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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하는비비 Mar 11. 2021

나랑사랑 너랑사랑

칼럼 #7

1초만 눈을 감았다가 떠 보아도 수십만 개가 바뀌어 있는 요즘, 세상에서 단어의 원형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최근 마케팅계에서 화제가 된 '댕댕이'라는 신조어도 복잡한 터치스크린 속 자판의 배열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누리꾼들의 희생양이다. '멍멍이'를 입력하려면 천지인 UI를 기준으로 같은 버튼을 연달아 두 번 누르거나 한 칸 건너가는 버튼을 다섯 번이나 눌러야 하지만 '댕댕이'는 건너가는 버튼 한 번이면 충분하다. 편리함 때문에 어디를 돌아봐도 이와 같은 한국판 *Newspeak*가 범람하고 있다.

우리네 감각은 변하는 것에 주목하긴 쉬워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그리하여 이번만이라도 안면에 기를 잔뜩 끌어모은 채 눈동자를 고정시키기로 하자.


그 일은 며칠 전에 일어났다. 그날도 십몇 평의 좁은 공간에서 갇히다시피 한 나날을 보내던 엄마가 유난히 크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필 그때 나는 내 목마른 두뇌에 드로잉이라는 물동이를 부어 주고 있었던 참이었다. 내가 지금 투칸을 그리고 있는 건지 저 노랫가락을 그리고 있는 건지 슬슬 헷갈려질 때쯤, 결국 뭐라고 외치는 방법밖에 해방의 길이 보이지 않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간, 불현듯 떠오른 운율의 힘에 그만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현대인의 일상 속에서 형태가 변하나 의미는 변하지 않는 단어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자신이 즐겨 입던 옷을 주섬주섬 꿰어 입고 늘 있던 곳에서 편안히 주위의 기류를 느끼는 단어를 찾기란 꽤 까다롭다. 똑같은 '떡볶이'여도 오늘날의 떡볶이 접시에는 감자당면이나 닭발이 들어 있을 수 있다. 같아 보이는 '칭찬'도 내뱉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아리송해진다. 그런데 바로 그날, 한국이라는 작은 우물 한가운데에 우뚝 선 트로트 가락이 집안에 메아리치던 날, 내 머릿속에 결심보다 더 올곧고 우정보다 더 한결같은 단어가 떠오른 것이다.


불변의 주인공은 바로 '사랑'이었다. 이 단어는 여러모로 완벽하다. 첫째, 천지인 자판 기준 여섯 번, 쿼티 키보드 기준 다섯 번만 손가락을 놀리면 될 정도로 커뮤니케이션의 편리함을 자랑한다. 게다가 오른쪽으로 치우쳐져 있어 다수의 오른손잡이들에게 만족감을 선사한다. 왼손잡이의 기분이 다소 언짢을 수 있지만, 이 단어를 마음속으로 느끼고, 이 단어를 바라보고, 이 단어를 말하거나 입력하는 순간의 기분은 그다지 나쁜 상태가 아니므로 은근슬쩍 넘어갈 수 있으리라.


둘째, 다른 자모음의 형태로 대체할 수 없는 완벽한 조합을 지닌다. 앞서 말한 '댕댕이'도 그렇고 '고먐미', '은팡동'처럼 슬쩍 보기만 해도 눈동자가 욱신거리는 신조어들이 많다. 그들 속에서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단어에 든 느낌을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모두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사랑'이 아닌 다른 단어로 사랑을 표현하려면 상당히 낯설다. 화자가 자신의 어두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랑'을 내뱉어도 청자는 그 즉시 거부감을 보일 수 있다. 그만큼 그 역할에 충실하며 변화의 요소는 철저히 배척하는 어휘가 어디 있으랴.


어렸을 적 아끼는 사람들에게 자주 한 말을 떠올리면 마지막 근거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나랑 놀이터 갈래?'부터 '나랑 학원 같이 다니자!'까지, 상황과 상대는 다양하다. '사랑'은 다른 단어들과 부드럽고 즐거운 운율을 형성하기에 애용되어 마땅한 단어다. '~랑'으로 끝나서 자연스럽게 혀를 굴리는 그 느낌을 온몸에 전한다. 발음이 어렵거나 생긴 것이 복잡하지도 않다. 두 음절, 그것으로 됐다. 간결하고 상큼하게 본분을 다하고 나머지는 다른 단어들의 손에 맡기는 그 아름다운 뒷모습.


그날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콧노래로 사랑을 논하는 가족에게 더 이상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수능 금지곡마냥 귓가에 메아리쳐도 '사랑'마저 우리 곁을 떠나면 이 우물 속은 그야말로 가뭄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발장단에 맞춰 함께 리듬을 느끼며 팬데믹을 견뎌내 보자. 아, 춤에 재능이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은 눈, 코, 또는 입으로 다같이, 나랑 너랑 촐랑촐랑 사랑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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