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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갱이 Oct 20. 2021

온 마을이 키워낸 아이

지금은 그 마을이 사라지고 있다.

부모님은 대나무 도・소매업을 하시는 자영업자이다. 드넓은 흙마당에는 길이가 제각각인 대나무가 잔뜩 쌓여있었고, 대문 없는 집 앞의 좁은 2차선 도로에 차가 달렸다. 후에 우리 집 마당 일부가 4차선 도로로 바뀌었지만. 아무튼, 부모님은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셨다. 출퇴근 시간을 정해놓으시진 않았지만 대략 오전 7시부터 밤 10시까지 일을 하셨다. 어쩌면 아침 7시가 아니라 그보다 이른 시각에 일을 시작하셨을지도 모른다. 마당에 놓인 커다란 전기톱이 위잉 돌아가는 소리에 잠이 깨곤 했으니 말이다.


내게 놀이터는 우리 집 마당이었다. 아빠가 탑처럼 쌓아놓은 대나무 위에 올라가 소꿉놀이를 하고, 얇은 대나무 막대로 흙 위에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역시 최고는 액티비티지. 리어카를 그렇게 가지고 놀았다. 작은언니를 태우거나, 작은언니가 날 태워주거나. 하릴없이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하다 갑자기 리어카가 전진하는 바람에 콘크리트 바닥에 무릎과 손바닥이 갈리는 건 흔한 일이었다. 또래보다 과격하게 놀았지만 이제껏 어딜 꿰맨 적이 없다. 내가 선천적으로 튼튼한 건지, 후천적으로 튼튼해진 건지...


초등학교 저학년엔 하루 용돈이 500원이었다. 500원으로 할 수 있는 건 많았다. 정확히 말하면 먹을 수 있는 게 많았지. 학교 앞 문방구는 어린 나에게 만물상이었다. 커다란 전기밥솥에 들어있는 후랑크소시지, 깔끔하게 빼먹는 사람이 일류였던 아폴로, 혀가 파랗게 물드는 아이스크림까지. 나는 매일 아침에 TV를 받쳐주는 거실장 첫 번째 칸에서 짤그랑거리는 동전 중 500원짜리 하나를 받았다. 지갑이 필요 없어서 매일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아마 그런 식으로 학교 운동장에 뿌린 500원짜리를 다 모으면 만 원 정도 될 것이다. 나만 잃어버렸던 건 아닐 테니 그 땅을 팠다면 꽤 쏠쏠한 수익을 올렸을지도 모른다.


학교 정문에서 사거리 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공중전화 박스가 하나 있었다. 1633, 엄마 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이 뚝 끊겼을 때 '엄마, 나야!!'를 재빨리 외친다. 내가 집에 가기 위해 엄마를 부르는 방법이었다. 500원을 전화하는 데 썼어야 하지 않냐는 말은 말라. 그땐 편하게 전화하는 것보다 군것질이 더 중요했다. 아무튼, 통화를 끝내고 운동장에서 시간을 좀 죽이고 있으면 우리 집 포터가 아닌 아빠 친구, 동네 카센터 집 아저씨, 이웃집 삼촌분 등의 차 중 하나가 등장했다. 엄마가 미리 말해준 그 삼촌이 아니면 어쩌려고 덥석 얻어 탔는지. 이건 내가 부모님 말고도 다른 어른들의 보살핌을 늘 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내 고향집은 두 칸짜리 컨테이너 박스다. 마당을 가로질러 가야 하는, 잘 닫히지 않는 쇠문이 달린 허름한 욕실과 화장실은 보너스. 낮에는 사무실, 밤에는 집 역할을 했다. 평일 주말 가릴 거 없이 늘 손님이 와있었다. 하루에 최소 열 명은 다녀갔다. 부모님과 친분이 두터운 분들은 부모님이 마당에서 일을 하고 계셔도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계셨다. 이상한 자세로 자고 있는 나를 열린 미닫이문 틈새로 보고 껄껄 웃기도 하시고, 비몽사몽 비틀비틀거리며 큰방에 발을 들이민 내게 인사 안 하냐 혼내시기도 했다. 내게 수십 명의 이모와 삼촌이 있는 이유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한 아이가 바르게 성장하려면 부모, 학교, 이웃 등 모두의 힘이 필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속담은 내가 성장해온 환경을 한 마디로 요약해놓은 것과 다름없다. 나는 다양한 시선을 가진 어른들 틈에서 가치관을 키웠다. 예의 있게 행동하는 법을 배우고, 배려라는 게 무엇인지 깨우쳤다. 받은 게 있다면 보답하고, 가진 게 있으면 나누는 삶이 무엇인지 보며 자랐다. 무엇보다 '함께'의 가치를 알았다.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과연 온 마을의 도움을 받으며 키울 수 있을까. 이런 생각에 브런치를 켰다. 우리 부모님처럼 나도 일을 하느라 바쁠 테고, 당연히 돌봐줄 수 있는 시간도 별로 없겠지. 나의 어린 시절과 같은 상황이라면 아마 옆집에 부탁하면 되지 않느냐고 간단히 넘어갈 문제였을 것이다.(사실 잘 돌봐주지 못할 바엔 낳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내 관점에서 사회는 점점 아이에게 각박해지고 있다. 아직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아이들에게 어른과 같은 잣대를 들이민다. 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배워가고 있는 단계임을 간과한다. 그리고 부모는 내 아이에게만 유독 관대하다. 이 태도들은 온 마을이 아닌 부모와 학교만 아이에게 남게 만든다.


이 글이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씁쓸한 마음뿐이다. 옆집 이모, 아랫집 삼촌, 건너편 집 할머니가 없는, 내 가족만 덩그러니 남아 사는 마을이 머릿속에 그려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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