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부지로 계속 오르는 종이값
물가가 고공행진 중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전쟁을 해 여러 자원이 부족해지고, 운반도 어려워져서 그렇다는데, 아마 내가 모르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월요일 아침,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데 지엽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엽사 과장님은 잊고 있었던 초심을 일깨워준 분이다. 과장님을 만나기 전에는 신간을 낼 때 인쇄소에서 종이까지 발주했다. 지엽사에서 직접 사는 것보다는 비싸지만 그 폭이 크지 않았다. 2천 부를 기준으로 했을 때 약 5만 원 안팎? 최대로 많이 잡아도 10만 원이 채 안 된다. 그 정도는 절약해도 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해 편하게 인쇄소에 종이까지 맡겨왔다.
"5만 원이면 얼마 안 되는 것 같지만 10년이 쌓인다고 생각하면 무시 못 합니다."
한참 어린 지엽사 과장의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내가 초심을 잃었구나. 모름지기 사업가는 작은 돈을 아낄 줄 알아야 한다고 배웠다. 출판사 규모를 남보란 듯 쑥쑥 키워놓은 것도 아니면서 몇 만 원을 우습게 아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아차 싶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엽사에 종이를 직접 주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지엽사와 거래를 한 후부터 종이값이 계속 올랐다. 작년 2021년만 해도 서너 번은 오른 것 같다. 인쇄소 차장님은 늘 "제지사는 단합이 아주 잘 된다. 사장들끼지 모여 골프 치면서 이번에는 몇 프로 올리자고 하면 다들 일사불란하게 올린다. 반면 인쇄소는 숫자가 많기도 하고 단합이 안 돼 단가를 올릴 수가 없다."며 불공정을 호소하곤 했다.
인쇄소의 사정을 들어보면 딱한 구석이 있다. 종이값은 올리면 다 같이 올리니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다. 종이를 안 쓰면 모를까, 쓰면 울며 겨자 먹기로 인상된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인쇄소는 올린다고 하면 난리가 난단다. 종이값이 올랐는데, 인쇄비까지 올리면 어쩌냐고. 그러고 보면 인쇄 단가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이런 상황인데, 얼마 전 지엽사 과장이 아침부터 전화를 했다. 그것도 월요일에. 출근을 하고 있는데 전화를 해서 종이값이 오른다는 비보를 전했다. 5월부터 15%가 오른다고. 15%란 말에 멘탈이 흔들렸다. 제지사들은 정말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며 매번 일방적인 인상 통보를 받는 게 빈정이 상했다. 지엽사는 제지사와 소비자를 연결해주고 수수료를 먹는 유통사이다. 지엽사 역시 제지사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을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고운 소리가 안 나갔다.
"너무 일방적인 횡포 아니에요? 해도 너무 하네요. 15%라니 장난해요?"
지엽사 과장은 워낙 원가가 많이 오르고, 수송비도 올랐다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지만 내 목소리는 더 날카로워졌다.
"그렇다 해도 어려운 상황에 고통을 나누려는 약간의 성의라도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무 힘도 없는 지엽사 과장에게 화풀이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별로 좋지도 않은 소식을 꼭 월요일 아침에 전한 지엽사 과장도 참 센스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월요일 아침은 피곤하기도 하지만 보람찬 일주일을 꿈꾸며 한 주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첫날이다. 그 첫날을 뒤통수를 때리는 비보를 들으며 시작하게 한 지엽사 과장이 괜히 미웠다.
상대적으로 인쇄소가 불쌍해졌다. 인쇄소에서 사용하는 잉크나 필름도 많이 올랐는데, 인쇄소는 인쇄 단가를 올리지 못한다. 인쇄소에 종이까지 발주하는 게 인쇄소에 큰 도움도 안 되지만 다시 원래대로 종이와 인쇄 모두 인쇄소에 맡겨버렸다.
참으로 소심한, 자기만족적인 저항이다. 인쇄소에 종이를 발주하면 종이값의 3% 정도를 수수료로 받는다. 일종의 관리비인데, 그 정도라도 인쇄소에 밀어주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인쇄소도 결국 제지사로부터 종이를 공급받으니 제지사는 아무 타격을 받지 않고 지엽사만 중간에서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니 속 좁은 자영업자의 치졸한 화풀이에 불과하다.
돌아보면 과연 나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 잘 모르겠다.
만약 지엽사 과장이 월요일 오후나 다음날 전화를 했다면 좀 달랐을까? 지금으로서는 하필이면 월요일 아침에 전화를 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말할 수 있지만 모르겠다. 작년 내내 종이값이 올라 피로도가 높은데, 또다시 15%씩이나 오른다니, 그 사실 자체에 화가 난 것일 수도 있다.
불가피한 상황은 최대한 빨리 받아들이는 게 상책이다. 하지만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상황 자체는 바꿀 수 없어도 분위기는 많이 다를 수 있다. 지금도 그런 교육을 받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사회 초년생일 때는 불편하고 예민한 내용을 거래처와 소통할 때는 점심시간 이후에 하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점심을 먹고 몸과 마음이 이완되어 있을 때 소통을 하면 상대방이 덜 예민하게 반응해 불편한 이야기도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엽사 과장은 빨리 비보를 전해 미리 대비하라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대비라는 게 별 건 아니다. 종이값이 오르기 전에 미리 사둘 수 있으면 사두는 것인데, 자금여력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월요일 아침부터 전할 이야기는 아니었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