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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소유 Mar 04. 2024

사랑도 헤어짐도 용맹하게

영화 <헤어질 결심>의 대본집을 읽고

  “사랑은 용맹한 행동이야.” 


  서래(탕웨이 분)가 어설픈 한국말로 말한다. 낯선 억양 탓인지 그리 새롭지 않은 말이 신선한 어감으로 다가왔다. 서래는 뉴스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질곡동 살인 사건의 범인 홍산오가 해준(박해일 분)에게 쫓기다 대치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었다. 홍산오는 죽을 만큼 좋아한 여자 때문에, 죽어도 가기 싫었던 감옥살이를 하고 살인까지 저질렀다. 이 사건은 영화 속에서 주요 사건이 아닌데도 서래의 이 대사 때문에 깊이 각인되어 줄곧 머릿속을 맴돌았다. 심지어 영화에는 나오지도 않는 대사다. 이 영화의 대본집 #65 장면에 나오는 대사로, 영화에서는 편집되었다. 영화를 보고서 대본집을 읽어서인지 신기하게도 영화관에서 본 것 마냥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서래가 말한다.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해준이 말한다.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어요?” 


  사랑한다고 했잖아. 굳이 말로 해야 아는 거니. 네 눈빛, 행동,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서래에게 사랑한다 말하고 있었으면서. 3인칭 관찰자 시점의 나에게는 확연히 보였지만, 서래는 해준이 헤어질 결심으로 내뱉은 말에서 그의 사랑을 확신했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그날 서래는 무슨 생각으로 그의 말들을 녹음했던 것일까. 처음 의도와 같았는지 달라졌는지는 모르겠다. 서래는 그와 헤어지고 음성 녹음한 그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듣는다.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하는 그의 말이 너무 좋아서. 서래로 인해 자신이 붕괴되었다는 그의 화난 목소리는 괴로웠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지켜준 해준의 사랑 고백을 곱씹어 들으며 부질없는 사랑을 시작했다. 


  서래가 해준의 목소리를 녹음한 음성 파일 듣는 것을 보면서, 이십 년 전 사랑에 빠졌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남자 친구와 나는 사귀기로 하고 얼마 후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다. 그는 부산, 나는 서울에 있었다. 어느 날 오랜만에 부산에서 만난 우리 데이트의 마지막 코스는 노래방이었다. 당시 노래방에서는 원한다면 우리가 부른 노래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주곤 했다. 그날 남자 친구는 김동률의 ‘취중진담’을 불렀고 당시 내 눈에 씐 콩깍지를 감안하더라도 꽤 괜찮은 노래 실력이었다. 이날 ‘취중진담’을 불렀던 남자 친구의 목소리는 나와 함께 서울로 갔고, 나는 오며 가며 지하철 혹은 버스에서 그가 노래하는 목소리를 듣곤 했다.  


   서울 생활을 하다 보면 때때로 내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특히 어둑해져 갈 시간에 더 그랬다. 사람들가득  찬 서울 지하철 안에서 나는 한없이 외로웠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내 귓속으로 울려 퍼지는 것은 바로 그가 부르던 노랫소리였다. 남자 친구에게는 그저 노래방에서 뽐내며 부른 노래 한곡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녹음된 그의 목소리가 크나큰 위로가 되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해서 불안했던 현실 속에서 나를 사랑해 주는 이가 있다는, 혹은 내가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어주는 목소리였다. 


  “해준 씨, 임호신 전화, 그거 버려요. 깊은 바다에 버려요.” 


  이번에는 서래의 사랑 고백이자 헤어질 결심이었다. 해준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경찰로서의 자부심을 버리고 붕괴되었던 것처럼 서래는 자신의 사랑을 위해 죽음이라는 붕괴를 택한다. 거친 파도가 사정없이 밀려들어오고 구덩이 속 서래의 몸 위로 모래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다.  


  “난 해준 씨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에 갔나 봐요. 벽에 내 사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서래가 해준의 목소리가 담긴 음성 녹음 파일만 하염없이 들었던 것처럼 이제 해준은 미결 사건으로 남게 될 서래의 사진만 하염없이 바라보게 될까. 서래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담이지만, 이십 년 전 노래방에서 녹음한 목소리까지 들어가며 열렬히 사랑했던 남자 친구는 어느샌가 남편이 되었고 17년째 함께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가끔 웃으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이런 대화를 주고받곤 한다.    


  “그때 우리 연애할 때 말이야. 둘 중에 한 명이라도  용기를 냈다면 헤어질 수 있었을 텐데, 너랑 나는 왜 그리 우유부단하고 마음이 약했을까.”  


  한때 우리는 분명 서로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마침내, 헤어질 결심을 내릴 정도로 용맹하게 사랑하진 않았나 보다. 어쩌면 영화 속 해준과 그의 아내 정안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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