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으로 시작된 고백 우리의 생은 다시 이어졌다
4년 만에 만난 친구의 한마디는 예상 밖이었다.
“나 암이야”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얼어붙은 나는 대답했다.
“나도야”
둘 다 웃음이 터지며 오래된 두려움과 안도감이 뒤섞였다. 우린 서로를 이해했다.
“얼마나 힘들었겠어. 연락하지 그랬어.” 내가 말했다.
아파본 사람이 아픔을 이해할 수 있다고, 혼자 견뎠을 그녀가 안쓰러웠다. 처음에 그녀는 내가 너무 갑자기 연락 와서 결혼하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친구 Y와는 엄마 장례식 이후 처음 만났다. 장례식 후 감사 인사를 하며 밥이라도 한 끼 샀어야 하는데 상황이 받쳐주지 못했다. 엄마가 간 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안 좋은 일만 반복됐으니까.
나는 냉동 삼겹살을 뒤적이며 물었다. J랑은 계속 연락하고?라는 물음에 자주는 아니지만 Y와 J는 꾸준히 연락한다고 말했다. Y와 J 그리고 나. 우리 셋은 중학교 때부터 알던 사인데 사회에 나가며 자연스레 연락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내 자존심이 연락을 허락하지 않았다. J가 임용고시에 붙고, 결혼과 출산을 하며 더더욱 연락을 하기 힘들었다. 핑계일 수도 있지만 Y도 J도 좋은 대학, 직장을 다니는 모습에 스스로 위축됐다. 그들과 나를 비교하면 어딘가 내가 초라해 보였다.
계속 연락하고 싶었는데 내가 그럴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해서 피했다. 다 나만 빼고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서 내가 제일 실패한 사람 같아 스스로를 가뒀다. 일 년 후면 괜찮아지겠지, 이년 후면 괜찮아지겠지 희망을 품으며 달렸지만 내가 얻은 건 암과 희귀병이었다. 회사도 그만두고, 치료 중인 몸으로 예전처럼 활기찬 이야기를 나눌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Y를 만나니 시간만 흘렀을 뿐 친구도 나도 똑같았다. 몇 년 만에 만나도 편하고 농담을 주고받고 장난도 쳤다.
친구는 자궁내막암에 최근 자궁을 드러내는 수술을 했다. 하고 나니 시원섭섭하기도 하고 초기인데 너무 빠른 판단을 하지 않았나 살짝 후회된다고 말했다. 중학교 때 그녀의 모습과 지금의 성격이 전혀 변함이 없었다. 무뚝뚝한데 정이 많고, 필요한 말만 하는데 모른척하지는 않는 그녀의 성격. 우리 둘 다 호르몬의 노예여서일까, 어릴 때 보다 살은 쪘다. 서로 암 발견 이야기, 병원 이야기, 회사 이야기만 했는데도 시간이 엄청 흘렀다. 스스로 위축됐던 시간 때문에 힘들었다고 말하자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괜찮아 보여도 다들 고충은 있을 거야”
그녀가 말하길 피하고 숨다 보면 그걸 핑계로 평생 연락 못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병 얘기로 시작했지만, 결국 삶 얘기로 끝났다. 어디 사냐, 뭐 하냐, 주말에는 뭐 하냐 사실 내 일방적인 질문이었다. 중, 고등학교 때도 내가 열 마디 하면 Y는 두세 마디 정도로 시크하게 대답했다.
뜬금없고 꾸밈없던 중고등학생 때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의 모습처럼 추석 때 밥을 먹다 Y가 생각나 장난스러운 카톡을 보냈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느낀 것 중 하나. 사람들은 다들 잘 사는 줄 알지만 사실은 누구나 아픈 구석 하나쯤 품고 산다. 아픔의 이름이 암이든, 외로움이든, 같은 인간이다.
우리가 서로의 병명을 나누며 웃을 수 있었던 건 이미 많은 것을 잃어본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건강하다는 건 완벽하게 사는 게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를 잃지 않는 일이니까. 우리의 웃음은 잠깐이었지만 내 안에서 웃음이 오래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