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8
과거, 하나의 개성적이고 독특한 각자마다의 정신 상태를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였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그러니까 각자가 속한 크고 작은 집단이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는데, 어떤 때는 불필요하게 지속하거나 개입하기 시작한 그때부터 우리는 정신에 끌려다니기 시작했다. 작년부터 우리가 자연스럽게 행하던 것들을 못하게 가로막히니 그 경향은 더 심해졌다.
나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그날그날 내 마음이 어떤지에 따라서 성과도, 말투도, 눈길도 휙휙 바뀌었던 것이다. 플라톤에게는 미안하지만, 마음이란 참으로 변덕스럽고 별 볼일 없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고로 오늘은 도대체 마음이 생각을 통해 우리를 조종하는 건지, 아니면 우리가 생각을 하며 마음과 기분을 '마음껏' 주물럭거리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누가 생각과 가치관과 정신상태를 뒤흔드는 건지 고민해 보자.
지금 이 글에서, 나는 '나'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해 '필자'를 대변하고 있다. 지극히 당연하고 충분히 합당한 서술 절차를 왜 자세히 말하냐고 되묻는다면, 나는 '이 모든 것이 데카르트의 공로이기 때문에'라고 답할 것이다. 데카르트가 우리 개개인의 가치를 올려 주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원어로는 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사람이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데카르트는 한 사람 한 사람, 유식한 말로 개별자가 생각의 주체라고 여겼다. 덕분에 인류는 인류 자신에게 눈을 돌리고, 생각의 힘이 각자에게 있음을 받아들이고, 세상의 주체로 상승할 자신감을 얻었다. 1인칭 소설의 서술 방식도 데카르트 덕분에 존재의 근거를 찾았으리라. 데카르트가 자신의 저서 '성찰'을 이전의 철학서들과 다르게 오늘날의 에세이 형식처럼 썼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반면, 플라톤은 마음(Mind)을 육체와는 다른 곳, 저 멀리에 있는 진실된 실체로 보았다. 바로 이데아의 개념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데아로 대변되는 절대 진리는 모두에게 그 신성하고 고귀한 잣대를 들이민다. 이는 '개별자'에 반대되는 '보편자'다. 플라톤의 저서 '파이돈'에 따르면 이데아는 우리 안에 있지 않고, 철학자가 아닌 우리들은 이데아를 절대 만나지 못한다. 그저 어렴풋이 일렁이는 환상을 보고 유추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 '개별자'는 생각의 주체도 아닐 뿐더러 제대로 된 생각도 하지 못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플라톤과 데카르트는 심신이원론 입장에서는 비슷한 길을 걷고 있지만 무엇을 중요시하느냐에서 갈라진다.
이제 현실로 돌아와 현대 과학의 관점도 살펴보자. 화학적 자극, 전기적 자극 등이 복잡하게 작용하여 뇌가 반응하고 그로써 무형의 생각이 완성된다는 게 과학의 해석이다.
그렇다면 생각의 주체는? 솔직히 말하자면 인간은 자극적인 무언가가 없으면 생각을 잘 하지 못한다. 점점 최악으로 치닫는 미디어 속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수준'이 하락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플라톤이나 데카르트와는 달리 '생각'을 그다지 고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생각을 일삼는다는 것은 무언인가. 보이지 않는 덩어리들이 퉁, 소리내고 통, 소리내며 부딪히고 쪼개지고 합쳐지는 물컹물컹함의 향연일 뿐이다. 생각들이 부지런히 세상을 활보하다가, 어느 순간 퍼즐 조각이 들어맞듯 자신의 모양대로 탁 하고 반응하는 생명체를 만나면 이끌리듯 결합해 인간의 명사 '생각'으로 거듭난다.
따라서, 내가 생각하는 'Thinking thing'은 생각 그 자체라고 데카르트와 플라톤에게 전하고 싶다. 이 글에서 '생각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지 않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