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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tryd Dec 26. 2020

흑과 백의 오열

칼럼 #2

 공포영화 포스터에 주로 사용되는 색깔은 검은색이다. 야행성일지라도 시각을 지닌 생명체라면 누구나 암흑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어둠 속에서 누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먹이사슬의 역사를 거치며 DNA 속에 각인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한다. 선과 악의 대결에서 선한 쪽은 하얀색, 악한 쪽은 검은색으로 표현하는 것도 이로부터 유래됐다는 분석을 들은 적 있다. 지금도 수많은 애니메이션에서는 그러한 표현법을 사용하고 있다. 검은색을 첨가해 명도와 채도가 낮은 색감은 캐릭터가 '옳음'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다는 것을 대변한다. 검은색은 이렇게 사연이 많은 색이다.

 검은색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다. 생명체는 하얀색에 대한 공포심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인간의 두뇌는 검은색의 호소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제 검은색의 주장에 귀 기울여 보자.

 공포 게임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사일런스 힐'에서는 공포의 대상이 하얀색, 즉 무채색으로 묘사된다. 그 어느 장면에서도 흑백의 대결 구도가 나타나지 않으며 주인공은 하얀 잿가루와 불에 탄 연기가 공기 중에 뱅뱅 맴도는 유령 마을에서 끝없이 헤매고 또 헤맨다. 밤이 되나 낮이 되나 즉, 검은 시간인가 하얀 시간인가 할 것 없이 언제 어디서나 정체불명의 괴물들에게 공격받는다. 오히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캄캄하고 좁은 공간에 숨고 나서야 주인공과 일행은 위협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 검은색이 절대적 악으로 묘사되지 않은 좋은 영화다.

 공간을 디자인할 때 디자이너들은 하얀색이 띤 공포를 잊지 않는다. 하얀색은 깔끔하고 깨끗한 색으로 묘사되지만 그 안에 숨겨진 두려움도 있는 법이다. 끝도 없는 공허 안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을 선사하는 하얀색의 공포. 그래서 공간 디자인에서는 하얀색 벽지로 둘러싸인 방 안에 절대 하얀 가구를 배치하지 않는다. 넓은 분위기를 강조하는 갤러리에서도 하얀색만 사용하는 일은 없다. 그 어느 곳보다 청결을 강조해야 할 병원과 같은 보건 시설도 실내를 하얀색으로만 장식하는 트렌드에서 벗어나고 있다. 내시경 시설이나 검진 시설, 특히 소아과의 주사실 같은 경우 환자들의 공포심을 더 자극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여러 사례를 읽었지만 여전히 마음에 와 닿지 않는가? 그렇다면 제일 쉬운 예시를 들겠다. 바로 '백지'다. 백지가 눈앞에 보이는 순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숨이 막힐 것이다. 하얀 백지를 어떻게 형태와 색채를 띤 것으로 채울지 막막함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기 때문이다. 그들 앞에서 하얀색은 마치 검은색처럼 오열할 것이다. '왜 나를 거부할까? 당신들이 열망하던 하얀 눈밭, 순백색의 자유로움을 나 또한 지니고 있는데!' 하지만 이 주장 역시 인간에게 들리지 않는다.

 이제 검은색의 입장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겠는가? 검은색과 하얀색의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이분법적 사고로 어느 한 대상의 특성을 전체의 특성으로 교묘하게 바꾼 후 그에 따른 편견을 가지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인류의 역사에서 수많은 약한 존재들이 이러한 편견에 희생됐다. 아이-아이(Eye-Eye) 원숭이는 불길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다 멸종 위기에 처했으며 여성 또한 21세기 현재까지 편견에 의한 수많은 차별과 억압에 의한 피해를 받고 있다. 다양성과 융합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세대는 그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검은색과 하얀색이 다시 한번 일깨워 준 큰 교훈에 감탄하며 글을 마무리 짓는다.



*1학년 공통교양 수업 시간 중 글쓰기 수업이 있었다. 첫 수업 날,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에게 A4용지를 들이민 후 아무 주제나 좋으니 자유 형태로 글을 써 보라고 말씀하셨다. 모두가 망연자실했다. 어떤 학생은 그림으로 대체하면 안 되냐는 질문까지 했다. 그런 학우들의 모습을 보면서 불현듯 떠오른 주제로 단숨에 써 내려간 글이 칼럼으로 발전한 것이다.

 오리엔테이션 수업이 끝나고 다음 차시 수업에서 나는 이 글을 강단에 서서 손에 마이크를 그러쥐고 처음부터 끝까지 읊어야 했다. 우수작으로 뽑혔기 때문이다. 내 미사여구들을 직접 읊자니 얼굴이 화끈거렸으나 다행히 나는 포커페이스에 능했다. 모두들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올렸지만 마음 한 켠에는 근심이 남았다. 현대인들에게 칼럼의 역할은 무엇일지에 대한 궁금증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긴 글 읽기에 거부 반응을 보인다. 글을 읽어도 일시적인 감동만 느낀 채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는다. 삽시간에 기억의 뒤편으로 잊히고 마는 글. 외로운 글의 외로운 동반자인 작가, 나의 숙명이다. 외로움을 글로 승화시키고 그것을 발표한다. 세상 속에서 글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쉽게 지친다. 그런 내 글을 다시 읽으면서 힘을 북돋아 주고 세상으로 도로 내보낸다. 내가 글을 쓰고 공개하는 절차다. 가족보다 끈끈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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