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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즈유 Aug 18. 2022

시아버님의 선택?

노년의 절망. 가늠조차 어렵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이상해. 숨은 쉬시는데 의식이 없어. 빨리 와."

점심식사를 막 하려던 참이었다.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남편의 목소리만으로도 상황이 얼마나 위급한지 느껴졌다. 그렇게 떨리는 남편 목소리는 생전 처음 들은 것 같다.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불길한 생각이 사정없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90세가 넘은 어르신이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면 뇌졸중이나 심장마비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숨은 쉬신다면 뇌 쪽에 문제가 생겼을 확률이 높다. 뇌경색이라면 약물로 뚫을 수 있다. 하지만 뇌출혈이라면? 


혼자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가슴을 졸였다. 병원에 도착하니 응급실 앞에 가족들이 다 모여 있었다. 가는 동안 벌써 CT와 MRI를 찍었는데 뇌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한다. 혈압, 맥박수, 산소포화도 등 활력징후도 지극히 정상이라고. 

혼란스러웠다. 그럼 대체 아버님은 왜 의식을 잃으신 것인가. 의사는 뚜렷한 원인이 없으니 혹시 수면제를 드셨냐고 물었다. 수면제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수면제는 처방받아야만 구할 수 있는 약인데, 아버님이 혼자 병원을 찾아 처방받았을 리가 없다. 절대로. 그리고 수면제를 과다 복용할 아무런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얼마쯤 지나 남편이 아버님이 잠깐 의식을 회복했다고 전했다. 남편도 알아보았다고.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 아니라 마음이 놓이면서도 어떻게 의식이 돌아왔는지 궁금했다. 남편 왈. 약물중독을 해독하는 약물을 주사했더니 반응을 한 것이라고. 

더 혼란스러웠다. 분명 수면제나 다른 약물을 과다 복용하실 분은 아닌데, 해독제에 반응을 했다면 드셨다는 건가? 최근 기억력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혼자서 일상생활을 빈틈없이 하던 분인데, 수면제인 줄 모르고 드셨을 수도 있을까?  


응급실에 보호자가 한 사람밖에 들어갈 수가 없어 시동생이 남편 대신 아버님 곁을 지키기로 하고, 아버님 댁에 들렸다. 너무 황망하게 나와 집안이 너무 어지러우면 청소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아버님 댁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깔끔했다. 119가 왔을 때 급하게 모시느라 소파와 테이블이 약간 흐트러진 것 외에는 몇 시간 전 큰 소동이 있었던 현장 같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버님 댁은 고요했다. 함께 갔던 형님네 부부와 이곳저곳을 살피는데, 식탁 위에 무언가가 있었다. 한의원에서 받은 조그마한 약통이었다. 처음 보는 낯선 약통 밑에는 작은 메모지가 있었는데,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08:30

수면제 75


처음에는 이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가늠조차 어려웠다. 다시 보니 약통에도 '수면제 75'라고 쓰여 있다. 뚜껑을 열어보니 빈 비닐 약봉지가 나왔다. 약봉지에는 의사가 처방한 약 이름이 적혀있었다. 로라반정. 내가 알기론 졸피뎀 이전부터 수면제로 사용되었던 약이다. 약봉지에 약 이름과 돌아가신 시어머니 이름이 쓰여 있는 걸로 봐서는 어머니 생전에 처방받았던 약으로 추정되었다. 

치매였던 어머니를 요양원에서 모신 게 5년 정도 되고, 돌아가신 지 3년이 넘었으니 최소 집에 계셨던 8년 전에 처방받은 약들일 것이다. 그 약들을 지금껏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계셨단 말인가? 그리고 무슨 생각으로 그 약을 드셨단 말인가. 


남겨진 흔적으로는 아침 8시 30분에 드셨다는 건데, 나쁜 생각에 수면제를 드셨다면 왜 하필 아침일까? 보통 나쁜 생각을 하면 밤에 자기 전에 먹지 않나? 식탁 위에 커피잔과 약간의 커피가 남아있는 것을 보면 아침식사를 하고 커피까지 드신 것 같다. 아버님은 화분에 물을 주면 언제 물을 주었는지 메모지에 적어 화분에 놔두는데, 화분에는 그날의 날짜가 적힌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그 전날에는 방학 중이던 남편이 아버님과 점심식사를 했고, 주말에 코로나에 걸려 고생한 시누이 고기를 사주고 싶다며 한우고깃집을 예약하라고 하셨었다. 

무엇보다 아버님은 자식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분이다. 남한테 도움을 받거나 피해를 주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해 자식들에게조차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없었고, 사소한 돈 문제에도 철저하셨다. 그런 분이 자식들 생각 안 하고 약을 드셨을까???


의문은 커져만 갔다. 아버님 서재에 들어가 일기장을 찾았다. 혹시 무슨 단서라도 찾을까 싶어서. 아버님이 매일 짧게라도 하루의 일을 메모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최근에는 기억력이 너무 많이 떨어진다며 더 열심히 기록하셨다. 

일기장은 어렵지 않게 찾았다. 책상 위에 있었다. 서둘러 가장 최근 날짜의 메모를 보니 "세상으로부터 밀려난 느낌이다. 내가 다 주관하고 자식들을 아울러야 하는데 할 수가 없다. 내가 마음먹은 대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하루를 보내기가 너무 힘들다'라는 문구도 있었다. 그 외에도 군데군데 아버님의 외로움과 우울함을 짐작하게 하는 문구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어쩌면 아버님은 그동안 간신히 긴 시간을 견디고 계셨던 것 같다. 자식들이 일주일에 최소 3번 이상은 찾아뵙고,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가 일주일에 2번은 방문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혼자서 계셔야 하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지셨던 모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아버님이 약을 먹었는지 미스터리이다. 아버님이 깨어나셔야 알 수 있을 텐데, 남편은 '왜 약을 드셨는지' 물어보는 걸 주저했다. 아버님이 말하고 싶지 않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워낙 자존심이 강한 분이니 자식들이 아는 걸 좋아하지 않으실 것이고, 그렇다면 모르는 척해드리는 게 자식 된 도리가 아니냐는 것이다. 나는 자식들이 알고 있고, 그로 인해 소중한 분을 잃게 될까 봐 걱정하고 슬퍼했다는 것을 알려드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며칠 후 아버님이 깨어나셨다. 

그런데 왜 약을 드셨냐고 물어보느냐를 두고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충격 때문인지 아버님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가 섞여 있었다. 병원에서는 섬망이라고 하는데, 한동안 계속될 수 있다고 했다. 

당장은 다행이다란 생각도 든다. 힘들었던 기억과 시간은 잊고 좋은 기억만 남으면 덜 외로우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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