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중밑줄
<독서는 일이다>
독서는 빡세게 한다
독서는 일이어야만 합니다. 독서는 빡세게 하는 겁니다. 독서를 취미로 하면 눈만 나빠집니다. 한동안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 독서를 하자는 말까지 버젓이 권해졌어요. 그러다 보니 아주 말랑말랑한 책만 팔렸죠. 김난도 교수님과 친하긴 하지만, 가끔 저는 ‘아프냐?’라고 묻는 책을 뭐 하러 읽느냐고 대중 앞에서 말합니다. 언젠가 제 강의가 끝나고 김난도 교수님이 다음 차례로 대기하고 있으셨는데요. 제가 그렇게 말하니, “선생님,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라고 하시더라고요. 우리나라 도서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책은 마음을 살살 건드리는 책 혹은 자기계발서입니다.
그런데 자기계발서를 읽고 성공했다는 사람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성공한 사람이 자신이 어떻게 성공했는가에 대한 책을 써서 돈을 더 번 사례는 아는데, 그 책을 읽고 성공한 사람을 본 적이 없거든요. 책은 우리 인간이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발명품인데, 그 책을 취미로 읽는다? 이건 아니죠. 독서는 일입니다. 빡세게 하는 겁니다. 읽어도 되고 안 읽어도 되는 책을 그늘에 가서 편안하게 보는 건 시간 낭비이고 눈만 나빠져요.
책은 인류의 발명품 중에서도 최악의 발명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은 3차원을 보게끔 진화했어요. 책은 평면에 글자를 새겨서 만든 2차원 물건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눈이 아파요. 책은 눈을 망가뜨린 원흉이에요. 우리는 기획서를 작성해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치밀하게 기획해서 공략해야죠. 한 번도 배우지 않은 분야의 책을 공략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한 번도 배우지 않았는데 술술 읽힐까요? 난생처음 붙든 양자역학 책의 책장이 척척 넘어갑니까? 진화심리학이 하도 뜬다니까 ‘좀 읽어 봐야지’라고 생각하곤 붙잡았는데, ‘와! 잘 읽히네’ 하면 거짓말이에요. 당연히 안 읽힙니다.
그런데 그 책을 있는 힘을 다해서 끝까지 읽고, 또 비슷한 진화심리학 책을 사서 읽다 보면, 세 번째 책은 참 신기하게 술술 넘어갑니다. 어느 순간 그 주제가 내 지식의 영토 안으로 들어와요. 제가 해봐서 아는 이야기 하나를 할게요. 진화심리학을 공략을 한 다음에 양자역학을 공략하겠다고 마음먹고 읽으면 어떨까요? 힘들어요. 그런데 요런 투쟁을 몇 번 하다 보면 그다음에 생판 모르는 분석철학을 읽고 문화인류학을 읽을 때, 묘하게 쉬워집니다. 독서량이 늘어날수록 완전 새로운 분야의 책을 접할 때, 전보다 덜 힘들어하는 자신을 발견할 거예요.
평생 다양한 책을 읽으며 살아온 제 경험담입니다. 학문은 모두 연결되어 있잖아요. 어떤 분야를 기어 올라가면서 3층에서 보려고 애써도 안 보이던 게, 다른 분야를 올라가면서 4층에서 건너다보니 저쪽 분야 3층 구조가 훤히 보이더라고요. 독서를 일처럼 하면서 지식의 영토를 계속 공략해나가다 보면 거짓말처럼, 새로운 분야를 공략할 때 수월하게 넘나드는 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날이 오면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우실 거예요. 100세 시대에 20대 초에 배운 지식으로 수십 년 우려먹기가 불가능합니다.
학교를 다시 들어갈 게 아니라면, 결국 책을 보면서 새로운 분야에 진입해야 하죠. 취미 독서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독서는 기획해서 씨름하는 ‘일’입니다
<최재천의 공부> 중에서