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는 서울의 매우 독특하면서도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으로 바로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와 주변 상권의 모습이다. 필자가 한때 출퇴근하면서 항상 지나치던 장면인데 수년간의 변화는 참으로 흥미로웠다. 연말 등 행사 시기가 되면 주변 건물들은 (1) 네온사인을 교체하고 (2) 장식 구조물을 덧입더니 (3) 프로그래밍 되는 LED 조명까지 모자라 (4) 아예 대형 스크린을 벽에 설치하였다.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안간힘이었는데 절제된 표정을 지으면서도 주변을 압도하는 DDP의 조형미와 극렬한 대비를 이루었다. 특히 저 툭 튀어나온 이마 (캔틸레버) 를 한 번 보자. 중력따위는 신경쓰지 않겠다는 건축가의 의지로서 이런 돈지랄 노력이 모여 총 비용은 원래 예산의 두배가 넘는 5천억을 돌파하였다. 이는 정치적 반대파 + 일부 건축가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어 DDP는 건설기간 내내 신랄한 비판에 시달렸다.
반전은 다들 알다시피 지어진 후의 이 건물이 이끌어 낸 변화들이다. DDP는 디자인과 관련된 온갖 기획과 전시를 감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대문을 넘어 한국의 서울의 랜드마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비판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을 수 없는데, 국내 건축가면 이런 게 가능했겠냐는 비판에는 매우 공감하면서도 그녀의 배경 - 아랍계 + 여성 + 프리츠커수상자 - 이 너무 쉽게 손가락질하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알고 보면 그녀만큼 오랫동안 석연찮은 이유로 수모를 견딘 건축가도 없기 때문인데 커리어 초기에 당선되었던 카디프 오페라 하우스는 웨일즈 정부에 의해 노골+반복적으로 거부 당했고 이는 낙인이 되어 무려 10년간(!) 모든 공모전에서 싸그리 탈락하는 단초가 되었다.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며 레퍼토리를 키운 그녀와 팀원들은 강산이 한 번 변한 후에야 비로소 한 시대를 화려하게 풍미하기 시작했다. 저 캔틸레버 뒤의 뚝심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DDP의 설계 과정을 살펴보면 국내외 각각 4인씩 총 8인의 건축가가 지정되어 경쟁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심사위원들이 뽑은 1-3위와 자신이 뽑은 1-3위를 한 번 비교해 보는 것은 어떨런지. 고백컨대 개인적으로는 별 고민없이 하디드 안을 1등으로 뽑게 되는데 무언가 우주에서 뚝 떨어진 듯 동떨어진 느낌을 받는다. 지구인들이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나올 수 없는, 약간은 절망스러운 이질감이다. 꼬리를 무는 의문은, 그녀와 그 외 모든 것을 나누는 이러한 부인할 수 없는 차이가 - 그 유별난 스타일을 십분 감안한다 치더라도 -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느냐는 것이다. 다음 DDP 히스토리북에 나와 있는 그녀의 디자인 컨셉을 한 번 훔쳐보도록 하자.
"강, 하천의 유기적인 움직임 / 물과 공기의 유체 속에서 회전하는 소용돌이(vortex) 을 통해 유기적인 소통을 표현한다. 역사적, 문화적, 도시적, 사회적, 경제적 요소들을 환유적으로 통합하여 하나의 풍경을 창조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yVJPeo_Vc5c
소용돌이를 이용한 환유적 통합이라.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parametric design이라는 디자인 방법을 알아야 한다. 수학 공식으로 구축한 3차원 모델의 매개변수 (parameter) 값을 변화시키면서 나타나는 우연한 형태와 디자인적 요구 조건 사이의 접점을 탐색하는 것이다. 기존의 수평/수직적 관점 위주의 설계 방식과 완전히 다른 접근인데 이는 디자인이 한층 더 순전한 상상력 싸움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막상 텅 빈 가상 공간으로부터 근사한 우연에 이르는 힘의 규칙을 알아내는 길은 그리 만만치 않다. 우리의 생각은 어쩔 수 없이 자연으로 회귀하는데, 뉴턴 역학을 넘어서노라면 익숙하고도 신비로운 유체의 움직임을 마주하게 된다. 유체의 표면은 위상학적으로 무척 복잡할 뿐만 아니라 수없이 다양한 변인 - 점성, 표면 장력, 마찰력, 상호작용, 제트류, 스프레이, 거품 등 - 에 의해 천의 얼굴을 띄게 된다. 하디드가 빌린 vortex (와류) 는 turbulence의 일종으로 유체가 한 방향으로 빠르게 흘러가면서 일부가 되돌아 감아 올라가는 흐름을 가리킨다. 주변의 풍경을 반영하는 동시에 스스로 내/외부가 교차하며 이어지는, 그래서 온갖 사회 구성요소들의 '통합'을 '환유'하는 조형을 구축하기에 안성 맞춤인 규칙이었다.
컴퓨터 그래픽스 학문은 렌더링, 모델링, 애니메이션 등을 연구하며 그 결과는 Photoshop, AutoCAD 와 같은 소프트웨어, 3D 애니메이션이나 실사영화의 특수효과, 게임의 실시간 그래픽 등에 전파되었다. 생각해보면 결국 창작자를 위한 도구를 만드는 일이다. 그럼에도 어쩐 이유에서인지 대부분의 (학교에서 개발되는) 기술은 창작자의 의견은 거의 반영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아티스트 / 디자이너들이 이런 거 필요하겠지" 라고 넘겨짚고 만드는 경우가 많고, 그 학술적 경중과 성패 또한 창작자가 아닌 수학/엔지니어 배경의 연구자들의 판단에 따를 때가 많다. 어디까지나 아카데미의 관행이나 그 영향력을 생각해 보았을 때 상당히 아쉬운 대목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도구가 실제로 창작자들에게 사용되는 방식이다. 먼저 윗줄을 보자. 왼쪽 여인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다고 느껴지는지? 이것은 필자가 박사과정 중 같이 재학했던 인도 동료가 개발한 것으로 모나리자의 야릇한 표정이 사실은 '자세히' 보면 웃고 있고 '대충' 보면 냉소에 가깝다는 관찰에서 비롯되었다. 임의의 두 표정을 합쳐 미묘한 표정을 합성해 낼 수 있었는데 이를 처음 봤을 때 이걸 도대체 어디다 써먹지 고속도로 간판 같은데 적용하면 거리에 따라 이미지가 달리 보일까 생각해 본 기억이 있다. 위 오른쪽 이미지는 수년 후 엘레베이터 앞에서 본 국내 안과 선전으로, 아인슈타인이 아닌 마릴린먼로가 보이면 근시니 당장 라식수술 상담을 받으라는 이야기였다. 다빈치는 자신이 고객을 안과 수술실로 이끄는데 사용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랫 줄 왼쪽은 수십년 전 필자 동료의 연구로 '실사가 항상 최선의 정보전달 방식은 아니다' 라는 문제 의식에 기반한 여러 이미지 필터링 기술 중 하나이다. (실제로 카메론 디아즈와 연락이 닿아 허락받고 생성한 이미지이다) 카툰 스타일 렌더링을 실사 비디오에 적용하는 알고리즘으로 역시 거의 10년 정도 지나서 느닷없이 오른쪽 이미지를 한국 TV에서 볼 수 있었다. 실사가 주는 느낌과 다른, 묘하게 비현실적인 느낌이 trailer를 제작할 때 유용했었나보다. 오늘날 그 누구도 손쉽게 이러한 비디오를 만들 수 있는 이유는 필자의 친구가 Adobe에 취직했기 때문이다.
Gerrymandering (좌) 및 negative space 이어붙이기 (우)
도구와 창작자 간의 관계는 이렇게 느슨하고 예측불허 하지만은 않다. 필자가 반도체 회사 3년차일 때 떨어진 임무를 소개하겠다. 먼저 반도체 설계도가 바둑판처럼 격자무늬로 덮여 있다고 가정하자. 설계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작고 길다란 사각형으로 뒤덮여 있다. 문제는 격자무늬가 이런 사각형들과 교차하는 것을 최소화하도록 격자선을 지그재그로 바꾸라는 것이다. 그 모양이 마치 더 많은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선거구 경계를 바꾸는 짓과 비슷해서 gerrymandering 이라고 명명되었다 (왼쪽 그림). 해법이 만만치 않은 것이 그 scale이 북극에서 남극으로 선을 긋는데 사람들과 충돌을 최대한 피하라는 것과 비슷하며, 무엇보다도 어떤 조건에서도 수 분 내에 완성하되 한 치의 오류도 있어서는 안된다. 필자는 일단 우리 팀에게 알고리즘을 제공하는 타 팀원을 찾아가 요청하였다. "헤이, 내가 이런이런 문제가 있는데, 레이저를 쏜다고 생각하고 내가 있는 곳에서 제일 쭉 뻗은 고속도로를 계산하는 알고리즘을 만들어달라구." 질문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나온 그의 단호한 대답은 바로, "No". 그의 (현명한) 판단에 따르면 나는 신참에 속했고 우리 팀에서 우선 순위가 높은 문제가 아니었을 뿐더러 괜히 고생해서 만들어줬다가 에러라도 나면 덤탱이를 쓸 수 있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어마어마한 양의 반도체를 찍어내는 컨베이어벨트에서 내가 만든 알고리즘이 bottleneck이 되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상상이다. 결국 그 친구는 기존 알고리즘을 뒤지다가 '빈 공간'을 길이 방향으로 자른 사각형들을 얻는 방법을 알려 주었고 (오른쪽 그림) 본인은 그 사각형들을 이어서 지그재그선을 만들 수 있었다.
여기서 핵심은 그 팀원이 제공한 기반 알고리즘과 필자가 그것을 활용해서 수행한 보다 복잡한 task 간의 접점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용어로 이러한 서로 다른 두 level 간의 경계를 interface라고 부른다. low level은 자유도가 높으나 의미 있는 작업을 위해서는 상당한 수의 명령어 조합이 필요하며, 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명령어들을 묶어서 high level 의 interface의 형태로 제공한다. high level 에서는 이를 사용하여 더 복잡한 작업을 수행하거나, 이 명령어들를 다시 묶어 더 높은 레벨의 interface를 만든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작업자의 사고와 결과물의 범위는 주어진 명령어들이 무엇이냐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주식 투자를 한 번 생각해보자. 개인 투자자는 다양한 펀드의 성격과 과거 이율을 참고로 안정성-수익성에 기반한 포트폴리오를 꾸린다. 펀드의 매니저들은 각 회사의 비전과 실적을 고려하여 주식을 거래,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한다. 각 회사의 경영자는 변화무쌍한 경영 환경에서 회사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한다. 결국 각자 주어진 파라미터 내에서 최대한의 output을 추구한다는 말인데, 디자인에 있어서는 조금은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블록의 모양이 집 모양에 영향을 준다면 블록은 어떻게 디자인 되어야 하는가? 디자이너는 유체역학을 배워야 하는가? 입문자에게 연필 대신 컴퓨터 마우스를 쥐어주어도 괜찮은가?
이러한 도구에 따른 생각의 변화를 관찰하기 위해 두 가지 정도의 실험을 진행해 보았다. 내가 과연 어떠한 도구로 디자인을 하고 싶은지 먼저 생각해보자. 머리에 떠오르는 디자인 이미지를 실체로 구현하기까지는 거의 고통에 가까운 많은 단계들이 존재한다. 걸맞는 재료와 도구 선정,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스킬, 구축 과정에 대한 planning과 execution, 그리고 백에 아흔 아홉 못마땅한 결과에 대한 평가와 재실행까지. 이것이야말로 초기 솔루션에 꽂히게 (fixate) 만들고 초짜 디자이너를 절망시키는 원인이다. 여기서 필자는 궁극의 미디어로 자연어를 생각해보았다. "어이 컴퓨터, 공을 두 개 만들어봐. 위치는 적당히 교차시키고 표면을 부드럽게 처리한 다음, 표면은 축구공같이 해보라고. 선을 따라서 조금 돌기도 만들고." 웬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은가? 3D 모델링 소프트웨어야 어차피 프로그래밍 언어이고, 이는 결국 무려 전자(양자 전자의 그 전자 맞다)의 움직임이 첩첩히 쌓인 interface를 통해 만든 것이라면, 자연어까지 연결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필자가 써 낸 이러한 연구 제안서에 대해 평가자는 이렇게 커멘트를 했다. "그래, 어디 잘 해 보라구. 근데 어려울껄? 내가 알던 시도들은 다 실패했어."
자연어기반 (Potential of a Text-Based Interface as a Design Medium, IWC) 및 프로그래밍기반 (Alice) 애니메이션 저작도구
빠르게 주제 현실을 파악하고서 만들어 본 것은 자연어기반 애니메이션 저작도구이다 (조수호 대표께 감사를!) UI 는 주어+동사+목적어 등 3,4,5형식 영어 문장을 넣을 수 있고 아래 캐릭터들이 이 문장에 따라 행동을 한다 (왼쪽 그림). "곰돌이가 집 앞에 있는 토끼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토끼야 안녕?" 정도의 문장의 행동을 정의하기는 쉽다. "열쇠를 건네받아 자동차를 타고 가버렸다" 는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구현이 조금 힘들었다. 이를 프로그래밍 언어기반 애니메이션 저작도구 (CMU에서 개발한 Alice) 와 비교해 보았는데, 결과적으로 프로그래밍 언어로 애니메이션을 만든 사람들은 훨씬 다양하게 감정을 나타냈다. 예를 들어 '화났다'를 표현하기 위해 캐릭터들은 빨갛게 변하기도 하고, 말풍선이 오가기도 하고, 펄쩍펄쩍 뛰기도 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조합 (= 노동)이 필요했던지라 스토리가 매우 짧았다. 반면 자연어 기반에서는 스토리 자체가 훨씬 길었으나 개별 애니메이션들이 미리 정의되었으므로 애니메이션 자체가 천편일률적이었다.
(1열) 오리지널 스케치 (2,4열) 오리지널 스케치를 모델링한 것 (3,5열) 각각 모델링한 후 다시 자유스케치. Design Studies
하나 더 시도해본 것은 모델링 소프트웨어에 따른 3차원 모델의 특징을 알아 본 것이다. 비교한 소프트웨어로는 Google SketchUp 과 MIT에서 개발한 정면/측면/평면을 제공하면 3차원 모델을 자동으로 생성해주는 것이었다. 일단 피실험자들에게 아무 것이나 하나 그려보라고 하고, 그것을 각각 두 가지 소프트웨어를 통해 모델링을 하도록 지시하였다. 오리지널 스케치와 어떻게든 비슷하게 해보려는 노력을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다시 스케치를 해보라고 하였는데 구지 모델링을 다시 하라고 시키지 않았음에도 역시나 도구에 매우 최적화된, 박스 형태 vs. 정면/측면/평면에 기반한 스케치들이 등장하였다. 소프트웨어의 UI에 매우 충실하게 사고가 갇혀버린 것인데, 이를 타계할 방책으로 특정 UI는 결국 수학적 표현에 기인하는 것이므로 3D 모델에 대해서 복수의 수학적 표현을 유지해야 된다고 제안하였다 (가능할까?).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초심자들에게 마우스를 쥐어주면 안된다! 그래 나 꼰대다
사실 자연어 기반 연구는 필자가 거의 10년전 수행했던 것으로, 현재 널려있는 인공지능 스피커의 존재는 상상도 못할 때이다. 게다가 이제는 뇌파를 통해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이미지까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니, 생각과 실체와의 거리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것은 시간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한치 앞을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현재의 디자이너들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만 할까? DDP에 서려있는 하디드 누님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곱씹어보자. 그녀가 10년간 암흑기를 겪은 원인은 그 독특한 디자인 - 러시아 구성주의에 기반한 뾰족한 조형들의 강한 운동감과 긴장감 - 이 너무 급진적이고 기능적으로 비효율적이라는 낙인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팀은 낙관과 실험, 도전을 계속하였는데, 이의 미학적 완성 및 현실화는 수학적 도구들과의 화학적 결합 및 현대 건설 기술의 뒷받침을 통해 가능하였다. 애초 내재적 동인이 있었으되 도구가 그 오리지널리티를 극대화하였다는 말이다. 픽사의 존 래서터는 이 관계에 대해 "The art challenges the technology, the technology inspires the art" 라고 말했다. 그 자신도 최고의 이야기꾼이었으나 3D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보았다가 바로 디즈니에서 해고된 경험이 있다. 이후 픽사는 우여곡절 끝에 대박을 터뜨리며 2D 애니메이터들을 사실상 멸종시켰다.디자이너들이여, 먼저 타협없는 비전을 갖자.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도구를 기다리자.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