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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희 Jan 02. 2020

결초보은(結草報恩)


 글을 쓰기 위해 한 달여 만에 노트북을 펴고 책상 앞에 앉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2020년의 첫째 날 밤. 무겁지 않으면서도 추억하고픈 어떤 이야기를 꺼내볼까 한다.


 나에겐 시계 하나가 있다. 백화점 쇼윈도에서 우연히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 사각 프레임의 손목시계. 하지만 그 시계는 사회 초년생이 갖기에는 야속하게도 너무 비쌌다. 오며 가며 쇼윈도 건너편의 시계를 한 번씩 바라만 볼뿐 산다는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러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 당시로는 꽤 큰돈을 퇴직금으로 손에 쥐게 되었다. 그때, 태어나 처음으로 나를 위한 '사치'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시계를 손에 넣었다.


 처음에는 아까워서 끼지도 못했다. 함에 넣어두고 아침저녁으로 시계에게 문안만 올렸다. 구입 후 한 달이 되어서야 손목에 차게 되었는데 천군만마를 거느린 느낌이랄까. 그 이후 시계는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곤(젖을까봐 끼지 않음) 항상 내 왼쪽 손목에 자리하게 되었다. 마치 분신처럼.


 2012년 10월 6일 토요일

 나는 문제의 시계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외출 준비를 하며 알게 됐다. 그 전날과 전전날에도 시계를 안차고 출근하여 시계가 없어진 것도 몰랐다. 처음에는 '내가 얘를 어디에 뒀더라...?' 하는 호기로운 마음으로 찾기 시작했는데 좀처럼 보이지 않으니 점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약속 시간은 다 돼가는데 시계는 안 보이고... 나가야 할 시간이 다 되어 일단 찾기를 중단하고 집을 나서는데 온통 시계 생각뿐이라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그 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미친 듯이 집구석을 헤집고 다녔지만 시계는 종적을 감춘 채 버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에 두고 온건가? 아냐 10월 3일, 그래 개천절엔 분명 시계를 차고 나갔었어. 4일과 5일엔 안찼었고... 아니 찼었나???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가며 집구석을 뒤집다가 멈추고 또 생각에 생각. 이 짓을 반복하고 있으니 서서히 멘붕의 기미가... 아 이런 게 세미지옥이구나..ㅜㅜ 그러다 문득 10월 3일(개천절) 명동의 중식당에서 남자 친구(지금의 남편)와 저녁식사를 할 때 소스가 시계줄에 튈까봐(이 정도로 시계를 사랑했다. 소스 한 방울이 튀는 것을 용납 못할 정도로...) 시계를 옆 의자 위에 벗어놓고 냅킨으로 덮어뒀던 잔상이 순간 스쳐갔다. 하지만 테이블 위도 아닌 '의자 위' (젠장) 종업원이 미처 발견 못할 수 있는 곳인 데다 다음 손님이 앉으려다 발견한다면.....ㅜㅜ 이건 뭐 진짜 미추어버리겠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 시추에이션.


 2012년 10월 7일 일요일

 날이 밝자마자 중식당에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한 시간 있다 또 전화를 걸었다. 안 받았다. 또 한 시간 있다 전화했다. 안 받았다. 이렇게 늦은 시각까지 무한반복. 이게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흑흑


 2012년 10월 8일 월요일

 안타깝지만 잊어버려야지 어쩌겠어, 하는 마음을 먹어봤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잊혀? 뼈를 갈아 일하던 첫 직장 그만두고 뼈 값으로 받았던 퇴직금. 그 돈을 털어서 산 내 시계.... 오늘따라 앙상하니 더 추워 보이는 내 왼쪽 손목. 아 누굴 원망해 내 잘못인 것을.....ㅜㅜㅜㅜ 그러다 진짜 그냥, 죽은 아이 고추 만지는 심정으로 중식당에 다시 한번 전화를 걸어봤다. 아래는 대화의 재구성.


중식당 아저씨: 여보세요


  나: (힘없이) 사장님 혹은 지배인님 되시나요?


 중식당 아저씨: 네, 그렇습니다만..?


나: (더 힘없이) 저.. 저는.... 10월 3일 개천절 오후 8시경 그곳에서 식사를 한 사람인데요.. 제가.. 거기 의자에...


중식당 아저씨: 시계 말씀이신가요?



헉!!!!!!!!!!!!!!!!



나: (이미 미친년처럼 팔짝팔짝 뛰며) 시, 시, 시계! 저정말 거기 있나요? 지직접 보셨어요?


중식당 아저씨: (살짝 웃음 머금으며) 네, 안 그래도 전화하실 줄 알고 잘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나: (흐느끼며) 저전... 다 포기하고 있었는데ㅠㅠ 정말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퇴근하고 텨갈게요!!!!


 그 날 저녁, MING1956에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저녁을 먹고, 잃어버린 줄 알았던 소중한 시계와 해후하는 감격을 맛보았다. 얘야, 언니도 없는 그 차갑고 어두운 서랍 안에서 그간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니?ㅠㅠ 앞으론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을게.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명동에 있던 MING은 사라졌지만 나는 다른 지점의 MING을 이용하며 조용히 은혜를 갚고 있다. 그 시계는 시계줄을 바꿔가며 여전히 내 왼쪽 손목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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