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학연수를 가서 영어보다 더 가치 있는 걸 배우다
나는 어학연수 경험자이다. 어학연수를 희망하는 친구들에겐 Q&A 게시판과도 같다. 목적이 "영어실력 향상"이라고 말하는 친구들에겐 단호하게 추천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왜냐고? 영어실력이 늘고 싶으면 한국에서 영어학원을 다니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한 달 수강료 30만 원 내고 토익 점수 600에서 900 찍을래? 아니면 어학연수 1년 가는 데 3천만 원 쓰고 토익 점수 600에서 900 찍을래?"
매정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위와 같이 종종 되물었다. 외국에 나가서 살면 영어를 듣고, 쓰고, 읽는 모든 능력이 향상된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단지 그걸 위해 몇 천만 원을 투자하겠다는 건 비용적으로나 결과적으로나 비효율적이다. 한 마디로 가성비가 떨어진다는 뜻이다.
이 글을 보는 당신도 혹시 어학연수를 고민하고 있다면, 그래서 이걸 읽고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받고 싶은 거라면, 나는 단호하게 답변해줄 수 있다. 영어실력 향상과 더불어 새로운 경험을 통한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 싶은 거라면 무조건 가라고. 여유로움과 자존감, 자신감을 찾고 싶다면 망설임 없이 떠나라고.
2018년, 22살의 봄. 나는 여전히 사춘기였다.
키는 17살부터 한결같이 161이었지만 마음은 올곧게 자라지 못하고 사방으로 가지를 뻗었다. 나는 수년 째 자아정체성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변화와 낯선 것은 두려워했다. 아르바이트는 면접보다 첫 출근이 더 겁났고, 대학교 입학식 때는 잔뜩 쫄아있었다. 자칭 "쭈구리"는 이듬해에 사춘기 종결을 선언했다. 긍정적인 변화가 시작됐던 2019년, 나는 캐나다의 작지 않은 섬 밴쿠버 아일랜드 속 정원의 도시, 빅토리아에 있었다.
내게 외국행을 제안했던 건 부모님도, 셋이나 되는 형제들도 아닌 형부였다.
"어학연수나 다녀와라." 처음 들었었을 땐 예와 같은 시답잖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봐서 그런지 워낙 가까운 사이라. 그래서 가면 좋긴 하겠다며 가볍게 대답했으나 돌아온 반응이 퍽 진지해 당황스러웠다. 물론 내가 영어를 좋아했지만 잘하진 않았다. 주어가 3인칭 단수이면 동사에 s를 붙이는 그 간단한 규칙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He가 나오면 동사에 s가 붙더라 정도의 수준으로 파악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고민해보겠다고 얼버무렸다. 사실 의사소통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엄한 아빠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어학연수를 왜 가려하는지, 왜 가야 하는지, 왜 가고 싶은지 논리 정연하게 설명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여차하면 PPT를 띄워놓고 일장연설을 펼쳐야 할지도 몰랐다. 조금이라도 합당하지 않다면 말로 뭇매를 맞을 게 뻔했다. 가고 싶은 마음과 두려움이 동시에 찾아왔다.
아무런 진척이 없었다. 어차피 못 갈 것이라 생각했으니 손에서 놓아버렸다. 종강 후, 여느 때와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두 달치 짐을 싸들고 서울에 올라갔다. 큰언니와 형부, 두 조카가 있는 집에 도착한 날 들은 말은 아빠가 어학연수를 보내주겠다 하셨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학연수를 보내달라 직접 부탁은 해야 했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건 아닐까. 며칠 동안 머리칼을 쥐어뜯었던 것 같다. 뭐라고 설득하지, 혼나면 어떡하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전화를 받은 아빠는 흔쾌히 그러마 하셨다. 통화가 끝나고 휴대폰을 침대 위에 휙 던져버리곤 바닥에 드러누워 한숨을 쉬었다.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싱숭생숭했다.
반년 동안 유학원 발품을 팔고, 나라를 정하고, 어학원 계약까지 했다. 출국까지 남은 시간은 이틀뿐이었다. 바쁘게 준비하느라 잊었던 두려움이 몰려왔다. 생애 두 번째 비행기 탑승, 그리고 혼자 하는 출국 수속, 입국심사.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나라에서 11개월이나 살다 오라니. 하지만 물러설 곳은 없었다. 캐리어 두 개와 백팩을 꽉꽉 채우는 동안 우울한 감정에 휩싸였다.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남은 이틀은 쏜살같이 달아났다.
어느새 공항에 도착해있었다. 탑승 게이트를 무사히 통과한 후 비행기 좌석에 앉아 캐나다에서 밴쿠버, 밴쿠버에서 빅토리아로 가는 티켓 두 장을 여권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괜히 울까 봐 배웅해주러 저 멀리 해남에서 올라오신다는 부모님을 만류했는데, 어차피 울 거 그냥 와달라고 할 걸 후회가 됐다. 이미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한 비행기의 바퀴를 멈추고만 싶었다.
2019년 1월 3일, 빅토리아 국제공항 하늘 위를 덮은 거무죽죽한 구름이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밴쿠버 국제공항에서의 환승 시간까지 더하면 장장 14시간의 비행이었다. 현지 유학원 관계자분의 차를 타고 홈스테이 가정에 도착하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운타운과 업타운 사이, 대로변에 위치한 2층 집에 살고 있는 나의 첫 홈스테이 패밀리는 중국계 캐나다인이었다. 쉬는 날 없이 근무하는 엄마,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아빠, 그리고 홈스쿨링을 하는 고등학생 아들. 특별할 거 없는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이었다. 현관문 키를 받고 간단히 인사를 나눴지만 사실 알아들은 말은 Hi와 How are you 뿐이었다. 대충 알아듣는 척했다. 아마 내가 못 알아들었단 걸 다 알아챘었을 테지만 상관없었다.
호스트 마더인 앨리스는 1층 한편에 있는 방문을 열어주었다. 퀸사이즈의 침대가 떡하니 놓여있고 방 안에는 개인 화장실까지 있었다. 세면대와 변기만 놓여있어 샤워는 공용욕실을 이용해야 했지만 화장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베네핏이었다. 하루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 1월 3일 17시경에 출국했는데 여전히 1월 3일 오후이니 하루가 긴 게 맞긴 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몰려드는 피곤함에 침대에 드러누워있다 잠에 들었다 깼을 땐 새벽 5시경이었다. 책상 옆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뒷마당에 우거진 수풀은 오랫동안 손길이 닿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한 시간 즈음 지났을까. 어두컴컴하던 방을 밝혀주는 태양이 내뿜는 빛이 참 아름다웠다. 미세먼지 없는 맑은 하늘. 그제야 내가 정말 캐나다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
OT라 함은 신입생을 위한 예비 교육이지만, 내겐 모르는 사람들이 잔뜩 있는 공간에 뒤섞여 오도카니 앉아 있는 힘껏 낯을 가려야 하는 곤욕에 불과했다. 어학원 OT는 그보다 더했다. 오른쪽에선 스페인어, 왼쪽에선 포르투갈어가 들리고, 앞뒤로 일본어와 중국어, 프랑스어가 뒤섞여 들렸다. 그리고 마이크를 쥔 선생님은 영어를 쓴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혼란스럽고 산만했다. 한국어와 영어만 섞여 들린다면 K-POP을 듣는 것과 다름없이 편함을 느꼈겠지만, 6개 이상의 언어가 한 번에 들리는 건 얘기가 달랐다. 게다가 시끄러운 게 질색이라 그런지 절로 구겨진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OT가 진행되는 내내 팔을 교차시켜 팔짱을 낀 내 자세는 꽤 방어적이었다. 가능하다면 투명인간이 되고 싶긴 했다. 대화를 이어나가기엔 영어 실력도 친화력도 바닥이라. 나중에 친구들에게 첫인상을 물어보니 말 걸면 가만 안 둘 것 같았다고 했다.
어학원 수업은 대학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교양수업인 스핀 클래스(Spin Class) 두 개, 전공수업인 GE(General English) 하나로 구성되어있었다. 하루에 총 6시간 동안 수업을 들었다. 말 그대로 진짜 듣기만 했다. 선생님이 뭘 하라는 건지, 뭘 설명하는 건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같은 반 한국인에게 물어가며 겨우 수업을 쫓아가고 있는 내게 자꾸 질문을 하고, 발표를 시킨다. 딱 죽을 맛이었다. 내가 입을 열길 기다리는 수십 개의 눈동자가 쏘는 눈빛이 부담스럽고, 못하는 걸 들키는 게 싫었다. 외국인 친구들은 스피킹을 어찌나 잘하는지, 괜히 비교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안 할래요. 손을 휘휘 저으며 거부해도 종래엔 칠판 앞에 서있었다.
정신이 쏙 빠진 채로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은 날 끌고 다운타운을 누볐다. 퍼블릭 마켓, 펍, 공원, 이너 하버 곳곳을 쏘다녔다. 재밌고 즐겁긴 했지만 날 좀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나는 밖을 돌아다니는 걸 정말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방에 처박혀 혼자 우울감에 빠져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친 상태였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캐나다에서의 첫 달은 피하고 싶은 것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마주하고 겪어야 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영어 까막귀가 달라졌다. 말을 알아듣기 시작한 것이다. 수업도, 친구들과의 수다도 점점 즐거운 일이 되어갔다. 제대로 구사할 줄 아는 문장은 간단한 인사 아니면 Yes or No가 전부였는데 어느 정도 묻고 싶은 걸 묻는 게 가능해졌다. 지난달에 열심히 끌려다닌 덕인지 학문이 아닌 언어로서 영어를 받아들이니 영어를 쓰는 게 즐거웠다. 어쩜 다들 이렇게도 사회성이 좋은지, 난생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이런저런 주제로 내게 말을 걸었다. 나와 친해지고 싶었다고 말하는 일본인 친구의 한마디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낯을 가린다는 명분 하에 밀어낸 사람만 몇이었는지. 그래서 먼저 제안했다. 다가올 연휴에 다른 친구들과 함께 밴쿠버 여행을 가자고.
본인을 포함해 10명의 친구들이 함께한 2박 3일의 밴쿠버 여행은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즐거웠다. 난생처음 페리도 탔고, 마음껏 웃고 떠들며 돌아다니고, 숙소에서 밤새 술잔을 기울였다. 밴쿠버에서 알게 된 친구도 함께였다. 나도 몰래 세워두었던 벽을 드디어 허물게 된 것이다.
여행을 다녀온 후, 홈스테이 생활에 문제가 생겼다. 세탁기가 2층에 있기에 빨래는 홈스테이 패밀리가 맡아해 주셨는데, 처음엔 양말 몇 개가 돌아오지 않았기에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다음엔 아끼는 반바지가 사라졌고, 티셔츠가 사라졌다. 혹시 보았냐 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역시 모른다는 말 뿐이었다. 그래도 집이 좋고 가족이 친절하니 버텼는데 이번엔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됐다. 홈스테이 파더가 영어를 구사할 줄 몰라 호스트 마더가 없으면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영어에 둘러싸여 살고 싶어 주거형태를 홈스테이로 결정했는데, 영어가 안 되는 호스트 파더라니. 나는 결국 짐을 쌌다. 캐나다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이사였다.
학원에서 일방적으로 통보한 새로운 홈스테이는 빅토리아가 아닌 시드니라는 도시에 있었다. 학원까지 버스로 왕복 두 시간 거리였다. 서양인 특유의 냄새와 대마초 냄새가 환장의 콜라보를 선보이는 버스를 2시간이나 타라고? 홈스테이 담당자와 설전을 벌였다. 내가 살게 될 집인데 이렇게 상의 없이 통보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1인실이 있는 집이 그곳밖에 없었다는 이유를 들은 후에야 얌전히 수긍할 수 있었다.
호스트 마더인 로즈는 내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집 키를 쥐어주며 이곳은 네 집이니 네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라고 했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하면 안 되는 게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았던 한국에서의 생활, 그리고 전 홈스테이에서의 생활과 달랐다. 늘 나의 의사를 물었고 의견을 존중해줬다. 하루 종일 침대에 파묻혀 잠을 자도 ‘좀 움직이렴.’이 아닌 ‘혹시 우울한 일이 있는 건 아니지?’라고 묻는, 재촉하거나 다그치지 않는 환경. 그것은 나를 긍정적인 측면으로 변화하게 만들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마당과 친절한 캐내디언 모녀가 사는 포근한 2층 집. 나는 여전히 그곳을 My sweet home이라고 칭한다.
하루는 한국에 돌아가면 뭘 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했던 대화를 정확히 기억한다. 내가 울었다는 것도.
"한국에 돌아가서 뭐 할 거야?"
"대학을 마저 다녀야죠. 그리고... 모르겠어요. 아직 하고 싶은 일이 없어요."
"멋지네. 뭐든 할 수 있다는 거잖아?"
로즈의 토닥임에 기대어 이룬 게 없다는 불안감, 한국에 있는 가족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흘려보냈다. 뭐든 할 수 있는 사람. 그래, 나는 그런 사람이다.
가장 큰 변화만 딱 집어 써본다.
11개월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지만 서양 특유의 사회문화에 젖어들기엔 충분했다. 개방적이고, 개인주의적이지만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것. 그래서인지 눈치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사회처럼 보였다. 정확히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회. 그리고 그런 문화가 스스로의 의사와 타인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아는 나를 만들었다.
한국에선 늘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다수의 의견과 나의 의견이 다르다는 걸 감춰야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살아갈 수 있었다. '우리'라는 단어에 묶여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선택지 A와 B 중에서 대다수가 A로 의견을 모았을 때 B로 가자는 '이견'을 낸다는 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그래서 나는 단체 속 일개 구성원으로 자리했을 땐 대체로 침묵을 고수했었다.
어학원 수업시간에 매일 토론을 했다. 처음엔 얼마나 불편하던지. 외국인 친구의 발언이 끝나면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다는 리액션을 하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방관하다 보니 다른 국적을 가진 친구들의 발언이 묘하게 거슬리기 시작했다. 다른 나라를 색안경 낀 시선으로 낮잡아보는 발언이라던가, 인종차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여된 주장이라던가. 말을 말자 싶다가도 참을 수 없어 토론의 장에 끼어들게 되더라. 내가 거기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른 때와 같이 수긍했다면 아마 '주관 없는 바보'라는 이미지가 씌워졌을 것이다.
사회적인 문제만을 토론 주제로 정하진 않았다. 당신만의 사무실을 차리게 된다면 옥상에 어떤 시설을 설치하고 싶은지 토론해보라는 등의 주제도 있었다. 그걸 말할 때도 혹여나 이상한 시선을 받게 될까 눈알을 도록도록 굴렸던 내가 생각난다. 옥상 정원을 꾸미고 그 안에 소파를 놓고 싶다고 했더니 모두들 그렇구나, 멋진데 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무도 내 의견에 잣대를 들이대지 않았다. 어떤 친구는 수영장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옥상에 뭔 수영장이야"가 아닌 "옥상에 수영장? 오, 괜찮은데."라는 리액션이 대다수였다. 그것은 의견 존중의 표시였다.
친구 또는 가족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해 휘둘리던 나는 더 이상 없다. 속마음을 애써 숨기며 상대방과 스스로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게 됐다. '나'를 1순위, '우리'를 2순위에 두고 생각하며 행동하게 된 것이다.
수년을 살지 않는 이상 유창하고 유려한 영어 실력을 가질 수는 없다.
어학연수의 가장 큰 메리트는 다른 나라의 문화를 경험하고 그 안에 녹아든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 처음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랜다.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행동할 뿐이랜다. 지금의 당신을 만든 건 무엇인지 떠올려 보라. 아마 자신의 세상 속 분위기와 상황에 따라 적응하고, 또 변화하며 지금의 당신이 완성됐을 것이다. 여러 요소 중에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부분이 어떤 식으로 변화하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나 또한 그랬다. 항상 얽매인 삶을 살다 보니 누군가를 만나면 에너지가 충전된다고 느꼈었는데, 옭아매는 게 없어지니 친구들이 아무리 만나자고 연락해도 거절하기 일수였다. 알고 보니 난 집순이였던 거다. 이건 내게 꽤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당신도 이제껏 몰랐던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소한 것일 수도 있고, 나름 거창한 것일 수도 있다. 살기 위해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먹기 위해 사는 거였다거나, 편협한 시선을 갖고 있었던 걸 깨닫는다거나.
아무렴 좋다. 자신을 더 잘 알고 싶다면 떠나라. 새롭고 신기하고, 어쩌면 두려운 것들 투성이인 타국으로. 시간은 미뤄도 미뤄도 남아있을 만큼 충분하지 않으며, 우뚝 멈춰서 당신을 기다려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