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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식책 Aug 07. 2020

내 MBTI는 불안이야

당신의 베이스 감정은 무엇인가요?

  자고로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요, 특히 스스로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한 동물이다. 그렇기에 평생 끊임없이 나는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 한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탐구는 옛날 옛적부터 지금까지도 아주 핫한 주제로, 최근 유행하는 MBTI 검사 역시 이 궁금증의 연장선상이라 볼 수 있겠다. 네가지 알파벳으로 나의 성격 유형을 나타내는 MBTI 검사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취미, 특기, 취향, 관계 등으로 스스로를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들 중에 가장 나답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


   나는 채광이 좋고 바람이 부는 시원한 곳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뒤집어놓은 호리병 모양으로 예쁘게 주름잡힌 커튼을 좋아하며, 조용한 절에 있는 작은 석불상도, 고소한 스파게티도, 신뢰 담긴 따뜻한 눈빛도 아주 좋아한다. 나의 취미는 그림 그리기, 명상하기 등이며, 또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보내주는 귀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들은 내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찾고 만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나를 표현할 수 있는가?


  사람은 일생일대의 선택을 앞두면 오직 선택지와 스스로만 남게 된다. 예를 들면 결혼 상대를 고르거나 유학을 결정할 때, 내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선택을 할 때 우리는 오롯이 '나'에 집중하게 된다. 깊이 좌절하거나 희망을 가질때 역시 마찬가지이다. 앞서 말한 취향, 취미, 인연들은 나의 지지대는 될 수 있을 지언정 나 자신이 되지는 못한다. 한 번 뿐인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존재는 나여야만 하며, 그렇기에 가장 나다운 것은 나 스스로에게서 찾아야 한다.

  그 중 나를 크게 움직이는 요인은 바로 감정, 그 중에서도 불안이었다. 나는 쉽게 불안해하고, 작은 사건에서 최악의 결과를 상상하곤 한다. 그래서 고군분투하며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그것 때문에 일어섰다. 인생의 많은 순간에 마치 불안이 목덜미 뒤에 늘어선 그림자처럼 늘 따라다녔다. 그랬기에 고요함과 평화를 사랑했고, 안정을 주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나의 취향과 취미, 그리고 인간관계까지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라니! 요즘 언어로 말하자면, 내 성격 유형은 그 무엇도 아닌 불안 그 자체였던 것이다.

   미풍에도 습자지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부정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나는 아주 작은 것에 흔들리고 아주 작은 것에 넘어져본 덕에 잘 일어서는 법을 알게 되었고, 자주 흔들린 만큼 타인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쉽고 빠르게 안정을 찾는 방법을, 힘든 것을 털고 보다 나은 내가 되는 방법을, 나를 애정 어리게 지지해주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양날의 검처럼 나는 내 불안을 다루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다. 날뛰는 말처럼 다루기 힘든 이 감정을 알아채고, 내 베이스 감정이라고 인정하고, 다루게 되기까지 몇십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이렇게 자신의 베이스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감정에 기반해 많은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감정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냉혈한도 속내를 잘 들여다보면 동기가 감정인 경우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떤 감정을 주로 사용하는지 알고 있다는 것은 곧 행동의 베이스 캠프를 알고 있다는 것과 같다. 물론 그 감정에는 긍정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분노, 불안, 우울, 오만.. 부인하고 싶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내 안에 또아리를 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 내가 어떤 감정으로 도망치는지 깨닫고 인정한다면, 분명 시간이 흐른 후 그 감정을 길들이게 된다. 불안에 머리를 잡혀 평생 휘둘리며 살 것 같았던 나도 기어코 해냈으니 말이다.


   내 인생의 대부분은 불안이었다. 그러나 나는 불안 때문에 잘못 내렸던 결정과, 떠나보낸 인연과, 불안 때문에 흘렸던 눈물을 후회하지 않는다. 더욱이 불안과 더불어 살아온 시간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 감정과 과정, 결과까지도 나 자체였기 때문이다. 아직도 내 베이스 감정 때문에 힘들어하고 때론 일을 그르치기도 하지만, 뭐 어떠랴. 여태 흔들리면서도 별 탈 없이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해낼 것이다. 그리고 불안 때문에 선택하고 만든 취향과 관계는 나만의 특별한 궤도가 되어줄 것이다. 그래서 내 MBTI는 불안이며, 나는 그것을 희망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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