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3
'21세기야말로 스마트 인문학의 시대다'라는 문장이 화두다.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범람하는 단어 '스마트'를 잘못 첨가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문장 자체가 중의적인 표현으로 가득 찼다는 것이다. 스마트란 무엇인가? 현재 스마트는 사용자가 원하는 수준 이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의미하는 맥락으로 자주 쓰인다. 그런 의미에서 '스마트 인문학'은 올바르게 결합되지 못한 복합어다.
스마트폰, 스마트 냉장고와 같은 선례를 보면 그 이유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스마트 기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 정도까지 할 줄 몰랐는데 해냈다'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누구도 집이 자신을 대신해 에어컨을 가동하거나 전등을 끌 줄 짐작하지 못했으며, 손바닥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모든 업무를 처리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따라서 스마트 뒤에 붙은 대상이 의외의 모습을 보여 줬다는, 은연중에 무시하는 분위기가 내재된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 앞에 스마트를 붙이는 것은 앞뒤 말이 맞지 않는다. 이 문장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첫 번째 근거다.
두 번째 근거는 '스마트'와 인문학 용어를 분석해 비교함으로써 찾을 수 있다. 흔히 스마트는 '똑똑한'으로 번역된다. '똑똑한 인문학'은 올바른 단어일까? 인문학은 속세적인 느낌을 담은 똑똑함과 거리가 멀다. 사람들이 똑똑하다고 일컫는 사람은 시험 점수를 높게 받거나 교수자의 의도를 잘 찾아내는 사람이다. 이들은 기존에 만들어져 있는 타인의 패턴을 스펀지같이 흡수하는 사람이지, 패턴을 새롭게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똑똑하다고 불리기보다는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으므로 제외하겠다. 인문학의 회로는 인간의 삶을 인간 자신으로부터 분리해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관찰해야 효과적으로 돌아간다. 어딘지 모르게 멍한, 다른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 진정한 인문학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 앞에 '똑똑한'을 붙이는 것 또한 잘못된 이해를 했음을 의미한다.
앞서 명시한 문장에 중의적인 표현이 많다고 언급했다. 21세기야말로 인문학의 시대라는 문장은 옳지 않다. 인문학은 특정한 사고의 방법이 아니라 낮잠을 자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글을 쓰다가 지우개로 지울 때조차도 계속되는 사고의 흐름을 의미한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들이 논리적으로 한데 엮여 또 다른 정돈된 생각을 낳는 과정 자체가 인문학인 것이다. 이는 인류가 지구에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 꾸준히 지속됐으므로 21세기가 인문학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 자체부터 잘못됐다.
인문학은 기계적으로 대체하기 쉽지 않은 학문이다. 기계는 0과 1이 같다는 등식을 입력받았을 때 혼돈에 빠지지만 사람은 0과 1에 자신만의 새 의미를 부여해 그 등식이 성립한다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인문학을 스마트하다고 말하는 것은 스마트를 기계에 붙이는 신조어가 범람하는 요즘, 그 범람에 맞춰 안일하게 복합어를 만들었다가 자기 스스로 모순을 만든 경우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어떻게 새로 쓰여야 하는가? '21세기는 인문학의 소중함이 다시 빛을 발하는 시대다'라고 쓰여야 비로소 말이 성립할 것이다. 산업화가 일어난 직후부터 지금까지 인류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다름을 배척하고 같음을 옳게 여겼다. 이야말로 인류가 어느 순간부터 기계적인 사고만 지속했음을 보여주는 척도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것,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행동. 이 둘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시대가 바로 21세기다.' 이렇게 문장을 만들었다면 한결 낫지 않았을까?
2019년 상반기는 내 3년째인 대학 생활에 한 획을 그은 학기다. 다양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그로 인해 스트레스 지수는 한껏 치솟았고 그로 인해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미운 아홉 살'의 나이면 대부분 초등학교 2학년인데, 나 또한, 그리고 주변 학생들 또한 대학에 와서 학문의 길을 걷는 동안에도 '미운 2학년'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인생이라는 바다에는 수많은 파도와 해일이 존재하지만 2019년만큼 파고가 높은 해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당시의 나는 주저함을 떨치고 기운차게 학교를 옮긴 과거의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컴퓨터를 좋아하나 컴퓨터를 이용한 배움은 받아들이기 싫어했던 모순 속에서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했기에 더욱 그랬다. 공과대학, 게다가 디자인까지 배우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맥북 프로의 작은 15인치 화면 속의 정보들은 내 망막에 상만 맺힐 뿐, 시신경 다음 단계에 접근하는 것은 번번이 힘들어했다. 몰아치는 과제와 팀 프로젝트에 시달리던 나는 심연의 고민과 고민을 거듭했고 결국 다양한 갈등 상황에 놓였다. 돌이켜 보면 정말 사소한 것에서부터 1초의 잘못된 선택으로 발생한 것까지 다양했다. 다행히 내가 전공하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확신을 다잡아 주시면서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게 도와 주신 은사님을 만났다.
발단은 교내 인문학 교양 강의였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상위권 대학 중에서도 학생들의 수준이 매우 높으며 평가 방식이 깐깐하기로 유명한 학교다. 그 속에서 절대평가를 실시하는 강의는 모두가 눈독을 들이게 마련이다. 운명의 손길 덕분인지 수강신청 전쟁에서 내 마우스는 '신청' 버튼을 누르는 데 성공했고, 은사님의 강의를 수강할 수 있었다.
그 교수님은 매주 수업이 시작하면 모든 학생이 돌아가며 15분 동안 '인문학 버스킹'을 진행하라고 말씀하셨다. 주제는 자유였다. 하물며 어젯밤 잠들기 전에 새벽 4시까지 스마트폰을 만져서 눈이 따갑다는 내용으로 진행해도 상관없다고 말씀하셨다.(그 수업은 1교시에 시작했다) 각기 다른 25명의 각기 다른 25가지 이야기로 교수님께서는 신기하게도, 그 주의 수업 내용과 연계해 다양한 교훈을 도출하셨다. 인문학의 진가를 깨달은 순간이었다.
내게도 헤밍웨이의 일화를 들려 주시며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자네는 글을 쓰며 살아야 행복할 것이야," 라고. 문예창작과를 나온 내 귓전에 날아와 박힌 말이다. 그리하여 결심했다. 본업으로는 '개발하는 디자이너'를 하고 부업으로 소설가의 길을 이끌어 나가기로. 이제 한 가지의 직업만 가지는 시대는 지났다. 그렇게 따지면 학과를 옮긴 내 선택은 정말 옳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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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인문학은 자신의 삶, 그리고 인류의 방향에 확신을 갖도록 돕는 학문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