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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tryd Sep 14. 2021

감정 상장(上場)

진정한 선진국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

상장(上場)
「명사」 『경제』 주식이나 어떤 물건을 매매 대상으로 하기 위하여 해당 거래소에 일정한 자격이나 조건을 갖춘 거래 물건으로서 등록하는 일.


스마트폰 시대에 접어들며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바로 머리맡에 휴대폰을 놓아두고 눈이 번쩍 떠질 때마다 '꿈노트'를 작성하는 것이다. 많게는 일주일에 두 번, 적게는 한 달에 한 번, 내게 영감을 주는 꿈이거나 인상 깊은 꿈을 적는다. 나는 꿈속에서 영화, 드라마, 소설, 그래픽 노블 아이디어를 얻고 서비스디자인 아이디어도 떠올린다. 꿈은 내게 제2의 현실이자 또 다른 소통의 장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으로 손을 뻗어 꿈노트를 작성하려 했다. 오늘은 이 층짜리 단칸방과 욕실 타일에 대한 흥미로운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노트 앱보다 트위터를 먼저 누르게 되었고 그곳에서 흥미로운 트윗을 보았다. 한 아이와 잃어버린 인형에 대한 이야기였다.


https://twitter.com/thestourbridge/status/1437472232259850241?s=21


영국에 사는 한 소년이 태어날 때부터 함께한 피터 래빗 인형을 데본 주에서 잃어버렸는데, 그 소식을 접한 선량한 시민들이 온갖 선물을 보내주었고 스토어 브리지 기차역에서 일하는 한 고양이가 공식 트윗 계정을 빌려 소년에게 인형이 떠난 환상적인 모험 이야기를 들려주며 추억을 되돌려 준 사건이다. 물론 소년이 잃어버린 '진짜' 피터 래빗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후예가 '진짜'의 명예로운 임무를 수여받아 소년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소년은 자신의 피터 래빗이 고양이 조지와 함께 신나는 소풍을 떠났다가 집에 이제야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뛸 듯이 기뻐했다. 아이의 어머니가 올린 동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그 순수한 기쁨이 지구 반대편까지 고스란히 전달되게 하는 뜀뛰기를 볼 수 있다.

이 트윗을 보고 내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추억이 있다.


내 잠자리와 선반, 책상은 인형들로 둘러싸여 있다. 나는 지금도 랩으로 출근할 때 독수리 인형(연세대학교의 그 동글동글한 독수리 마스코트 인형)을 갖고 다닌다. 독수리 인형 이전에, 2019년 여름까지 나와 함께 봉사활동을 다니고, 해외 워크숍을 떠나고, 강의실에서 강의를 들었던 비비에잇(BB-8) 인형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침대 위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내 기억은 비비에잇 인형에 관련된 것이다.


4년 전 여름, 나는 런던에 있는 브루넬 대학교(Brunel University London)에서 전공 관련 워크숍을 진행했다. 학교 내 3성급 호텔에 열흘 동안 묵으며 영국 특유의 건조하면서 시원한 공기와 조우했는데, 그 옆에는 항상 비비에잇이 있었다. 밤에는 itv에서 틀어 주는 영화를 보며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면 베개 옆에 앉혀 놓고 강의실로 향했다. 워크숍이 끝난 후 돌아오면 잘 개켜진 이부자리 옆에 편안히 자리를 잡고 앉아 주인을 기다리는 비비에잇을 볼 수 있었다. 룸서비스 직원은 센스 있게도, 이불 끝자락을 살짝 들춰 비비에잇을 덮어주기까지 했다. 이는 고객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돌게 하는 서비스였고, 지금까지도 나는 열흘 동안의 감동을 잊지 않는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일은 충북 제천에서 일어났다.


한 달 후의 나는 제천의 한 작은 초등학교에서 '대학생 재능봉사 캠프'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때도 어김없이 비비에잇은 나와 함께 모험을 떠났다.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위한 맞춤형 활동을 진행하고 숙소로 돌아오면 비비에잇이 베개 옆에서 기다리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아니,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둘째 날이었던가, 땀에 절은 채 마을 변두리의 작은 모텔인 숙소로 돌아와 보니 침대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인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는 침착한 어른답게 인형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인형은 보이지 않았고 가슴은 두방망이질쳤다. 누군가가 심장에 돌을 묶은 채 저수지에 풍덩 빠뜨린 느낌이었다.


그러던 중 불현듯 내 침대 옆에 있는 깊은 옷장이 눈에 띄었다. 옷장에 문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깊이가 지나치게 깊어서 그 안은 그늘져 있었다. 게다가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나와 룸메이트는 첫날부터 절대 그 옷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상태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허리를 숙여 옷장 안을 들여다봤더니,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인형이 옷장 안에 처박혀 있었던 것이다.


문자 그대로 '던져져서 처박혀' 있었다. 직원이 침대를 정리하다가 인형이 걸리적거리니까 가까운 곳에 있는 보관함에 던져 넣고서는 잊어버린 게 분명했다. 누가 이랬어, 누가 널 이렇게 던져 버렸어,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상태가 가장 나은 휴지로 있는 힘껏 먼지를 털어주었다. 룸메이트도 곁에서 안타까운 듯 우리를 쳐다봤다.


31일도 안 되는 나날을 사이에 두고 나는 숙박업소 고객으로서 상반되는 소비자 경험을 겪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서비스디자인 전공생의 시선으로 접근할 것이냐, 손님의 시선으로 접근할 것이냐. 나는 '선진국'과 '선진국이 아닌 나라'의 차이로 접근하기로 했다.


2019년 가을, 어이없게도 한국이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하고 선진국으로 인정받기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그건 둘째 치고, 나는 환호하지 않는 사람의 시선에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후진국의 차이점이 무엇일지 진지하게 생각했다. 경제 규모? GDP? 복지 수준? 편리한 교통? 세계 시장에서의 목소리 크기? 땅덩어리가 몇 헥토파스칼인지? 그게 기준일까?

슬프지만 당연히 그것들이 기준이다. 하지만 판데믹을 겪고 나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라비안 숫자에 놀아났다. 나는 숫자에게 굴복하는 체질이 아니기에, 오늘 아침의 트윗에서 불러일으켜진 생각을 토대로 진정한 선진국이란 무엇일지 따질 것이다.


내 기준은 문화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는 '언어', 그리고 '감정'이다. 나라는 한 대한민국 국민의 기준 앞에서 대한민국은 선진국인가, 선진국이 아닌가? 미안하지만, 나는 한국이 선진국이 되기까지 아직 멀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대표적인 예로 유행어가 있다. 날이 갈수록 유행어의 한글 파괴가 심각해지고 있다. 네이버의 여러 '판'을 돌아보면 도대체 이게 어느 나라 말인지 의심이 가는 미사여구가 한둘이 아니다. SNS 내용도, 광고도, 외국문학 번역 수준도, 덩달아 추락하고 있다.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대중의 이해력을 넘지 않기 위해서 앞다투어 유행어를 사용하는 데 열을 올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문해력이 바닥났다는 것은 한두 번 듣는 가십거리가 아니다. 얼마 전 개봉한 '샹치: 텐 링즈의 전설'의 대사 중, 'Three days'를 '사흘'로 번역한 것을 두고 한 관객이 오역했다며 항의했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렸다. 그 '사'가 그 '4'가 아닌데.

한국만큼 자존심이 강한 나라에서, 나라를 지탱해 온 언어가 흔들린다는 것은 가볍게 넘길 사항이 아니다. 이제는 문해력 참고서까지 등장한다니, 책만 읽으면 다 해결되는 것을. 한국이 선진국이 되기를 방해하는 첫 번째 요소는 '언어'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불만스러운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맞춤법 파괴 지적은 늘 있었지만 사회는 아랑곳하지 않고 잘만 굴러갔다. 이 사람은 왜 알량한 주장으로 나라의 위상을 깎아내리는가?


자, 독자는 이 글을 읽고 의문을 품었다. 정상적인 토의의 자세를 띠었다고 할 수 있다. 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을 수 있다. 그것 또한 정상이다. 이제 트위터나 카카오톡으로 친구에게 글을 공유하며 첨언을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뭐라고 말할 것인가?

⋯⋯만약 킹받네 같은 류의 단어가 하나라도 들어갔다면 당신은 당신의 감정을 표출하기 위해 상장(上場)된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당신은 대중에게 상장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했고, 이 글에 대한 분노를 적절히 표출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유행어는 감정과 직결된다. 언어 자체가 동물의 의도나 감정을 표출하기 위해 발전한 만큼, 유행어 중에서도 감정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들이 많이 보인다. '~st', 'O며든다', '킹받는다' 등 다양한 형용사, 동사들이 표준어의 자리를 꿰찼다. 사람들은 소통의 편리함을 위해,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위해, 또는 휴대폰 터치스크린 키보드를 오랫동안 누르기 귀찮아서, 유행어를 사용하며 소감, 감상, 생각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 소통은 빨라지고 재치 있어졌지만 모두가 각양각색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똑같은 미사여구만 사용한다. 비주류는 주류를 답습하고 또한 후대에 전달한다. 그 사이에 주류는 또다시 바뀌고, 그러면 그쪽으로 우루루 몰려간다. 쳇바퀴가 형성된 것이다. '이러이러한 상황에 대한 소감을 몇 자 이내로 서술하시오'가 밈(meme)인 세상이 되었다. 그것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당연히 서술해야 할 대상을 우스갯소리라는 장식장 안에 가둬버린 결과물이다. 마땅히 드러내야 할 것을 가슴속에 묻어둔 채 바깥세상을 위한 전시만 하는 셈이다. 사회를 고루 물들여야 할 다양한 감정과 느낌들이 박람회의 그림이 되어 벽에 못 박혀 버렸다.


영국과 한국이라는, 경도상에서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나라들에서 일어난 두 건의 인형 사건을 다시금 떠올리면서 나는 머릿속 한 켠을 어지럽게 헝클어뜨린 장본인이 병든 사회에 대한 걱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개인의 차이일지 모른다. 일손이 바쁜 와중에 손바닥만한 인형이 얼마나 거추장스러웠겠는가. 하지만 감정을 풍부하게 만들도록 훈련 사감 역할을 수행하는 인형 앞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는 개인의 몫도 있지만 사회의 탓도 있다. 만약 한국인 소년이 서울역 한복판에서 토끼 인형을 잃어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 어머니의 사연을 읽으며 한 명이라도 '안됐다'라는 마음을 품고 재치 있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다면 그것 자체야말로 기적이다. 한국같이 남에게 눈치를 주는 것은 좋아하지만 남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싫어하는 나라도 드물다. 한국이었다면 아이가 다시 인형과의 추억을 쌓을 수 있었을지 의구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집안 어른들은 다들 남자애가 유난이라며 한 말씩 얹을 것이고, 다른 인형을 사 주면 끝이 나겠지. 만약 한 천사가 그를 돕는다고 쳐도, 사건을 다룬 공유 게시물 제목이 벌써부터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서울역에서의 감동실화'. 그게 전부다. 우리는 누구에게 감동하고 있는가? 감동이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바꿔놓았는가? 사회에 만연하는 '감동'을 보면,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음이 확실하다.       


누구에게나 그 사람의 인생을 바꾼 무언가가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내 경우는 좀 더 특별하다. 내 인생을 바꾼 일등 공신은 습관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감정을 다른 형태로 가공하는 습관이 정말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다른 형태'라 함은 소설, 시, 만화, 카툰, 일기, 음악을 가리킨다. 나는 이 중 어떠한 것에도 선을 긋지 않고 때에 따라서, 그리고 어떤 유형이 내 생각과 의도를 더 잘 표출할 수 있을지에 따라서 자유롭게 넘나들며 감정을 표출했다. 이 글 또한 마음속에서 영근 상념이 최대한 아름답게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감미로운 이야기, 따뜻한 위로의 말, 애절한 가사⋯⋯. 인간은 그 자신을 성숙된 존재로 이끌어내고, 다채로운 사회를 형성하고, 보다 올곧은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감정을, 감정을 드러내는 언어를,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자신들을 한꺼번에 발맞춰 성장시켰다. 영국의 기차역 인형 사건 외에도 유럽과 미국 등 다양한 나라에서 들려오는 유치하면서도 눈을 반짝이게 하는 소식들이 많다. 그들은 이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세상의 무대에 등장시킨다. 반면 한국은 최대한으로 어떻게든 소통에 있어 거리낌 없도록, 유별나지 않게 개개인을 스쳐 지나가게 하는 것이 목적인 것 같다. 우리 모두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데. 뻔하디 뻔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도달하지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언어와 감정. 주축이 무너지면 선진국도, 강국도, 관광 명소도 없다. 활발한 경제와 탄탄한 안보도 없다. 선진국이 되고 싶다면 선진국의 동력이 무엇인지 돌이켜 봐야 할 것이다. 선진국의 열차가 서울 지하철 열차보다 좁고 지저분하다면서 역시 한국이 선진국이라고 신나게 자만하지 말고. 선진국의 기준은 그것이 아니며, 바뀌어야 옳다.

이 글을 읽은 순간부터 서점에 가 베스트셀러 서가, 광장에 서서 광고 문구들, SNS 피드를 내리며 친구들의 언어를 곰곰이 따져보길 바란다. 언어 시장에 상장된 단어들을 사용하였나, 또는 이런 표현도 있었구나, 하도록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문구를 사용하였나? 


당신은 어느 쪽인가?



- '상장'의 뜻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뜻을 사용하였습니다.

- '감정 상장'은 작가가 새롭게 고안한 단어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저작권 아래 놓입니다.

- 댓글 및 출처를 밝힌 공유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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