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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소유 May 24. 2024

기억은 삶이 된다

영화 <애프터썬>을 보고

  

  눈부신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아빠와 딸의 뒷모습이 아름다우면서도 뭔지 모르게 아련해 보였다. 영화 <애프터썬>이 궁금해졌고 보고 싶어진 순간이었다. 영화는, 중간중간 의미를 알 수 없는 막연한 장면을 빼면 아빠와 딸이 튀르키예를 여행하며 때로는 다정하고 때로는 장난기 넘치며 어떨 때는 친구처럼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담긴 여행 이야기로 보였다. 아마 나는 아빠와의 튀르키예 여행이 너무나 즐거워 보였던 소피의 눈으로 영화를 보았나 보다. 아빠의 캠코더로 능청스레 인터뷰를 하는 모습이나 사춘기 소녀답게 낯선 여행지 환경에 호기심 가득한 모습을 보이는 11살 소녀 소피의 모습이 더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고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던 영화 속 장면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렴풋이 예견되는 결과가 있었지만, 성급히 단정 짓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동시에 영화를 보고 나오자마자 나는 휴대전화 검색 창에 ‘애프터썬’을 입력하고 있었다.


  <애프터썬>을 두 번째 보았을 때 영화는 다르게 보였다. 내 안에 영화에 관한 정보가 늘어나서일까. 11살 소피는 여전히 아빠와의 여행이 행복해 보였지만 이번에는 아빠의 모습에 더 눈이 갔다. 딸 앞에서 애써 밝아 보이려 노력하는 모습, 그럼에도 감추지 못했던 불안한 모습들. 딸이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이상할 정도로 엄격하게 가르쳐주는 호신술 같은 동작. 침대에 누운 아이 얼굴 하나하나 잊지 않으려는 듯 어루만지며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모습. 딸이 나중에 커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에게 다 말해주기를 바랐던 아빠의 마음까지. 허투루 보고 넘겨지지 않아 장면마다 마음이 아팠다.


  내가 이 영화를 겨우 두 번 보는 동안에도 이렇게 달라지는데 점차 희미해졌을 소피의 기억 속 아빠 모습 역시 그렇지 않았을까. 자라면서 알게 되는 상황들까지 덧입혀지면서 말이다. 소피는 아빠와의 여행이 담긴 캠코더를 몇 번이나 돌려 봤을까. 자꾸만 옅어지는 아빠에 대한 기억을 붙잡기 위해 얼마나 되돌리고 또 돌렸을까. 그래서 영화는 마치 사실과 상상이 덧입혀진 소피의 기억인 것만 같았다.


 이제 그때의 아빠만큼 나이를 먹은 소피의 기억 속 아빠는 어떤 모습일까. 춤을 추는 듯한 몸짓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는 고통 속의 아빠를 꽈악 끌어안는 성인이 된 소피의 모습, 그게 그 대답 같았다. ‘아빠 왜 그랬어? 아빠가 없어서 너무 힘들었어. 그렇지만 아빠, 나는 그때의 아빠를 꼭 안아주고 싶어.’ 영화 마지막에 흐르는 Queen의 ‘Under Pressure’는 마치 소피가 기억 속의 아빠를 위로하는 곡 같아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내내 그 여운이 파도처럼 밀려들었고 그럴 때면 내 가슴은 뜨겁게 녹아내렸다.


  기억 속에서 아빠와 여행한 시간이 소피에게만은 아주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아빠 품에 꼬옥 안겨 세상 다 가진 충만한 표정으로 춤을 추는 소피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다. 커가면서 그렇게 사랑했던 아빠의 부재가 무엇보다 힘들고 화나고 가슴 아픈 상처로 남았겠지만, 아빠와의 행복했던 기억 또한 틀림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소피에게 그 기억은, 그럼에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어 주었을 거라 믿는다.


  우리 아버지는 세상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였고 하나뿐인 딸에게 애정을 표현한 적이 거의 없었다. 아버지를 닮아 나 역시 다정하지 않은 무신경한 딸이었으니 아주 억울한 일은 아니었지만 때때로 뭔가 부족한 기분이 늘 마음에 남았다. 어느 날 엄마 화장대 서랍에서 무언가를 찾다가 우연히 엄마가 쓴 육아 일기를 발견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손때 묻은 네모난 수첩에는 내가 막 태어나고 바쁜 틈을 쪼개 썼는지 갈겨쓴 몇 줄의 글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중 눈에 띈 것은 남편에 관한 이야기였다. 첫딸이 태어났는데도 좋다, 이쁘다 표현은커녕 가까이 들여다보지도 않는 남편 모습에 내내 속상했는데 어느 날 술을 마시고 한밤중에 들어온 남편이 갓난쟁이 딸을 한참 들여다보며 놀아주더라는 내용이었다. 짤막한 그 글을 읽는 순간 아기였던 나와 젊은 아버지의 모습은 하나의 이미지로 떠올랐고, 이후 그것은 내 마음 깊은 곳에 각인되어 때때로 나에게 힘이 되곤 했다. 물론 그 기억만으로 아버지가 다 이해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해하려는 계기가 된 것만은 틀림없다.


  기억이란 그런 것 같다. 기억은 삶이 된다. 살아가는 힘이 된다. 힘든 현실 속에서도 확실하게 행복했던 순간에 대한 기억이 존재한다면 그 힘으로 앞으로 한발씩 나아갈 수 있다. 아빠가 딸과의 마지막 여행의 순간을 캠코더로 남긴 이유는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딸을 끝까지 기억하고 싶은 마음, 이런 아빠라도 기억해 주기 바라는 마음, 마지막 안간힘을 써서라도 딸에게 행복한 기억을 남겨주고 싶었던 마음. 그 애잔함을 마침내 기억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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