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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라일락 Jun 03. 2022

아빠는 TV를 켜고 잔다

아무도 없는 새벽 여러 소리들이 속삭일 때 

  늦게 퇴근한 날이면 둘 중 하나의 모습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아빠가 티브이를 보며 나를 기다리거나, 티브이를 킨 채 잠이 들어 있거나. 이렇게나 저렇게나 티브이 속에서는 무어라무어라 쉴 새 없이 떠들어 댄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티브이 속 볼륨에 내 귀청이 나갈 것 같다. 그만큼 소리가 높다. 그런데 티브이를 끄려고 아빠방에 조용히 들어가면 아빠는 자는 귀가 밝아 금방 눈을 뜬다. '보고 있으니까 끄지 마'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나는 분명 아빠의 눈꺼풀이 감기는 걸 보았는데 말이다. 


  꼭 예전에 엄마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도 내가 티브이를 끄려고 리모컨을 누르면 '보고 있으니까 끄지 마'라며 괜히 드라마 엔딩까지 꾸벅꾸벅 졸면서 다 보고 잤으니까. 퇴근 후 집안일까지 끝내 놓고 자투리 시간이 남으면 엄마만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티브이를 볼 때였다. 외할머니 수발도 다 끝난 시각, 모두가 고요하게 잠을 청하고 있을 때면 엄마는 의자에 앉아 수건을 개기도 하고 강아지를 쓰다듬기도 하며 티브이를 봤었다. 

  지금은 아빠의 행동에서 엄마의 모습이 겹쳐 보일 때가 많다. 아빠, 엄마 모두 확실한 건 뭐라도 들어야 잠이 온다는 것이다. 티브이 소리는 나와 아빠 사이에 어색한 공기를 풀어주는 동시에 아빠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친구이기도 하다. 아빠가 좋아하는 '세상에 이런 일이' '축구 프로그램' '격투기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다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요새 들어 아빠가 보는 TV 속 초두의 관심사는 가족 구성원이다. 저 사람은 왜 혼자 인터뷰하지? 저 사람 엄마는 없나? 결혼은 안 했나? 꼬리에 꼬리를 묻는 호구조사를 듣다 보면 나는 무 자르듯 대답을 한다. 내 목소리에는 날이 잔뜩 서 있다. '다 가족이 있겠지' 

아빠는 다시 아무 말 없이 티브이 속에 눈을 담근다. 


  육십 대 넘은 노부부가 서로를 의지하며 오일장에서 일하는 모습이 흘러나오고 있다. 서로를 위하는 모습의 인터뷰하는 소리에 아빠의 눈이 더 깊어진다. 나이가 들면 자연 속에서 살고 싶다던 아빠. TV 속 귀농한 노부부의 일상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본다. 그 눈빛에 부러움이 서려 있다. 푸른 휴양림 같은 시골에서 살고 싶다던 아빠의 목소리에는 살고 있는 장소보다는 함께 하는 사람이 부러운 걸 에둘러 표현하고 있었다.  

  안방에서 엄마는 매번 아빠의 고민을 들어주며 잔소리를 했었다. 어두컴컴한 밤, 티브이 소리 없이도 문밖으로 엄마 아빠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던 그 순간이 내 머릿속에 기억 남는다. 아빠가 원하는 소리는 시끌벅적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닐까. 아빠는 오늘도 TV를 킨 채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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