다. 그게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목을 맨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닐 테지요. 그러나 산다는 건 훨씬, 훨씬 더 어려운 일이지요.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 122p


 두려움과 부끄러움은 사람의 발을 붙잡는다. 각각 다리 한 개씩을 맡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끔. 그때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멈추어 있는가? 빛이 앞으로 나아가듯, 모든 이들이 자신의 빛을 전방으로 내뿜어 내 살갗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있다. 나는 그렇게 피 흘리며 몸을 웅크린 채, 나를 더욱 절망 속으로 밀어 넣고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타인을 탓하기 시작한다. 

 삶이 내게만 가혹한 줄 알았으나, 헤르만 헤세도 고통 속에서 연명했다. 괴테, 톨스토이 그 위대한 사람들조차 삶 속에서 영원한 가치를 찾지 못해 절망 속을 헤엄쳤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우리 모두가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깨닫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아간다. 나아가기 위한 첫 번째 과정은 두 발을 꽉 잡고 있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떼어내는 일이다.


 “그러나 즐기기 전에 우선 다른 사람의 허락부터 받으려 한다면, 당신은 정말 불쌍한 바보예요.” - 159p


먼저 부끄러움. 부끄러움이란 내가 그들보다 무지하다는 자각에서 오는 패배감이다. 스스로가 부족하여 그들과 어울릴 수 없다는 피해의식이다. 그들과 함께 내가 동경해 마지않던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그들의 허락이 필요했던가? 나는 ‘정말 불쌍한 바보’였다. 내 스스로가 앎의 과정을 즐기지 못하고, 너무 늦었다는 핑계만 늘어 놓았다.


 “나는 연주자이지 학자가 아닙니다. 나는 음악에서 옳다 그르다 하는 것 따위가 조금이라도 어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음악에서는 옳은 판단이나, 취향, 교양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 “음악을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할러 씨.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음악을 한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내가 바하와 하이든의 전곡을 외고 있고, 그것에 대해 아주 뛰어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아무에게도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트럼펫을 잡고 경쾌한 쉬미곡을 불어대면, 이 쉬미곡이 훌륭하건 보잘것없건 상관없이. 사람들을 즐겁게 해줍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다리를 움직이고 피를 관류하는 거지요. 중요한 건 바로 이겁니다. 무도회에서 긴 휴식 시간이 끝나고 다시 음악이 시작될 때 사람들의 표정을 한번 보세요. 얼마나 눈빛이 반짝거리고, 다리가 실룩거리고,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하는지 말입니다. 내가 음악을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겁니다.” - 187p ~188p


 두 번째, 두려움. 두려움이란 내가 무지하여 그들에게서 부끄러운 패배감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자기혐오에서 오는 자신감 결여이다. 내 무지, 심지어 앎에도 벌어지는 실수가 두려워 나는 되려 아예 모른 척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집착하며 전혀 즐기지 못하고 있었다. 영화 공부를 하던 때, 만족함에도 평단의 평을 의식하여 스스로의 생각을 갉은 적이 있다. 직장 생활을 할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함에도 상사의 의견에 복종한 적도 있다. 이 모든 과오는, 세상을 같고 다름이 아닌 옳고 틀림으로 바라본, 진정으로 ‘틀린’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피하기 위해 두려움을 선행시켜 나 스스로를 이 자리에 박아버렸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제기랄, 인생은 왜 이리도 쓰디쓴 맛인가! 나는 거울 속의 하리에게 침을 뱉었다. 나는 그를 발로 걷어차서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 295p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통쾌한 구절이다. 나는 내 스스로를 옭아매던 나 자신에게 침을 뱉고 산산조각 냈다. 나를 진정으로 찾고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헤르만 헤세는 ‘유머’를 권한다. 이 세상에 진지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그저 즐기며 앞으로 나아감 자체를 행복으로 여겨선 안 됐던 걸까?

늘 웃기만 하던 ‘파블로’처럼 유머와 즐거움으로 무장한 채 현실을 살아간다면, 더 이상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나를 붙잡아 두진 못하겠지. 마지막으로 <황야의 이리>의 마지막 문장, 이 책의 핵심이자, 앞으로의 내 기조이며, 여러분의 기조가 되길 바라는 문장으로 글을 마친다.


 “인생이라는 유희의 수십만 개의 장기말이 모두 내 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충격 속에서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다시 한번 그 유희를 시작해 보고, 다시 한번 그 고통을 맛보고, 다시 한번 그 무의미 앞에서 전율하고, 다시 한번 더 내 마음속의 지옥을 이리저리 헤매고 싶었다. / 언젠가는 장기말 놀이를 더 잘할 수 있겠지. 언젠가는 웃음을 배우게 되겠지. 파블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차르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30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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