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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희 Feb 04. 2020

글을 쓰는 이유

당신과 나의 이야기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부모님은 제주시 연동의 정원이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하셨다. 방 세 칸에 거실과 주방이 딸린 아담한 양옥이었다. 정원에는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많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의 모습만으로도 계절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봄이면 목련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나지막이 자리 잡은 철쭉이 울긋불긋 색감을 더했다. 꽃이 지고 푸릇푸릇한 초록 잎사귀들이 눈을 시원하게 해 줄 때쯤이면 여름이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밤이면 평상에 모깃불을 켜놓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잘 익은 수박을 잘라먹었다. 뒷마당에 우뚝 선 감나무의 감꽃이 흐드러지면 동생들과 감꽃을 주워 목걸이를 만들었다. 감꽃이 지면 나뭇가지가 밑으로 축 쳐 질정도로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


 아빠는 긴 장대를 들고 나무에 올라 익은 감을 따곤 하셨다. 가으내 다섯 식구 배불리 먹고 이웃들과 나누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넉넉했던 감나무. 손이 닿지 않는 감나무의 맨 꼭대기, 먹음직스럽게 익은 붉은 감들은 새들 차지였다.


 우리 집은 문턱이 높지 않은, 동네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엄마는 정이 많고 뭐든 나누기 좋아하셔서 우리 집에는 엄마 또래 아주머니들부터 일흔 넘은 할머님들까지 자주 놀러 오셨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다. 방에서 책을 읽다가도 인기척이 느껴지면 부엌에 볼일이 있는 척 슬그머니 나왔다. 집에 들른 손님들께 인사를 드리며 자연스럽게 그 곁에 자리 잡았다.


 추운 겨울, 일본에 따뜻한 '고다쓰'가 있다면 우리 집엔 포근한 '담요'가 있었다. 아주머니들은 담요에 다리를 쏙 집어 고 이야기 삼매경에 빠지곤 했다. 담요의 가운데에는 귤이 담긴 바구니가 놓였다. 엄마는 동서커피와 프리마, 백설 흰 설탕을 둘둘둘의 비율로 어 만든 '잔치 커피'를 대접했다.


 아주머니들은 찻잔을 손에 감아쥐고 맛난 커피보다 더 맛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놓으셨다.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방에 들어가거라"라는 엄마의 말씀이 떨어질까 조마조마해하며 오가는 얘기를 참 재밌게도 들었다.


 누구네 집 개가 새끼를 다섯 마리 낳아서 그중 세 마리를 팔았는데 사간 사람이 값을 너무 후려쳤다는 이야기.

 한라산 방향으로 가다 보면 삼계탕을 파는 작달막한 집이 있는데 거기 깍두기가 기가 막히게 맛있다는 이야기.

 배추를 서른 포기 사와 절였는데 남편이 뒤집는 걸 도와주지 않아 싸우고 말 안 한 지 일주일 됐다는 이야기.

 아무개 엄마가 곗돈을 들고 야반도주를 해서 지금 계원들 열댓 명 집에 줄초상이 나게 생겼다는 이야기.

 귤이 컨테이너에서 썩어나가도 주위에 절대 나누질 않는다는 인색한 과수원 댁 사모님의 이야기.


 주제, 대상, 연령 무관하게 거미줄 치듯 이어지는 '말잔치'는 그 어떤 드라마나 소설보다 흥미진진했다. 친구와 공기놀이하고 고무줄놀이하는 게 재밌어야 할 나이임에도 또래와 어울리는 것보다 아주머니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는 우리 삶 속에 녹아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기민함은 이 시절을 통해 학습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학창 시절은 고독했고 그리 즐겁지 않았다.

 20대는 도전과 약간의 성취, 시련으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결혼하고 나서는 오랜 기간 아이를 갖지 못해 마음앓이를 했다.

 겨우 아이를 가졌는데 여러 이슈가 생겨 출산과정도 녹록지 않았다.


 유쾌하고 호탕한 동시에 깐깐하고 예민한 나.

 잘 나가는 사람들의 잘난 이야기보다는 보통 사람들의 성장사에 더 마음이 가는 나.

 장삼이사(張三李四)의 평범한 삶을 면밀히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

 

 그런 나는 쌍둥이를 키우는 엄마이며 매달 수십 명의 학생에게 요리를 가르치는 선생이기도 하다. 매일을 분 단위로 쪼개 성실히 살아야 괜찮은 하루를 살았다 할 정도로 하루살이가 빠듯하다. 그럼에도 취침 시간을 줄여서라도 내가 집중하는 일이 있다. 읽기와 쓰기.


 읽는 것은 쓰는 것보다는 품이 덜 든다. 쓰기는 많은 생각을 담보로 하고, 시간과 공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 하지만 일상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생각들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몇 개의 플랫폼에 글로 기록하고 있다. 소소한 나의 이야기에 공감을 표하고 본인의 이야기를 나눠주는 독자들의 반응은 늘 감동으로 다가온다.


 나는 글로 밥을 벌어보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사람이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해서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짐을 내려놓고 나니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닌 내면의 목소리에 더 집중하는 글을 과거보다 더 즐겁게 쓰게 되었다.


 일로든 개인적인 삶으로든 부침이 있었다. 평안해 보이는 지금도 마음 한구석엔 나도 어쩌지 못하는 고뇌와 슬픔이 있다. 모두가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어릴 적 우리 집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아주머니들이나 지금의 우리들이나 화두의 모양이 조금 다를 뿐 본질은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삶은 대부분은 단조롭게, 때론 복잡다단하게, 어떤 날은 빠르게, 어느 날은 지지부진하게 나아갈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쓰고 있을 것이다. 생각을 글로 기록하며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들여다볼 것이다. 그 글들은 거창한 무언가가 아닌 아주 사소한 우리 주변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 당신과 나의 이야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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