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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tryd Dec 31. 2020

정확함의 유혹

칼럼 #4

 약 20만 년의 인류 역사 동안, 감정은 문명의 발달과 분리시킬 수 없는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공포는 불의 발견을 이끌었고, 호기심은 수학과 과학의 등장을 촉진시켰으며, 즐거움에서 예술의 화려함이 꽃피었다. 2020년이 머지않은 현재에는 어떤 감정이 인류를 사로잡았을까?

 바로 '귀찮음'이다.

 일명 '귀차니즘'이라는 단어가 대두되고 있는 요즘, 우리는 식사 장소를 정하는 상황에서 습관적으로 "아무것이나 먹자"라는 말을 내뱉는다. '아무것'은 정확도와 거리가 멀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정확'과 매우 근접한 단어다. 정확한 것이 아닌 모호한 것의 집합은 세세히 고려해 주지 않겠다는 무의식적인 표현법으로 '아무'라는 접두어를 적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내뱉는 사람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하나하나 꼼꼼히 따지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결과만 알고 싶은 상태라고 분석할 수 있다. 과정, 분석, 평가. 이 세 단어와 가까워지는 것을 '귀찮아'하는 '빨리빨리' 시대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귀차니즘은 '고르는 것'을 선호하는 움직임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여러 개의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정확히 고르고 싶은 마음이 투영된 것이다.

 고르는 행위에는 다수의 선택지가 따른다. '다수'를 통해 '몇'이라는 단어를 이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몇'을 애용한다. 모든 대상은 가상의 자 옆, 가상의 비커 안에서 재단되고 측정된다. 친구가 새로 산 블루투스 이어폰이 얼마인지, 이사를 갈 집이 몇 평인지, 버스는 몇 분 후에 오는지, 몇 시에 비가 내릴 예정인지 등……. 자본주의 사회에서 숫자는 매력적인 수단이다. 모든 것을 비교하고, 평가하기 쉽게끔 돕기 때문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숫자 앞에서 현대인은 깊게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왜 인간은 고르는 행위와 측정하는 행위를 즐기는가? '정확함'의 매력 때문이다. 선택과 '몇'은 정확하다. '정확'은 명실상부하고 뚜렷하며, 고정적이면서 간편하고, 단순하게 나누어떨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통 안에 담긴 뚜렷함이다. 통 안에 담아 놓고 숫자라는 다른 출력 장치를 통해 바라본 대상일 뿐이다. 통의 밑면은 정확도를 위해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정돼 있지만, 꽉 닫은 두꺼운 플라스틱 뚜껑 때문에 용기에는 습기가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안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다. 눈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생각하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디지털 시계와 아날로그 시계를 비교해 보자. 디지털 시계의 경우, 시간은 그 어떤 것보다도 빠르고 정확하게 뇌에 입력된다. 하지만 시침, 분침, 초침으로 시각을 표현하는 아날로그 시계와 달리 시간의 공간감은 느끼지 못한다. 물리학에서 시간과 공간은 연관성을 지녔다고 분석하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지금은 몇 시 몇 분이다"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애용하기 시작했다. 현재 시각을 종이에 쓰라고 했을 때 2차원 평면에 알맞도록 숫자만 쓰는 것이다. 시계를 그리고 시침, 분침, 초침을 그려 넣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필자는 몇 주 전부터 스마트폰 잠금 화면의 시계 표현 방식을 아날로그 방식으로 설정해 놓았다. '정확함'의 유혹을 떨쳐 버리기 위해서다. '정확'을 벗어나면 새로움을 찾는 과정에서 '감정'이 찾아와 손을 잡고 새로운 길로 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귀차니즘'을 새로운 방식으로 탈피해야 할 때인지 모른다. 지금까지 했던 방식을 고집하는 것 자체가 귀찮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앞으로 공공장소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실례지만, 지금 몇 시입니까?"하고 묻는다면 웃으면서 답하자. "지금은, 한 시가 되려면 반 이상이 남은 시각입니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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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자이너에게 중요한 매체는 인터넷도 아니고 미술관도 아닌, 신문과 시계라는 교수님의 말씀에서 말미암아 집필한 칼럼이다.

 글로 옮기고자 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한 도구는 뭐니뭐니해도 시계다. 2020년 현재는 단종된, 2019년까지 이케아에서 판매되던 노란 시계가 그것이다. 이름이 스톨파(STOLPA)였던 그 시계를 만난 곳은 뙤약볕이 내리쬐던 강남역 주변 사거리의 한 건물 안이었다. 2019년 8월, 독일어 학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와 정처없이 떠돌던 나는 우연히 이케아 팝업전시장 앞을 지나가게 되었으며 sns에 후기를 남기면 곰인형을 준다는 말에 사로잡혀 건물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어릴 때부터 백화점에 가면 가전, 가구 코너에서 나오지 않았던 내게 팝업전시장은 일종의 오아시스였다. 집 옆에 작은 아울렛이 있고 대형 쇼핑몰이 있던 곳에서 이사를 가 한적한 대단지 안에 자리잡았던 터라 내가 좋아했던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렸던 탓도 있다. 작은 화면만 붙잡고 앉아 다양한 광고, 잡지 사진, 비핸스에 올라온 작품들에 열중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까? 신기하게도 내게는 연도마다, 매 분기마다 현재 혹은 미래의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약속한 듯 찾아왔다. 2019년 하반기에는 #이케아 였다.

 팝업스토어에서 나는, 동글동글하나 수줍은 듯 몸을 웅크리고 있으며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노란 시계를 발견했다. 스톨파 시계를 본 내 감상은 그러했다. 사전에 약속을 잡은 후 광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동네 친구들처럼, 이케아의 가구들은 서로에게 어울리는 짝을 찾아 조용히 앉거나 서 있었으며 스톨파 시계는 그 중 고동색 침대 협탁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시계의 모양은 단순했다. 노란색 테두리에 하얀색 바탕, 두꺼운 시침과 덜 두꺼운 분침이 전부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그림자(해시계), 허기짐(배꼽시계), 물의 양(밀물과 썰물)으로 시간을 파악하던 동물이었다. 우리는 언제부터 아라비안 숫자 혹은 로마 숫자의 노예가 되었는가? 팝업스토어에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 이것이었다. 그리하여 매장에서 스톨파 시계를 본 후, 나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한 손놀림으로 인스타그램에 후기를 남겼고, 지금 침대에서 방 안의 분위기를 향유하고 있는 작은 곰인형(현재는 이케아에서 1500원에 판매 중이다)을 손에 들고, 집으로 향하는 크나큰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래서 아날로그 시계는 중요하다. 인류가 만든 틀을 벗어나는 것을 돕는다. 시야가 숫자에 얽매이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는다. 집으로 향하며 나는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스톨파 시계를 사기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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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시계가 단종되어 지금까지도 구매하지 못했다. 인간이란 그런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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